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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지킴이 Nov 28. 2023

3장 코아에서 아코아로. 아버지를 용서하다

아버지를 용서하다


  내가 대학생이 된 후부터 아버지는 나에게 용돈을 타 갔다. 한꺼번에 주면 다 술을 마셔버려서 매일 필요한 만큼만 주곤 했다. 아버지는 담배 살 돈 외에 딱히 다른 용도로 돈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술을 마시겠다고 돈을 달라는 법은 없었다. 그러다 보니 결국 동네 가게에 술값이 외상으로 쌓여갔다. 망원동에 살 때도 집 근처 가게를 지날 때면 아주머니가 “학생”하며 나를 불러세우곤 했다. 역곡의 우리 집은 고가도로 바로 밑에 있는 삼 층 짜리 건물의 꼭대기 층이었다. 일 층에는 그리 크지 않은 마켓이 있었다. 같은 건물에 있다 보니 마켓 주인은 아버지와 우리 남매들의 얼굴을 알았다. 주인은 아버지의 외상이 어느 정도 쌓이면 나에게 외상 장부를 보여주곤 했다. 장부에는 날짜와 무슨 술을 마셨는지, 몇 병을 마셨는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나는 “이따 갖다 드릴게요.” 아니면 “며칠만 기다려 주세요.”라고 말했다. 때로는 내가 먼저 장부를 보여달라고 해서 외상을 갚기도 했다. 

  네 번째 입원 후 삼 년이 되었다. 졸업 후 유학을 준비했던 그해였다. 가을이 되면서 아버지의 폭음이 심상치 않아졌다. 외상이 점점 불어나고 만취해 돌아오는 날이 많아졌다. 유학에 몰두해 있던 터라 나는 아버지 상태에 관심을 가질 여력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느 아주머니가 우리 집을 찾아왔다.

“여기가 허 씨 아저씨 집 맞아요?”

“네, 맞는데요.”

“아니, 사람을 그렇게 패면 어떡해요? 우리 남편이 지금 아파서 집에 누워 있어요. 와서 좀 봐요.”

아주머니는 화가 잔뜩 나 있었다. 주소를 가르쳐주고 빨리 와 보라며 돌아갔다. 

  나는 혼자 찾아갈 용기가 나지 않아 동생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동생이 돌아오자 함께 그 집을 나섰다. 알려준 주소로 찾아가 보니 가난한 살림이 역력히 보였다. 아버지는 어쩌자고 이렇게 힘이 없는 사람을 때렸을까. 

“저, 많이 다치셨어요?”

방 안에 누워 있던 아저씨가 끙하는 소리를 내며 일어나 앉았다. 얼굴이 맞아서 부어올라 있었다. 아저씨는 아무 말도 없이 몸을 옆으로 돌려 앉았다.

“정말 죄송해요. 저희 아버지가 술을 많이 드시면 제정신이 아니세요.”

“그래도 그렇지, 사람을 이렇게 패는 게 어딨나...”

아저씨는 어린 자식들이 와서 그런지 강하게 항의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저 병원에 가 보셔야 하는 것 아니에요? 병원 다녀오시면 저희가 치료비 물어드릴게요.”

“됐어요, 됐어. 와서 사과했으면 된 거예요. 괜찮으니 그만 가 봐요.”

다행히 크게 다친 건 아니었다. 배우자도 아닌 자식들이 와서 그런지 사과만 받고 우리를 돌려보냈다. 아버지가 사람들과 다툰 적은 많아도 다치게 한 적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나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가 점점 더 난폭해지는 건가. 이런 일이 계속 생기면 어떻게 하지. 이제는 어머니 대신 우리가 아버지 뒤치다꺼리를 하게 생겼다 싶어 한숨이 절로 나왔다. 

  또 삼 년의 공식이 맞아떨어졌다. 가을에서 겨울로 갈수록 아버지의 증세가 더 심해졌다. 네 번째로 아버지를 입원시킨 후로 큰아버지에게 뇌졸중이 발병했다. 아버지로 인한 스트레스가 누적되었다가 그때 터져버린 것일까. 큰아버지의 뇌졸중 원인이 아버지 때문이라는 생각에 나는 죄스러웠다. 더 이상 큰아버지는 우리가 의지할 대상이 아니었다. 

  점점 더 난폭해지는 아버지를 두고 볼 수 없어 동생은 아버지를 입원시켜야겠다고 말했다. 이미 대학생이 된 동생은 더 이상 아버지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병원에 전화를 걸더니 병원에서 직접 아버지를 데리고 오라고 했다고 말했다. 나는 우리 손으로 아버지를 입원시킨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가 말을 듣겠어?” 나는 아버지의 거센 저항을 예상하고 입원시키는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강제 입원이 아닌 다음에야 아버지를 입원시킬 방법이 없을 것이라고. 그런데 동생이 아버지에게 입원해야 한다고 말하자 신기하게도 아버지는 순순히 동생의 말을 따랐다. 이제 장성한 아들에게 저항해도 소용없다고 느꼈는지도 모른다. 나는 서둘러 아버지의 짐을 챙기고 동생 손에 들려주었다. 

  “다녀오마.” 묵묵히 집을 나서는 아버지, 아버지 손을 붙잡고 입원시키러 가는 동생. 그 모습이 기가 막혔다. 나는 겁이 나서 그 길에 동행할 수 없었다. 아버지와 동생이 떠난 후 텅 빈 방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펑펑 울었다. 드디어 우리가 아버지를 입원시키는 날도 오는구나. 입원시키러 가는 동생의 마음은 어떨까.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제발 이런 일이 다시는 없기를. 지금이야 정신병동에 가족을 입원시키는 게 큰 흠이 되지 않지만, 그 당시로서는 도저히 자식이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나는 그 일이 비극이라고 생각했고, 동생에게 한없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혹시 가다가 뭐가 잘못되거나 아버지 마음이 바뀌어 돌아오면 어쩌나 했다. 동생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한밤중이 되어 동생이 돌아왔다. 다행히 아버지가 순순히 병실로 들어가더라고 했다. 차마 수고했다, 고맙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우리는 또 한 번의 고비를 넘긴 것에 안도하며, 또 앞으로 얼마나 이런 일을 더 겪어야 할지 진저리를 쳤다. 나는 다음날 아무 곳에도 가지 않았다. 회심이 일어났던 날과 아버지를 입원시켰던 날. 그날은 내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두 번째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미국 유학의 좌절은 내게 뭐든지 새로 시작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줬다. 다시 학력고사를 준비해 서울대에 가자니 수학 공부를 다시 할 자신이 없었다. 홍대 졸업장을 가지고 사회에 나가기는 싫었다. 아직 공부에 대한 목마름이 내 안에 있었다. 대학 졸업장을 바꾸고 싶었다. 나는 편입이라는 길을 알게 되었다. 나 혼자서도 편입을 준비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고려대학교 노어노문학과를 목표로 정했다.    내가 노어노문학과를 택한 데는 대학 시절 접했던 도스토옙스키 영향이 컸다. 헤르만 헤세와 앙드레 지드, D. H. 로렌스, 제임스 조이스, 빅토르 위고 등이 내가 좋아하는 작가였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를 읽고 나서는 그 작가들이 그의 등 뒤로 물러났다. 인간의 심리를 도스토옙스키처럼 치밀하고 깊게 파고드는 작가는 없었다. 무엇보다 그가 창조한 인물들에 나는 매료되었다. 라스콜리니코프, 소냐, 알료샤, 이반, 조시마 같은 인물들을 다른 소설에서는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들의 말에서 나는 내 생각이 언어화된 것을 발견했다. 특히 그 인물들이 표현하는 사상의 대담성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학이 이런 것까지도 표현할 수 있구나. 도스토옙스키는 문학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작가였다. 나는 일단 러시아어를 배워서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원어로 읽어보고 싶었다. 러시아어로 읽는 그의 작품은 어떤 느낌을 줄까. 생각만 해도 흥분되는 일이었다. 

  작가가 되고 싶다는 나의 꿈은 어떻게 되었을까. 대학생이 되었을 때 나는 작가의 꿈을 접었다. 작가가 되기에는 나의 재능이 너무나 부족하다는 뼈저린 자각이 왔다. 내가 아는 탁월한 작가들은 이미 이십 대에 작가로서 재능을 드러내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다. 나는 그들에 비해 언어적 표현능력이나 창의성, 삶과 세상을 보는 눈이 턱없이 부족했다. 작가가 되는 꿈은 먼 미래로 밀려났다. 대신 문학 공부로 방향을 틀었다. 문학 연구를 통해 직접 작품을 쓰는 데 도움을 받을 수도 있을지도 몰랐다. 문학 연구가는 작가 대신 대안으로 선택한 길이었다. 훌륭한 연구자가 될 수 있다면, 그 또한 가치 있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나는 아직 읽어보고 싶은 문학 작품이 너무나 많았다. 

  홍대 근처에 있는 러시아어 학원에 등록하고 알파벳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분명히 영어에 있는 알파벳인데 러시아어에서는 발음이 달랐다. 예를 들어, C를 러시아어에서는 ‘에스’라고 읽었고, P를 ‘르’로, H은 ‘느’로 발음했다. 간신히 알파벳을 넘어서니 격변화라는 게 나왔는데, 이 지점이 마의 고지였다. 러시아어를 괜히 시작했나 하는 후회가 살짝 밀려왔지만, 매일 복습에 복습을 거듭해 그 고지를 점령했다. 점점 러시아어를 배우는 게 재미있어졌다. 

  그해 겨울 편입 시험에 합격했다. 26세에 나는 다시 대학생이 되었다. 고려대학교의 고풍스러운 석조 건물들은 마치 유럽으로 유학을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고대생이 된 나는 그 자랑스러움에 호랑이 마크가 찍힌 파일을 일부러 들고 다녔다. 그런데 그런 자부심도 잠시였다. 나보다 네 살에서 여섯 살 어린 학생들과 같이 수업을 듣자니 점점 내가 낯선 이방인 같은 소외감이 들기 시작했다. 학생들 사이에 낄 수가 없어 ‘이 나이에 내가 뭐 하는 거지’ 싶었다. 쓸쓸했다. 다행히 과에는 나처럼 편입한 언니가 있었다. 그 언니와 어울리다 보니 어린 학생들과도 조금씩 사이가 가까워졌다.


  내가 편입하면서 우리는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낙성대에서 일 년을 살다가 신림동으로 옮겼다. 망원동에서 십 년을 살았는데, 신림동에서도 거의 십 년의 세월을 보냈다. 달동네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신림동 집은 버스에서 내려 계속 오르막길을 올라가야 했다. 반지하는 아니었지만, 길보다는 조금 낮은 지대에 집들을 지어 놓았다. 여름에 폭우가 쏟아지면 좁은 거실로 빗물이 들어찼다. 

  막내 남동생이 뒤늦게 성악 공부를 시작해서 삼수까지 하더니 서울대에 들어갔다. 기적이었다. 집에서는 동생이 성악을 할 정도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아무도 몰랐다. 동생의 선배가 재능을 발견해 주었고 동생은 성악과에 들어가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재수할 때까지는 레슨비를 대 주었는데, 삼수할 때는 더 이상 지원해 줄 수가 없었다. 다행히 성악의 길로 인도한 그 선배가 무료로 레슨을 계속해 주었다. 그렇게 동생은 인생의 은인을 만나 결국 생각지도 못한 서울대에 가게 되었다. 

  서울대 성악 실기시험이 있는 날 시험실에서 나오는 동생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망했어, 누나.” 그 말을 듣고 나는 기대를 접었다. 애초에 서울대는 너무 무리였지. 도전해 본 것만도 대단한 거지. 그런데 이상하게도 교회에서 금요일 철야기도 때마다 형제님들이 동생을 위해 꾸준히 기도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 생겼다. 

  합격자 발표가 있는 날은 주일이었다. 동생 혼자 발표를 보러 가고 나는 예배에 참석하고 있었다. 예배 시간 내내 자꾸 문 쪽을 흘깃거렸다. 동생이 들어올 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갑자기 예배당 뒤쪽에서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물결처럼 그 소리가 내가 있는 곳까지 퍼져왔다. “허 철 형제가 붙었대.” 분명 그 소리를 들었다. 나는 눈을 들어 뒤쪽을 쳐다보았다. 동생이 들어와 있었다. 동생 옆에서 사람들이 동생의 어깨를 두드리는 모습이 보였다. ‘진짜구나.’ 믿을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예배가 끝나자 동생이 내게 다가왔다. 

“누나, 나 붙었어.”

“진짜? 네 눈으로 본 거야?”

“응, 직접 합격자 이름 봤어.”

“아...”

나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동생의 학교생활이나 학업에 신경을 써 준 적이 없었다. 그저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 좋아하는 동생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이 년 만에 이런 놀라운 일을 이뤄내다니. 나는 서울대에 못 간 나를 두 동생이 위로했다고 해석했다. 나 대신 막내가 갔구나. 장하고 자랑스러웠다. 두 동생은 신림동에서 서울대를 다니고 입대도 함께 했다. 

  이제 오십 대 후반이 된 아버지는 자식들 자랑이 입에 붙었다. 사람들만 보면 “우리 아들들이 서울대 다니는데...”로 시작해 자랑이 끝이 없었다. 사람들은 “어이구, 자식들 잘 키우셨네요.”라며 부러워했다. 아버지는 점점 염치라는 것을 잃어갔다. 길에서 아무나 보고 담배를 얻어 피웠고 동전을 달라고 했다. 아버지는 이제 집에서 누워 있기보다 아침이 되면 밖으로 나갔다. 학교에 가려고 언덕길을 내려가다 보면 저만치 아버지가 서 있었다. 나는 아버지와 마주치는 게 창피해서 아버지가 사라지길 기다렸다. 밉지는 않지만 그래도 여전히 부끄러운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도로에서 가까운 시계방에 출근하듯이 매일 들렀다. 거기서 바둑을 두고 시간을 보내다가 저녁에 집에 들어오곤 했다. 혼자 지내지 않고 어디라도 가서 시간을 보낼 곳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나는 시계방 옆을 지날 때면 아버지 눈에 띄지 않으려고 멀리 돌아갔다. 수치심. 그때는 내 안에 수치심이 깊게 자리하고 있는지 몰랐다. 그게 코아의 큰 특징인 줄 아직은 자각하지 못할 때였다.

  아버지의 폭음이 재발할 때가 되었다. 그런데 약을 꾸준히 먹어서인지 전처럼 심하게 술을 마시지 않았다. 가끔 술을 먹어도 푹 쓰러져 자곤 했다. 그 정도만 돼도 괜찮았다. 나는 아버지가 염치가 없어지고 말이 통하지 않는 게 약 부작용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임의로 아버지 약을 끊게 했다. 참 무지한 짓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약 끊은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시 고주망태가 되어 돌아오기 시작했다. 약 끊게 한 것을 후회했지만 다시 약을 먹게 할 수는 없었다. 스스로 자책하고 가슴을 쳤다.

  아버지는 술에 취하면 나를 붙들고 하소연했다. “내가 네 엄마를 얼마나 사랑했는데...내가 너희들을 얼마나 사랑하는데...” 그 소리가 듣기 싫었다. 그런 게 사랑이야? 사랑하지 않아도 좋으니 괴롭히지만 말지. 엄마를 그렇게 괴롭혀 놓고 이제 그런 말을 하면 나보고 어쩌라고.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아버지의 호소도 내 차가운 마음을 녹이지 못했다. 아버지의 호소가 계속될수록 내 마음은 더 냉담해졌다. 

  이제 내 나이가 곧 삼십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아버지가 무서웠다. 그런 내가 한심했다. 술에 취해 분노에 찬 아버지는 집에 들어오면 칼부터 찾았다. 취한 아버지 목소리가 들리면 나는 부리나케 칼부터 숨겼다. 그러던 어느 날 동생이 집에 있을 때 아버지가 들어와 칼을 찾아냈다. 아버지는 칼을 들고 우리를 위협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버지를 살살 달래서 칼을 내려놓게 하곤 했다. 그날은 동생이 무섭게 아버지에게 대들었다. 아버지는 동생에게 욕을 해댔다. 그런데 놀랍게도 동생이 아버지 손목을 붙잡더니 칼을 빼앗는 게 아닌가. 이제 칼은 동생의 손에 들려 있었다. 나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부엌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서 동생 얼굴을 바라보며 무언의 호소를 했다. 이러다가 우리 집에서 뉴스에 나는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닐까. 공포가 엄습했다. 아버지는 동생에게 칼을 빼앗기자 당황하는 눈치였다. 동생은 칼을 제 자리에 돌려놓으며 “다시는 이러지 마세요!”라고 말했다. 그때 이후로 아버지는 칼을 찾지 않았다. 다 큰 동생들에게 아버지는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나만 아버지를 무서워하고 있었다.

  이 문제를 극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밤마다 오르막길을 올라가면서 기도했다. “제발 이제 그만요. 이번이 마지막이게 해주세요. 저 더는 싫어요. 이제 못하겠어요. 여기서 끝내주세요.” 아버지가 다시 입원하는 상황도 싫었다. 이제는 아버지를 무서워하는 것을 끝내겠다고 결심하고 빌고 또 빌었다. 신기하게도 아버지의 증상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엑셀레이터가 멈춘 것 같았다. 나는 아버지를 개인 병원에 데리고 가서 다시 약을 처방받았다. 다시는 약을 끊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멍청이가 되고 말이 통하지 않아도 술을 마시는 것보다는 나았다. 아버지를 더 이상 무서워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아버지를 용서했다. 예수님을 믿고 나서 8년 동안 여러 번 용서를 시도했다. 용서한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 보면 아직 분노와 원망이 남아있었다. 또 용서했다. 그러기를 수십 번 반복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아버지가 내 아버지이기를 넘어서 한 사람의 인간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이유는 모르지만 큰 상처를 받아 아프게 된 사람. 왜 아픈지도 몰라서 자기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사람. 도움이 필요한데 도움을 받지 못하는 사람. 아버지도 가해자이기 전에 피해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이후로 나는 아버지를 인간으로 대하기 시작했다. 비록 폐인이지만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인간. 인생을 제대로 살지 못했다고 내게 비웃음을 당해도 좋은 건 아니었다. 나도 그럴 자격이 없었다. 그렇게 아버지를 인간으로 받아들이고 나서 비로소 아버지를 용서하게 되었다. 그 후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도 함께 사라졌다. 이제는 오로지 연민과 동정으로만 아버지를 바라보게 됐다. 

  코아가 중독자인 부모를 용서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코아들은 부모를 용서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다. 용서해야 하는 줄은 알지만 어떻게 용서해야 할지를 모른다. 무수히 용서를 시도해도 여전히 부모를 증오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 절망감에 휩싸이기도 한다. 코아에게 용서는 처절한 싸움이다. 그러나 나는 용서가 가능함을 경험으로 확인했다. 신앙과 아버지에 대한 인간적인 연민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날아가자 

    

  석사논문을 쓸 작품으로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형제들』을 선택했다. 대학생 때 진리가 있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게 해주었던 그 작품. 그때는 작품이 무엇을 말하는지 몰랐다. 러시아 문학을 전공하면서 작품의 메시지가 조금씩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도스토옙스키가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기독교 소설가라는 점을 발견했다. 이 작품 안에는 세상이 기독교에 던질 수 있는 가장 어려운 질문들이 두려움 없이 다뤄지고 있었다. 신이 존재한다면 이 세상에서 신의 정의는 왜 행해지지 않는가. 죄 없는 아이들이 고통당하고 죽어가는 악한 현실에 기독교는 무엇이라고 답할 수 있는가. 인간에게 자유가 주어진 게 과연 좋은 일인가. 자유와 행복, 무엇이 더 인간을 위한 것인가. 인간은 정말 자유로운 존재일까.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라는 것은 사실 뇌의 작용에 불과한 것 아닌가. 도스토옙스키는 이 어마어마한 주제들을 인물들의 대화 속에서 멋들어지게 녹여냈다. 어린아이들의 고통에 대한 생생한 묘사를 읽을 때마다 가슴이 오그라들고 괴로워서 책상에 고개를 파묻었다. ‘대심문관 전설’은 읽을 때마다 머리에 쥐가 났다. 나의 뇌가 집중할 수 있는 한계를 시험받는 느낌이 들었다.

  작품을 더 완전히 이해하고 싶어서 논문을 쓰기로 했는데, 워낙 분량이 방대했다. 내가 목표했던 대로 러시아어로 작품을 읽는 데만도 몇 달이 걸렸다. 자료를 찾아 읽다 보니 한 학기가 지나버렸다. 같은 학기에 대학원에 들어온 후배들은 벌써 논문을 다 쓰고 논문심사를 받았다. 작품 분량으로 인해 어쩔 수 없었는데도 나는 뒤처졌다는 열등감에 시달렸다. 나의 고질적인 비교 의식, 경쟁심이 고개를 들어 뱀처럼 내 심장을 갉아 먹었다. 삼일 정도 집 밖에 나가지 않았다. 씻지도 않고 제대로 먹지도 않고 누워만 있었다. 거울 속에 비친 내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실의에 빠진 패배자의 모습이었다. 깊은 상처를 입은 자존심은 나를 밑으로, 밑으로 끌어 내렸다.

  새해가 되어 정신을 수습하고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하루 한 장. 꼬박꼬박 논문이 채워지면서 마음이 안정되어갔다. 그 사이 석사과정을 마친 동료들은 하나둘씩 유학길에 나서던지 국내에서 박사 과정에 진학했다. 논문을 쓰면서 나도 앞으로의 인생 진로를 결정해야 했다. 아직도 학업에 목이 말랐다. 이제 러시아어로 작품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연구라는 것을 할 수 있는 초보적인 기술을 익혔을 뿐이었다. 도스토옙스키를 더 깊이 연구하고 싶었다. 논문을 쓰면서 도스토옙스키를 제대로 알려면 러시아로 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러시아 정교 신자였던 도스토옙스키는 정교 사상을 작품에 많이 반영했는데, 개신교인인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너무 많았다. 러시아로 가서 직접 보고 듣고 배워서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야겠다는 마음이 커졌다.

  당시 러시아는 소련 해체 직후라 학비나 생활비가 매우 쌌다. 주로 모스크바 아니면 제정 러시아의 수도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유학생들이 선호하는 도시였다. 유학 간 선배들을 통해 알아보니 모스크바의 학비가 상트페테르부르크보다 비쌌다.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유학지를 정했다. 그런데 유학 경비는 어떻게 마련하지? 어머니가 옛날에 사두신 시골 논이 생각났다. 그 논을 팔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논을 관리하시던 오촌 아저씨에게 논을 처분해 달라고 부탁했다. 논이 팔려서 유학자금을 할 정도의 돈이 마련되었다. 그중 일부는 곧 결혼하기로 되어 있는 큰 남동생이 결혼자금으로 쓰기로 했다. 아직 대학생인 막내에게는 돌아갈 몫이 없었다. 나중에 귀국하면 공평하게 삼분의 일 금액이 되도록 내가 갚겠다고 말했다. 외삼촌께서 나를 부르시더니 유학자금에 보태라고 선뜻 이백만 원을 주셨다.

  당시 나는 가족 때문에 나 자신을 많이 희생해왔다고 생각했다. 언제나 가족을 벗어나 날개를 달고 날아갈 수 있을까를 꿈꿨다. 유학을 떠나는 건 이제 동생들에게 아버지를 떠넘기고 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나는 그동안 할 만큼 했으니 이제 동생들이 몇 년만 그 짐을 맡아도 될 거라고 스스로 설득했다. 동생들은 내가 떠나는 것이 부담스러운 것 같았다. 그러나 차마 반대하지 못했다. 나는 딱 삼 년만 열심히 해서 빨리 돌아오겠다고 말했다. 삼 년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라고 여겼다. 

   러시아로 떠나는 날, 나를 배웅하러 교회 형제와 자매들이 공항에 많이 나왔다. 아버지는 집에서 작별하고 두 동생만 나를 배웅했다. 아버지는 내가 유학 가는 것이 큰 성공을 하는 것인 양 기분 좋아했다. 막상 공항에서 곧 러시아로 떠날 시간이 다가오자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비 오듯 쏟아졌다. 두고 가는 가족, 가족 같은 형제, 자매들과의 이별. 태어나서 처음으로 혼자 먼 타국으로 떠나, 삼 년이나 되는 시간 동안 이들과 헤어져 있어야 한다는 게 실감 났다. 눈이 퉁퉁 부은 얼굴로 탑승구로 향했다. “잘 갔다 와, 누나.” 곧 결혼할 큰동생이 이 말을 남기고 뒤돌아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에스켈러이터를 내려가는 동생의 어깨가 천근만근 무거워 보였다. 며칠 전 동생은 “누나, 걱정하지 마. 아버지 잘 보살필게.”라고 말했다. 그러나 공항에서 본 동생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하나도 없고 착잡한 표정만이 뒤얽혀 있었다. 

  비행기 안에서도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홀가분함과 미래에 대한 기대, 설렘보다는 슬픔과 미안함, 그리고 이미 시작된 그리움이 내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렇게 파란만장했던 나의 이십 대는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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