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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치열했던 여름

by rimmie


6, 7, 8월의 여름이 또 훌쩍 지나가고 있다. 너무너무 바쁘고 벅차서 체력적으로 힘들어 7월 초쯤에는 왈칵 눈물이 차올라 꺼이꺼이 울기도 했다. 매번 일을 하다보면 일이 점점 그 몸집을 불려서 늘어만 가는데, 여름방학에 Wee센터에서 주관한 연수 강사님이 이 고민을 들으시고는 웃으시면서 '일을 잘해서 그렇다, 인정욕구는 늘릴 수는 있어도 줄일 수는 없으니 받아들이고 인정욕구에 맞게 리더 자리에 앉으면 된다'라고 하신 말씀이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내가 '저는 리더의 자리가 너무 부담스럽고 어떤 결정을 내리고 책임을 지는 것이 무섭고 무겁다'고 말했는데, 강사님이 '어차피 리더가 아니어도 내가 한 일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지는 것이고, 리더가 되어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결정하고 이끌어가는 것은 꽤나 재미있다'고 하셨다. 그리고 '가운데에 있으면서 리더의 기준에 끼워맞추고 후임을 살피면서 여기저기 눈치보는 것만큼 피곤한 일이 없다'고 이야기해주셨는데, 이 대화가 마음 속에 남아 '과연 그럴까?' 하고 몇 번 재생되었다.




글을 써보면서도 느끼는 것이지만 output이 있으려면 균형있게 그만큼의 input이 있어야 지속 가능하다는 생각이 든다. 계속 output만 산출해 내는 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고 느낀다. input은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일 수도, 강의나 연수를 듣는 것일 수도 있지만, 조용한 장소에서 책을 읽는 것만큼 채워지는 것도 없는 것 같다. 올해 상반기에 너무 바빠서 책을 읽을 시간이 없었지만, 바쁜 마감기한이 한 차례 지나가자마자 집어 들고 읽은 책이 있었다. “나는 심리치료사입니다(Letters to a young therapist)”라는 책인데, 사실 신규 때부터 어딘가 연수에서 추천받아서 위시리스트에 담아두었던 책이다. 학교에 신규 발령을 받고 헤매고 있을 때에도 학교 도서관에 신규 도서로 신청해서 장기대여를 하고 위(Wee) 클래스에 눈에 잘 보이게 세워두었는데도 불구하고 결국 읽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그 때는 아마도 초심 상담자로서 눈 앞의 현실을 맞닥뜨리기에도 마음이 벅차서 선배 심리치료사가 차분하게 전하는 이야기가 들리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에서야 이 책의 따뜻하면서도 단호한 문체가 읽히는 것을 보면 같은 조언이더라도 나의 상황과 상태에 따라서 받아들여지는 정도가 다르다는 생각을 한다. 특히 8월 11일에 교육부가 주최하고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대안교육지원센터에서 주관하는 대안교육기관 교직원연수에서 심리상담 주제 특강을 맡아 외부강의를 하고 왔는데, 강의를 준비하면서 이 책의 문구들이 방향성을 잡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 인용구가 상담의 본질을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강의의 시작점에 소개하였는데, 여기에도 남겨두려고 한다.

저는 도발적이지도 신랄하지도 않습니다. 저나 제 내담자들에게는 간단하고 솔직한 방법들이 더 잘 맞았습니다. 저는 가장 기본적인 작업을 합니다. 내담자들의 문제에 대해 논의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승리를 축하하고 행복한 사건을 기록합니다. 저는 거의 항상 내담자들에게 숙제를 내줍니다. 제가 내주는 가장 기본적인 숙제들은 재미있게 놀기, 좋은 일 하기, 운동하기 등입니다. 저는 상담 시간에는 전화를 연결 받지 않습니다. 내담자들이 스트레스에 지친 상태로 헐레벌떡 급하게 도착하면, 저는 함께 조용히 앉아서 몇 분 동안 심호흡을 한 후 대화를 시작하자고 제안합니다. 마찬가지로 흐느껴 울 때도 저는 그저 가만히 기다립니다. 제 친구인 비키 로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지혜의 속도에 맞추어 삶의 속도를 늦추도록 도와야 해." 목소리 톤, 사용하는 단어, 얼굴 표정, 몸짓 등을 통해 우리는 이런 메시지를 내담자에게 전달합니다. "당신과 나는 이 문제 안에 함께 있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지든 우리는 그것을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심리치료사입니다(메리파이퍼 저, 안진희 옮김, 위고) pp. 75-77.



이번 강의는 대상이 전국 비인가 대안교육기관 교직원이고 주제가 '학생상담 노하우와 교직원 소진관리'여서 심리상담에 대한 친숙도와 이해도, 경력, 학교의 여건 및 외부자원의 폭 등이 제각각 다를텐데 전체 교직원을 대상으로 학생상담에 대해 논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얼마만큼의 깊이로 어떤 내용을 다루어야 할지 당최 감을 잡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5년차 전문상담교사인 내가 더 고경력의 선생님들 앞에서 학생상담과 교직원 소진에 대해 왈가왈부한다는 것이 조심스럽고 부담스럽기도 했다. 다만, 섭외전화를 받았을 때 작년 말에 했던 강의를 듣고 추천을 받아 전화를 주셨다고 하여 나의 이력을 알고 나를 섭외했다면 분명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역할을 맡은 바 선생님들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내용으로 충실하게 준비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괜히 나를 과장하고 포장해서 대단한 사람인 것 마냥 나서기보다는, 내 모습 있는 그대로 진정성있게 보여주고 나의 경험과 고민을 나누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리고나니 학생상담에 대해 어떤 것을 이야기하면 좋을지 그 윤곽이 조금씩 보였던 것 같다. 사실은 아주 단순하고 뻔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심리상담을 전공하고 학교상담의 현장경험과 교육청에서의 행정경험을 쌓은 나이기에 할 수 있는 이야기, 상담의 본질과 마음자세를 다루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강의의 챕터는 총 4개로, 제목은 "지속가능한 학교상담, 어떻게 할 수 있을까"로 잡고 목차는 "학생의 마음과 함께함, 보호자의 마음 만남, 학교는 마음 모음, 교직원으로서 내 마음 돌봄"으로 교육의 3주체(학생, 학부모, 교직원)+학교와 동사를 하나씩 접목하여 이름지었다. 비록 대안교육기관은 흔히 말하는 학교밖청소년들이 다니지만 대안교육기관도 하나의 학교이기에, '학교상담과 학생상담'이라는 관점에서 나의 경험을 나누고자 했다. 비록 모두가 인정할 만큼 이삼십년의 교직경력을 갖춘 것은 아니더라도 근무하는 내내 누구보다 치열하고 깊이있게 학교상담과 학생상담에 대해 고민해온 사람이기에 강의를 하기 위해 마이크를 잡는 순간만큼은 자기확신과 자신감을 장착하려고 노력했다. 처음 마이크를 들고 앞에서 오십여명의 눈빛을 받으니 떨려서 두손으로 마이크를 쥐고 조심스럽게 시작했는데, 진심이 닿았는지 선생님들의 눈빛과 끄덕임이 돌아오면서부터는 긴장감이 줄어들고 몰입감있게 진행할 수 있었다. 학교에서 근무하면서 대안교육위탁교육기관까지는 숙지하고 학생들을 연계하기도 했지만 비인가 대안학교들까지는 관심을 미처 갖지 못했었는데, 막상 연수에 가서 종사하시는 교직원분들을 실물로 뵙고 나니 또 더 열악하고 막막할 수도 있는 환경에서 열정과 사명감을 갖고 아이들을 만나시는 모든 선생님들께 존경과 감사한 마음이 저절로 들었다.


강의자료 일부



상담이든 강의이든 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내가 하는 말은 상대의 귀뿐만 아니라 나의 귀로도 들려 온다. 그래서 말을 하면서 내 마음에도 다시금 아로새겨지는 것 같다. 가장 도움이 되는 공부가 다른 사람에게 배운 것을 알려주는 것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말이 아니라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했다. 교사로서 학생을 만날 때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도 없고 또 해결해 주어서도 안 된다. 학교상담에는 분명한 한계가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아이의 가까이에 있는 건강하고 안전한 어른으로서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필요한 역할을 맡고 있음은 분명하다. 첫 번째 챕터(학생의 마음과 함께 함)를 간단히 요약해보자면, 상담을 방해하는 두 가지 마음-빨리 괜찮아지길 바라는 마음, 대신 해결해주고 싶은 마음-은 잠시 내려놓고, 아이가 지금 하고 싶은 이야기를,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미루지 않고, 그 순간 함께 해주고 들어주고 기다려 주는 것, 학생의 마음과 함께 하는 것, 그것이 학생상담의 필요충분조건이 아닐까 하는 내용이었다.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이야기는, 소진에 대한 것이다. 돌봄을 주로 제공하는 직업군이라면 더욱 더 소진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나도 그간 소진에 빠져 허우적도 거려보고 자기돌봄에 목말라 여기저기를 기웃거려도 보았기에, 내 마음을 돌볼 수 있는 방법들을 열심히 찾아내고 관리하는 것이 "지속가능한 직장생활"을 위해 참 중요하다는 것을 기록해두고 싶다. 또 하나의 인용구를 들고 왔다.

찰스 디킨스는 한 시간 글을 쓰면 한 시간 산책을 했다고 합니다. 심리치료사에게는 꿈같은 얘기일지 모르지만, 최소한 우리는 가능할 때마다 몸을 움직일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아는 한 심리치료사는 매일 일을 마치고 나서 장작을 패고 또 다른 심리치료사는 매일 승마를 합니다.
많은 심리치료사들은 칼 융이 이른바 ‘상처 입은 치유자 wounded healer’라고 칭한 사람들입니다. 가족 중에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이 있거나 스스로 트라우마를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자아실현을 하지 못해도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스스로가 지나치게 궁핍하다면 다른 사람에게 베풀 게 마땅치 않은 법입니다. 이런저런 조언으로 책 한 권을 채울 도 있겠지만 제 생각은 다음의 세 단어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스스로의 삶을 사세요.” 일에만 몰두하지 말고 다양한 인간관계를 맺고 취미생활을 즐기세요. 당신을 웃게 만들고 당신의 배터리를 재충전해주는 일들을 하세요. 아기를 꽉 껴안거나, 요리수업을 듣거나, 영화감상모임에 가입하세요.
우리는 생각과 말만으로 하루를 다 보내기 때문에 여가 시간은 촉각을 즐기며 보내는 것도 좋습니다. 요가와 명상은 우리를 스스로의 몸과 다시 연결시켜주고 긴장한 근육들을 이완시켜줍니다. 심리치료는 지긋지긋할 정도로 애매모호하기 때문에 우리는 가끔씩 완성작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령, 퀼트 작품이라든지 유화작품이라든지 새로 칠한 오크나무 책상 같은 것들 말입니다. 짐은 일이 끝나면 상담실을 박차고 나가 굉음을 내며 시내에 있는 주 바라는 술집으로 질주합니다. 그 곳에서 짐은 기타를 멘 채 무대를 활보하고 관중을 향해 노래를 부릅니다. 관중 속에는 짐이 바로 그날 상담실에서 만났던 내담자들이 끼어 있기도 하죠. 짐은 주 바를 내담자와 심리치료사가 함께 강하고 빠른 블루스에 맞춰 춤을 추는 곳이라고 애정을 담아 말하곤 합니다.
심리치료사의 일은 봉봉 캔디와 버번위스키를 즐기는 카리브해 크루즈 여행이 아닙니다. 매일매일 자살충동에 시달리는 내담자들을 만나고, 의료행정 공무원들과 언쟁을 하고, 학대받고 방치된 아이들에 대해 걱정을 합니다. 제가 가장 힘들다고 느끼는 일은 부부들이 이혼하기로 결정을 내리는 순간에 함께 있는 일입니다. 그들의 고통이 제게 전이되어 저를 황폐화시킵니다.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좋은 방법들을 찾지 못한다면 좋지 않은 방법에 휘둘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를 달랠 수 있는 대여섯 가지 방법들을 대비해놓기 바랍니다.
-나는 심리치료사입니다(메리 파이퍼 저, 안진희 옮김, 위고) pp.117-118



그렇다. 소진관리를 위해서는 스스로를 달랠 수 있는 대여섯 가지 방법이 필요한 것이다! 요즘 밀고 있는 단어는 '인생 포트폴리오'다. 우리의 인생도 분산 투자를 해야 건강한 것이다. 그래야 하나의 축이 기우뚱하더라도 다른 기둥들로 견뎌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꽤나 전부터(아래 링크 참고) 해왔는데, 그 생각이 '인생 포트폴리오'라는 말로 구체화된 것 같다. 요즘 오은영의 결혼지옥이나 금쪽같은 내 새끼 같은 프로그램을 보다 보면, 정말 아이들은 듣는대로가 아니라 보는 대로 자란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같은 맥락에서 아이들에게 자기를 돌보라고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고 나누어 담으라고 말로 수십번 조언을 해주는 것보다 나부터 어른으로서 스스로를 잘 돌보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백마디의 말보다 더 큰 효과가 있는 것이다. 돌봄을 제공하는 직업군을 가진 사람일수록 더 그러하다. 내가 지치지 않고 업을 지속하기 위해서도 자기돌봄이 필요하지만, 돌봄의 대상자가 자기관리와 자기돌봄을 잘하도록 돕기 위해서도 나부터 나를 잘 돌봐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뇌는 멀티태스킹이 불가능하다. 우리가 멀티태스킹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재빠른 초점의 전환이라고 한다. 인생을 포트폴리오로 꾸려서 분산 투자를 하다보면 하나의 조각에 집중할 때 다른 조각은 잠시 잊을 수 있어서, 육체적으로는 피곤할지 몰라도 초점의 전환이 오히려 마음건강에는 유익하게 작용하기도 하는 것 같다. 그래서 가정을 꾸리고 육아를 하시는 선생님들을 뵐 때 너무나 피곤하고 힘들다고 하시면서도 때때로 더 행복하고 건강하게 교직생활을 하신다는 인상을 받았던 게 아닐까. 어쩔 수 없이 자동적으로 온앤오프가 되고, 이미 분산 투자를 하고 계신 것이기 때문에.

칼과 대화를 하고 난 후 당신에게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일에 대해 말해주고 싶었던 것들이 다시 생각났습니다. 제가 대학원에 다닐 때는 아무도 얘기해주지 않은 것들이죠. 우선, 당신 자신을 돌보는 일은 부분적으로는 당신이 내담자들에게 설파하는 것들을 스스로 실천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인은 담배 냄새를 풍기면서 누군가에게 담배를 끊으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해. 내가 어떻게 하는지는 상관하지 말고”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사람은 좋은 부모도 좋은 심리치료사도 될 수 없습니다.
맑은 정신을 유지하기 바랍니다. 심리치료는 ‘결근’을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한번은 캔자스시티에서 밤새도록 콘서트를 보고 나서 상담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하루 종일 연신 하품을 참으며 카페인과 당을 무기 삼아 졸음의 공격에 맞서 싸웠습니다. 그날 제게 상담을 받은 내담자들은 소중한 돈과 시간을 도둑맞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나는 심리치료사입니다(메리 파이퍼 저, 안진희 옮김, 위고) p. 116

강의자료 일부
강의자료 일부


이번 여름은 장마가 없고 스콜처럼 비가 쏟아지거나 엄청난 무더위이거나 둘 중 하나인 것처럼 느껴졌다. 후끈후끈한 열기 속에서 뭔가 많은 일들이 있었고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은데, 정리할 시간이 없어서 기록이 늦어졌다. 횡설수설 적은 것 같긴 하지만 기록을 남기지 않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의미를 부여해보면서 25년 치열했던 여름을 남겨본다.


*예전에 작성했던 글(2023)

https://brunch.co.kr/@d952d66b6f7745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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