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 <노르웨이의 숲>

사진을 찍은 순간부터 빛 바랠 때까지가 하나의 과정이었다.

by 김라온

들어가며.

‘이별‘이라는 단어가 연상시키는 단어들은 다양하며 개개인의 편차가 존재하겠지만, 나의 경우에는 술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 같다. —사실은 떠오르는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이별 후 술을 마시곤 했다— 이별곡의 화자나 드라마 속의 주인공들 또한 이별을 마주한 후 숱하게 술을 찾는 것을 보면 나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것 같다. 그리고 그건 아마도 이별이 주는 고통을 잠시나마 망각하기 위해 진통제 삼아 마시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오히려 아픈 기억을 더 생생히 떠올리려 노력하고 직시하려고 드는 사람이 있다. 바로 오늘 다룰 책의 화자이자 주인공, ’와나타베‘이다. 오늘의 이야기는 사랑이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끝나며,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고 그것으로 어떻게 상처 입히는지를 조용하지만 치열하게 응시하는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 (구 제목: 상실의 시대)>이다.


과업.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 한 가지 바라는 점은 독자분들께서 필자가 얼마나 큰 부담감 —사명감이라 해도 과하지 않을 정도이다—을 가지고 이 글을 써 내려가고 있는지 알아주셨으면 하는 것이다. 글쓰기를 꽤나 좋아한다 불리는 소위 ‘글쟁이‘로서 모든 글을 쓰는 데에 있어 대충이었던 적은 없지만, 사랑을 해보지도 않은 열여섯 살의 나날로부터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떠나보내는 것을 다회 반복한 지금까지, 본 작은 내게 친구이자 멘토였으며, 때로는 내 그림자의 일부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본 작을 재독 할 때마다 —몇 회차인지 세지도 않은 것이 오래됐을 정도이다— 당연히 서평을 쓰고 싶었으나, 다음 두 가지 이유들로 인하여 미뤄왔다.


첫째. 너무나 좋아하는 책이기에 — 소위 말하는 ‘인생책‘ 이기에 — 서평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아 그것으로 인하여 인생책의 서평이 난잡한 글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둘째. 상기한 대로 내 인생의 동반자를 넘어 나의 일부인 책이기도 하기에, 본작의 서평을 쓴다는 것은 나의 내면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여 부끄럽기도 했다.


그러나, 소설 집필을 시작한 것을 계기로 남들에게 글로써 나의 내면을 보여주기 것을 업으로 하는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지금 용기를 내어 과업을 완수하려 한다. 추가로, 주변의 나의 글에 대한 칭찬과 격려 또한 큰 도움이 되어 굉장히 감사한 마음으로 써내려 가는 중이다.


사랑의 정의.

내가 생각하는 본작의 정독법은 주인공과 히로인, 와타나베와 나오코의 에피소드들을 지켜봄으로써 사랑의 조건, 또는 ‘어떤 것이 사랑인가’에 대하여 하루키와 함께 고찰해 보는 것이다. 하루키가 (그들의 모습을 통해) 제시한 사랑의 구성요소(또는 조건) 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1. 상대를 위하는 마음, 헌신과 희생

기즈키와 나오코의 사랑은 겉으로 보기에 완벽했지만, 사실 ‘어릴 적부터 늘 함께였다’는 수식어에 갇혀있는 관계였다. 그 둘은 서로에게 헌신적이었음은 명백하지만, 그 헌신은 온전히 그들의 자율성이나 욕망에 의한 것이라 말하기엔 힘들었다. 마음의 끌림보다는 의무감과 책임감에 의해 행하는 헌신은 오히려 사랑을 짓누르기도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반면, 와타나베-나오코 간의 관계는 그렇지 않았다. 사회적 조건과 그들의 상황 모두 이상적이지 않았지만, 그는 그녀를 우상화하지 않은 채로 그녀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했다. 그녀의 상처와 어딘가 특이한 모습도, 심지어는 일그러진 영혼도. 그런 그의 노력은 그녀의 삶을 어느 정도 지탱하며 연장해 주었다.

그러나, 결국 그녀가 자살하는 것에 대해서는 — 다양한 해석이 있겠으나 — “사랑과 헌신에도 결국 한계가 있음”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겠다.


2. 내 삶에 상대방이 존재해야 할 이유, 기억과 의지

와타나베와 나오코에게는 그들을 서로 이어주는 강력한 끈이 있었는데, 바로 기즈키에 대한 기억과 그와의 추억이었다. 이것이 시사하는 것은 ‘사랑의 불멸성‘이다. 기즈키는 죽고 그의 시신은 잿가루가 되었겠지만, 그가 남긴 흔적들은 결코 지울 수 없었으며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와의 추억들은 두 주인공들에게 영원히 남아 계속해서 괴로움을 주었으며, 동시에 두 사람의 관계를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주기도 하였다. 즉, 하루키는 말한다. 사랑이란 누군가를 가지기 시작했던 순간부터 그 사람을 잃고 난 후에도 지속되는 것이라고.

덧붙여서, 남겨진 두 명이 공통된 상실로 인한 상처를 서로 다듬어주고 공감해 주는 것은 사랑이란 ‘상대방에 대한 헌신을 통해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를 찾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3. 본능적인 이끌림, 성욕

와타나베와 나오코가 처음 성관계를 맺을 때, 그녀는 자신이 경험이 없다, 즉 기즈키와 관계를 맺어본 적 없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 이유가 자신의 음부가 젖지 않아서라는 것 또한 밝히는데, 이 부분은 와타나베에게뿐만 아니라 독자들에게도 굉장히 의외의 부분일 것이다. 나오코와 기즈키는 굉장히 이상적인 연인으로 비치니까. 그럼, 나오코가 그를 사랑하지 않았던 걸까?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앞서 언급한 ‘이상적인 연인‘이었던 것이 오히려 그 원인으로 지목하고 싶다. 기즈키는 작품 내에서 영리하고 매력적인 인물로 묘사되지만, 한편으로는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선 그은 채 와타나베와만 우정을 이어가는 것으로 나온다. 심지어, 절친한 사이였던 와타나베와 근 평생을 함께한 나오코에게도 얹나 유서조차 없이 자살한 그이기에, 생전 나오코에게 마음을 온전히 열지 않았을 것이라 추측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결과적으로, 나오코 또한 그런 그에게 완전하게 마음을 열고 선을 넘는 것이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너무나 오랜 시간 동안 가까이서 함께한 그들이기에, 사랑보다는 우정이나 가족 간의 사랑과 비슷한 관계의 지속 또한 이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열지 못한 ‘배신’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며 무너져가는 나오코가 상실 이후 와타나베를 만나고 그와는 ‘정상적으로’ 성관계를 맺게 된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상기했듯 그가 기즈키와의 연결고리이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더해서, 와타나베는 한없이 가라앉는 그녀를 이해하고 함께 가라앉아준 인물이었던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사는 그녀가 그런 그와 인간으로서, 또한 여자로서 연결되고 싶었던 것은 당연한 감정일지 모른다.

‘정상적으로’ 성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나오코에게 결과적으로 긍정적으로 작용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들이 관계를 끝내고 나오코가 “왜 지금? “이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는데, 과거 사랑하던 사람과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상기한 죄책감을 더욱 깊숙이 심어주었을 것이다. 결국, 그 후로 나오코의 상태는 악화되고, 자신을 찾지 못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불가항력.

얼마 전 발매된 가왕 조용필의 마지막 정규 앨범 <20>의 수록곡인 ‘Timing’ 에는 다음과 같은 가사가 나온다. — 언론에서 나를 지칭하는 용어인 ‘MZ세대’와 조용필 선생님이 거리가 먼 것은 나도 알고 있지만, 그분의 새로운 시도들을 보면 클래스는 영원하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


‘사랑에는 Timing


누가 뭐래도


인생에는 Timing


… (후략)‘


남녀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데에 있어 각자의 외모, 취향, 또는 계기 같은 것들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그런 것들이 모두 맞아떨어지더라도 상황이나 때가 적절치 못하여 완성될 수 없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본작의 주인공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와타나베가 나오코를 사랑하며, 나오코 또한 그에 대한 감정이 있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 둘은 영원히 평행선을 그릴 수밖에 없었는데, 나오코는 기즈키의 기억이 만들어낸 ‘또 다른 세계’에서 영원히 머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와타나베는 그런 그녀를 구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결국 그녀를 영원히 떠나보내게 되며 그들의 사랑은 서로에게 더 큰 상처만 남기게 된다. 사랑이라는 긍정적 감정이 같은 방향으로, 올바른 때에 작용하지 않아 일어난 비극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하루키는 사랑이 만능은 아님을, 또한 인간의 힘만으로는 어쩔 수 있는 도리가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치며 - 삼켜도 끝맛이 남는 위스키처럼.

와타나베는 소설의 초입부에서 죽마고우를 잃는 것으로 시작하여 계속해서 크고 작은 상실을 겪는다. 그러나, 그는 결코 점점 가벼워지지 않는다. 도리어 사랑이란 완전하지 않으며, 이해할 수도 없고, 인생의 모든 다른 것들처럼 결국 떠나보내야만 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 스스로를 채운다. 그리고 그런 비극, 사랑의 실체를 알게 되었음에도 계속해서 누군가를 사랑하려는 사람으로 남는다.


우리 또한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무언가를 상실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남은 순간을, 그리고 나 자신을. 그리고 그 사람과의 사랑은 하찮은 실패 또는 잘못된 결과로만 남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루키는 말해준다. 완전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원래 그렇다고. 그 사람과의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순간들이 하나 둘 모여 우리의 영혼 속 어딘가에 자리 잡아 거름이 될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