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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지킴이 Apr 10. 2023

나는 코아였다. 1장 괴물 아버지

1화 결혼

 결혼     


  내가 기억하는 외에 나는 아버지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 아버지의 유일한 혈육이었던 큰아버지는 워낙 과묵한 분이어서 그런지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해 주신 적이 없었다. 아버지 역시 본인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하시지 않는 편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의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 청년 시절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내가 들은 것은 아버지가 황해도 수안에서 출생하셨다는 것과 6·25가 발발하자 1·4후퇴 때 형 두 분과 누나 한 분을 남겨놓고 부모님과 큰아버지, 그리고 남동생과 함께 남한으로 내려오셨다는 것이 전부였다. 남동생은 피난 당시 죽었다고 했다. 아버지 가족은 공주 정안에 정착해 사셨다. 그래서 나의 본적은 공주 정안이다. 정안은 밤으로 유명한 곳인데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그곳이 어디인지 늘 궁금했다. 신기하게도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는 정안에서 가까운 세종시에 살고 있다.

  사범대학을 졸업한 아버지는 평택의 작은 시골 마을 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내 고향이기도 한 그 마을에서 여덟 살 어린 어머니를 중매로 만났다. 아버지는 그 당시로서는 키가 훤칠하게 크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남이었다. 특히 검고 균형 잡힌 눈썹과 풍성한 머리숱은 우리 삼 남매에게도 유전되어 우리 남매들은 중년이 된 지금도 머리숱이 많아 부러움을 산다. 아버지는 성품이 조용하고 얌전한 분이었다고 한다.     60년대 중반이었던 그 시절 시골에서 잘생긴 총각 교사는 훌륭한 신랑감으로 꼽혔을 것이다. 여기저기서 중매가 들어왔는데 아버지는 어머니를 선택했다. 그 이유가 재미있었다. 어머니의 학력은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였는데 집안이 너무 가난해서 중학교 진학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어머니가 어찌나 총명했던지 초등학교 내내 일등을 놓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그 점이 마음에 들어 어머니와 결혼하기로 결심했다. 자라면서 나는 어머니의 머리를 물려받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내 지능이 좋은 것은 아버지보다는 어머니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버지도 그 점은 인정했다. 나와 남동생들의 머리가 좋은 걸 보면 아버지는 미리 자식들의 지능을 생각해서 어머니를 결혼 상대자로 고른 게 아닌가 싶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어서 결혼을 결심했을까? 어머니에게 한번 물었을 법도 한데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버려서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어머니의 결혼이 어머니 일생 최대의 실수였다고 늘 생각했다. 어머니가 아버지와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불행한 삶을 살지 않았을 것이고, 나도 불운한 어린 시절을 보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내가 태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그거야 사람이 알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기를 바랐던 적도 많았으니 부모님의 결혼은 지금 생각해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면 좋았을 일이다.

      

할머니 묘

     

  아버지는 그 시골 학교 선생님에게서 술을 배웠다고 했다. 매일 수업이 끝나면 그 선생님이 술을 마셨는데 아버지를 데리고 갔다는 것이다. 그 선생님과 술을 먹다 보니 자꾸 술이 늘어 결국 아버지도 술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알지도 못하는 그 선생님이 몹시도 원망스러웠다. 아버지 말이 사실인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그 말이 진짜라면 그 선생님은 아버지 인생에 얼마나 엄청난 짓을 저질렀단 말인가. 그가 가르쳤던 술이 한 사람의 인생과 그의 가족을 무참히 짓밟아버리리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결혼하자마자 친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한다. 나중에 할아버지에게 하는 모습을 보아서는 아버지가 효자였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어머니를 잃은 슬픔은 누구에게나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큰 법이다. 아버지는 마을 뒷산에 할머니가 묻힌 묘를 찾아가 밤마다 울었다고 했다. 일 년 이상 그렇게 했다고 하니 아버지의 슬픔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버지는 술을 먹으면 그 이야기를 자주 했는데,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어린 나는 소름이 끼치곤 했다. 보통 시골 뒷산에는 묘가 많았다. 어두운 밤에 할머니 묘 앞에서 통곡하는 아버지 모습이 그려졌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꼭 술을 마셨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결국 술을 끊을 수 없는 지경까지 가고 말았다.

  사람들은 얌전하던 아버지가 술을 마시면 사람이 달라졌다고 했다. 사람이 포악해지고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고래고래 고함을 쳤다고 한다. 작은 시골 마을이었으니 아버지가 변해가는 것을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알게 되었다. 술 때문에 허 선생이 달라졌다고 혀를 끌끌 차며 안타까워했으리라. 하긴 그 당시 시골에서 술을 많이 마시던 사람이 어디 아버지 한 명뿐이었겠는가. 다만 조용하고 점잖았던 아버지가 술만 마시면 사람이 달라지니 그것이 안타까웠을 것이다.


사택에서 태어나다     


  결혼한 후 부모님은 아버지가 근무하던 학교의 사택에서 살았다. 그곳이 내가 태어난 집이었다. 어렴풋이 기억난다. 학교 뒤쪽으로 조금 길을 올라가면 바로 사택이 보였다. 방 둘과 작은 부엌이 딸린 소박한 집이었다. 아마도 초가로 지붕을 엮고 벽은 흙으로 바른 전형적인 시골집이었던 것 같다. 그곳에서 나와 두 동생이 태어났다.

  집에서 가까운 곳에 우물이 있었다. 집에서 쓰는 용도였는지, 학교에서 쓰는 용도였는지 모르겠다. 지금도 또렷이 기억나는 것은 그 우물이 까마득히 깊었다는 것이다. 두레박을 내려뜨리면 몇 초가 지나서야 물에 첨벙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린 내가 내려다본 우물 속은 검고 깊었다. 저 밑에 물이 찰랑거리고 있었다. 우물 바닥을 내려다보면 어느새 등골이 오싹하며 무서운 느낌이 들었다. 나는 도르래를 이용해 직접 두레박을 퍼 올리기도 했었다. 두레박에 담겨 철렁대는 물맛은 기가 막혔다. 여름이면 그 물로 목을 축이곤 했다. 밤이 되면 우물 곁에 가지 않았다. 그런 사건이 일어난 적이 없었지만 조심하지 않았다가는 그 우물에 빠져 영영 나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이 저절로 생겼다.

  그 집과 관련해 기억나는 것은 우물과 토끼들이다. 어머니가 앞마당에 토끼장을 만들고 토끼를 키우셨나 보다. 하얀 토끼가 몇 마리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와 남동생은 자주 토끼장에 가서 토끼들을 살펴보았다. 그러다 어느 날 손가락 크기 정도 되는 작은 토끼 새끼들이 어미 토끼 젖을 물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토끼가 새끼를 낳았어!”

“아, 귀여워.”

생명의 신비를 처음 느껴본 순간이었다. 눈을 뜨지 못하던 토끼 새끼들은 며칠이 지나자 제법 꼬물꼬물 움직이며 토끼장을 돌아다녔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엽고 사랑스러웠는지 동생과 나는 직접 토끼풀을 뜯으러 다니며 토끼들에게 먹이를 먹여 주었다. 동생이 타던 네 발 자전거 뒤에 토끼풀을 싣고 오던 모습이 사진처럼 내 기억 속에 박혀있다.      


댓돌에서 맞는 엄마     


  그것이 내가 정말 본 것인지, 꿈이었는지 지금까지도 알 수가 없다. 나는 학교에서 올라오는 길목에 서 있었다. 더 이상 앞으로 갈 수가 없었다. 집 앞 댓돌 위에서 술에 취한 아버지가 길길이 뛰며 화를 내고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맞았는지 어머니가 댓돌 위에 쓰러져 있었다. 아버지가 무슨 소리를 했는지, 어머니가 어떤 행동을 했는지 아무것도 모른다. 그 장면만이 또렷이 내 머릿속에 남아있다. 내가 처음 목격한 아버지의 폭행 장면이었다. 그 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역시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다섯 살이나 여섯 살쯤 되었던 것 같다. 지금도 선명한 것은 공포라는 감정뿐이다. 내 가슴은 그때 얼어붙었다. 지금 아버지 눈에 뜨이면 안 될 것 같았다. 왜 아버지는 어머니를 때리는 것일까. 어머니는 왜 저렇게 맞고 누워만 있을까. 가서 어머니를 도와주고 싶었다. 그러나 화난 아버지 모습이 너무 무서워서 나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또 하나의 사진 같은 장면이다. 이때부터 나는 아버지가 술을 마시면 괴물같이 변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의 퇴근길     


  초등학생이 될 때까지의 기억 속에 아버지가 술을 먹고 행패를 부리던 장면은 그 이후로 별로 남아있지 않다. 너무 고통스러워 기억에서 지워진 것인지, 그 당시는 아버지가 술을 덜 마셨던 것인지 모르겠다. 초등학교 때부터의 일은 대부분 떠오른다.

  우리 가족은 아버지가 전근을 가게 되어 고향 마을을 떠나 평택의 다른 마을로 이사를 했다. 70년대 중반이었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이면 늘 내가 하던 일이 있었다. 우리 집 마당에는 장독대가 있었다. 어머니가 담그신 된장, 고추장, 간장 독들이 놓여있던 그 장독대로 올라가면 담장 너머 길이 보였다.

  나는 장독대로 올라가서 버스가 서는 큰길에서 우리 집까지 오는 길을 쳐다보았다. 그 길을 통해 아버지가 귀가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걸음걸이를 보고 오늘은 술을 마셨는지, 마시지 않았는지, 어느 정도 취했는지 구분할 수 있었다. 일주일에 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오지 않는 날은 손으로 한 두 번 꼽을 정도였다. 그런 날 아버지의 걸음걸이는 정신상태와 마찬가지로 안정되고 발랐다. 게다가 아버지 손에는 우리에게 사다 주는 과자 봉지 같은 게 들려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는 날이면 나는 장독대를 내려와 아버지를 맞으러 밖으로 뛰어나갔다. 벌겋게 변하지 않은 아버지의 얼굴을 보는 것이 그리 좋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 손을 잡고 깡충깡충 뛰면서 집까지 함께 오곤 했다. 우리가 무슨 대화를 나누었을까. 술을 먹지 않으면 말수가 없던 아버지는 그냥 빙그레 웃기만 했을 것이다. 때로는 나를 어깨 위에 태우기도 했다. 무서움이 많던 나는 내려달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나 그런 날은 많지 않았다. 아버지의 걸음이 갈지자로 휘청거리는 걸 볼 때면 내 가슴은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오늘 저녁은 또 끔찍한 시간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 시간이 언제 지나고 내일이 올까, 오늘 밤은 무사히 넘어갈 수 있을까. 가슴에 무거운 먹구름이 몰려드는 것 같았다.

  많이 취하지 않은 날에는 그나마 괜찮았다. 아버지는 기분이 좋아서 평소에 하지 않던 이야기를 했고, 어머니와 우리는 아버지의 비위를 맞춰주면서 그날이 무사히 지나가기를 빌었다. 그런 날들만 이어졌으면 얼마나 좋았으랴. 아버지가 만취가 되어 돌아오는 날은 초저녁부터 집안이 아버지 고함으로 가득 찼다. 무엇 때문인지 아버지는 항상 화가 나 있었다.

“다 죽여버릴 거야!”

어머니는 아버지를 살살 달래 양복을 벗기고 준비해 둔 따뜻한 물로 방에서 아버지 발을 씻겼다. 나는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아버지는 그런 대접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비위를 맞추는 어머니가 대단하고 고마웠고 술 냄새를 풍기며 왕처럼 발을 쑥 내미는 아버지가 미웠다. 발을 씻다가 대야를 뒤집어엎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모든 것은 아버지 기분에 달려 있었다. 부디 발 씻는 의식이 무사히 끝나고 저녁 식사도 할 수 있게 되길 빌었다.

  저녁 식사가 끝나면 본격적으로 고문이 시작되었다.

“이리 와서 앉아!”

아버지는 우리 삼 남매를 호출했다. 우리는 자동으로 무릎을 꿇었고 그 자세로 두세 시간을 앉아 있었다. 아버지의 길고 긴 술주정이 시작되었다. 어린 우리는 알아듣지도 못할 말들이었는데, 한두 해 나이가 들어가며 그것이 세상과 정부에 대한 욕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 나쁘은 놈들!”

아버지에게 정치하는 사람들은 다 도둑놈이고 나쁜 놈들이었다. 그때는 아버지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몰랐다. 특히 아버지는 박정희 대통령 욕을 많이 해댔다. 박정희 대통령이 아버지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아버지는 술에 취하면 대통령에게 분노를 쏟아냈다. 아버지는 이 세상이 얼마나 썩어 빠졌는지, 세상이 얼마나 미치게 돌아가고 있는지 그런 말을 했다. 그러면서 “다 죽여 버려야 돼!”할 때는 정말 아버지가 무슨 짓이라도 저지를 것 같아 마음이 사시나무같이 떨렸다.

  때로는 정말로 아버지가 칼을 들고 밖으로 나갈 때도 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 뒤를 따라 뛰어나가고 뒤에 남은 우리 삼 남매는 아버지, 어머니가 돌아올 때까지 마냥 기다리며 가슴이 콩알이 되어 버렸다. 정말로 아버지가 누구를 죽이고 오면 어떡하지? 하는 공포에 현실 감각을 다 잃어버리곤 했다.

  집 밖에서는 “박정희를 타도하자!”하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어둠을 뚫고 들려왔다. 동네는 고요했다. 아무도 아버지의 술주정에 응하는 사람이 없었다. 누구도 밖으로 나와보지 않았다. 도와주러 오는 사람도, 말리는 사람도 없었다. “또 허 선생 술 취했군” 하는 것 같았다. 세상이 야속했다. 누군가라도 와서 우리를 도와주었으면 싶었다. 그러면 덜 무서울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밤에 우리 집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금이라면 경찰에 신고라도 할 텐데 그 당시 그런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다행히 아버지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칼로 누군가를 찌른 적도 없었다. 다 허세였다. 그러나 어린 내가 어찌 알았으랴. 아버지가 여린 마음의 소유자고 그렇게 약한 사람들이 술의 힘을 빌려 평소에 하지 못했던 말을 겁 없이 한다는 것을 말이다. 나중에 커서 그 사실을 알고 난 후 나는 아버지를 우습게 여기고 경멸하기까지 했다. 무슨 대단한 민주투사나 된 듯 으스대더니 가족들만 못살게 군 못난 아버지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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