스물아홉 번째 : 국수공장 단골손님

라디오 청취자 배은숙

by 김밀


- 라디오를 듣다 보면 ‘오늘은 문자가 적게 왔구나’ 이런 것도 알아요.

- 무섭네요. 부끄럽지만 우리는 그냥 흘러가거든요. 공장 같이요.


애청자의 입을 통해 듣고 보니까 빨간 불에 차가 없어서 횡단보도를 날름 건너다가 아는 사람에게 들킨 것 같았다. 오프닝 재탕하는 것도 알겠구나, 이건 품 안 들이고 하려는 것도 알겠구나, 퀴즈 할 게 없어서 억지로 만들어낸 것도 알겠구나.


9시와 11시 연이어 세 시간의 프로그램을 맡고 있으면서 ‘국수 공장’ 같다는 생각을 한지는 꽤 됐다. 두 명의 디제이는 조금의 과장을 보태 단 두 줄만 있어도 두 시간을 할 수 있는 베테랑. 디제이가 기계에서 쫙쫙 소면을 뽑고, 진하게 우린 육수를 담아주면 나는 고명만 얹어 내는 국수 공장 말이다.


지역방송에서 라디오는 구색 맞추기다. 웰컴키트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텀블러 말고, 귀퉁이에 있는 작은 볼펜 같은 것. 회사는 눈에 띌만한 ‘헛짓거리’만 하지 않으면 적당한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덕분에(?) 디제이든, 작가든 가늘고 길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진다.


여기에 진행자는 생명을 연장하는 필수 조건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착함’이다. 일주일에 5일, 매일매일 방송을 듣다 보면 청취자는 진행자의 대부분을 알게 된다. 기질은 어떤지, 요즘은 무엇이 관심사인지, 무얼 싫어하고 좋아하는지 등등. 기질도 관심사도 취향도 상관없다. 이런 것 따위 사람마다 다를 수 있으니까. 그러나 ‘못된 구석’ 은 청취자가 가장 불편해하고, 제작진이 모를 리 없고, 회사가 알아챈다. 한두 번의 거짓말은속아 넘어갈 수 있지만, 한 두 번이다. 그래서 오래 일하는 진행자들은 선한 사람일 수밖에 없다.


- 쓰디(9시 디제이, 쓰레기 디제이를 줄인 말)와 수디(11시 디제이 김수희)가 너무 달라요. 쓰디는 그런 것 따위 신경 쓰지 말라고 위로해 주고요, 수디는 괜찮다고, 나도 그럴 때가 있다고 안아주죠.


애청자뿐일까. 착한 디제이 둘을 만난 덕분에 매일 출근길이 즐거운, 이 세상에 몇 안 되는 행복한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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