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진짜 얼굴

by 김소연 빛나는 숲

어린 시절 아버지는 호랑이처럼 무서운 분이셨습니다. 벌겋게 그을린 얼굴에서 풍기는 달큼한 술냄새와 몸에 새겨진 칼자욱들은 어린 저에겐 두렵고도 익숙한 풍경이었습니다. 술에 취한 아버지는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습니다. “니밖에 없다. 믿을 사람 없다.”


돌이켜보면 아버지는 늘 사랑에 굶주려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무섭다고도 했고 얼굴이 못생겼다고도 했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두렵기도 했지만 가엾기도 했습니다. 아버지의 갈라진 입술은 제게 하늘처럼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저의 하늘은 안전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밤이면 술에 취한 아버지를 피해 도망쳐야 했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이웃집에 몸을 숨기기도 했고 옷장에 들어가 숨을 죽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술에 취하지 않은 아버지는 재밌고도 사랑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그 모습이 아버지의 진짜 얼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혼란으로 가득했던 어린 시절 저에게 대학은 꿈이었습니다. 고향을 떠나고 싶었습니다. 전혀 다른 삶을 갈망했고 마침내 그렇게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식들이 각자의 가정을 꾸리자 어머니는 더는 미련이 없다는 듯 아버지를 떠났습니다. 아버지는 홀로 여전히 그 삶 속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늘 배신만 당한다던 그 동네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채 아버지는 서서히 늙은 호랑이가 되어 갔습니다. 그토록 무섭던 풍채도 사라지고 어느새 지팡이를 짚으셨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는 독감으로 앓아누우셨습니다. 지독한 외로움과 고열이 아버지를 뒤덮었고 끝내 뇌졸중으로 몸이 마비되었습니다. 아기처럼 순한 노인의 모습만 남았습니다. 아버지는 음식을 삼키지 못했고 다리를 움직이지 못했고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대신 천천히 눈을 깜박였고, 손을 뻗어 나를 쓰다듬어주었습니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았습니다. 그제야 아버지는 고향을 떠나 딸이 살고 있는 도시로 오셨습니다. 아버지는 매일 딸의 장난을 받아주고 함박웃음을 짓기도 했습니다. 의사는 치매라고 했습니다.

저는 아버지께 묵주 팔찌를 가지고 놀게 해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좋은 선물이라도 받은 양 기뻐했습니다. 손에서 놓지 않았습니다. 십여 분 놀고 나면 기력이 없어 이내 잠들었고 다시 나를 만날 때면 아기처럼 웃으며 반겨주었습니다. 어머니가 찾아온 날 아버지는 눈을 크게 뜨고 그 손을 꼭 잡았다고 합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으셨을까요. 그렇게 보낸 한 달 동안, 난생처음으로 따뜻하고 평화로운 아버지였습니다. 저는 그 모습이 아버지의 진짜 얼굴이라고 믿습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레지오 단원들께서 신부님을 모시고 병원을 찾아오셨습니다. 병상에 누운 아버지는 의식이 분명하지는 않았지만 평화로운 얼굴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하느님 품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묵주 팔찌를 관 속에 함께 넣어주었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아버지를 위하여 연도를 바쳐주었습니다. 장례미사는 고요하고도 아름다웠습니다. 생의 마지막에 찾아온 은총이 뒤늦게 쏟아져 내리는 듯했습니다.


저는 우연히 깨달았습니다.

하느님 품에서 나와 긴 세월 방황하던 한 사람이 끝내 세례를 받고 다시 그 품으로 돌아갔다는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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