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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지킴이 Apr 10. 2023

나는 코아였다. 1장 괴물 아버지

4화 각서

각서  

   

  밤에 아무리 술을 많이 마셨어도 아버지는 다음날 결근하는 법이 없었다. 어린 내 눈에 그런 아버지가 신기하게 보였다. 속도 쓰리고 머리도 아플 텐데, 잠도 제대로 못 자서 피곤할 텐데 아직 벌건 얼굴을 하고 제대로 양복을 갖춰 입고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출근하는 아버지. 어머니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난밤 일은 전혀 입에 올리지 않고 아버지에게 바로 지어낸 아침상을 내오고 옷을 내주며 잘 다녀오라고 배웅하는 어머니도 신기했다. 우리에게도 잠은 잘 잤느냐, 어제 무섭지 않았냐 아무런 말씀이 없었다. 우리는 어머니가 차려주는 아침밥을 먹고 역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학교를 향해 집을 나섰다.

  아버지가 유독 집에 늦게 들어오는 날이면 어머니는 더 바짝 긴장했다. 우리는 아버지가 없는 시간을 마치 형 집행 날짜를 받아놓은 사람처럼 속으로는 불안에 떨면서도 최대한 즐기려는 듯 놀기에 여념이 없었다. 아버지가 늦게 들어오는 날은 고통의 시간이 그만큼 짧아져서 좋은 점도 있었지만, 술에 취한 정도가 훨씬 심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의 강도도 더해갔다.

  아버지는 집에서만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알콜 중독자는 가정과 사회생활 모두에서 정상적인 기능을 행하지 못한다. 아버지가 학교에서 어떤 선생님이었는지 모르지만, 술이 다 깨지 않은 상태로 출근해서 과연 제대로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었을까. 지금이라면 학부모들의 항의가 빗발쳤을 텐데 그 당시 우리 사회는 교사에게 관대했다.

  때로 밤늦게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 당시 우리 집에는 전화기가 없었고 동네에 전화기가 있을 법한 집이 없었는데 어떻게 연락을 받은 건지 모르겠다. 아마 동네 이장님을 통해 연락이 온 것 같았다. 어머니는 부리나케 옷을 챙겨입고 우리를 남겨두고 집을 나섰다.

  “세수하고 먼저 자고 있어라.”

우리는 아버지가 오기 전 잠이 들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잠이 들어도 발길로 걷어차며 우리를 깨울 때도 많았지만 때로는 그냥 자도록 내버려 둘 때도 있었기 때문이다. 잠이 들었다가 깨어나 졸음이 쏟아지는데 아버지의 술주정을 듣는 건 고역 중 고역이었다.

  자정이 훌쩍 넘어 어머니가 아버지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면 나는 ‘제발 깨우지 마라’고 빌면서 잠든 척을 했다.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비틀거리는 아버지가 우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듯했다. ‘일어나라고 하면 어쩌지, 제발, 제발...’ 그러다 아버지도 쓰러져 곯아떨어지면 그날은 행운이었다.

  아버지는 술을 마시면 사람들과 종종 싸움을 벌였다. 다행히 큰 상해를 입히거나 하진 않았지만 그럴 때마다 경찰서에 가서 어머니가 데려와야 했다. 동네 사람들은 허 선생이 자꾸 박정희 대통령을 욕하고 다닌다고 저러다 큰일 난다며 걱정했다. 나는 아버지가 큰 사고를 쳐서 차라리 감옥에 들어가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몇 년쯤 감옥에 있으면 그동안 우리 집은 평화롭겠지. 그리고 감옥에 갔다 오면 아버지도 정신을 차릴 거야. 그런 생각을 했었다. 아버지에 대해 그런 생각을 한다는 데 대해 나는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나에게는 이미 아버지에 대한 모든 권위와 존경이 남아있지 않았다.

  술에 취하면 아버지는 필름이 완전히 끊어졌다. 다음날 술을 마시지 않으면 전날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내가 왜 그랬지? 전혀 생각이 안 나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도 아버지가 어떤 짓을 했는지 항의 한마디 하지 못했다. 그저

  “아빠, 이제 술 안 드시면 안 돼요?”라고 말할 뿐이었다. 그러면 아버지는 “그래, 이제 술 안 마신다.”라는 대답을 수백 번 되풀이했다. 저녁상을 물리고 나면 어머니는 하얀 종잇장과 검은 사인펜을 아버지 앞에 내밀었다.

  “여기에 각서 쓰세요.”

  “그래, 쓸께.”

아버지는 고분고분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나는 이제부터 절대 술을 마시지 않겠습니다.”라는 내용의 각서를 쓰고 날짜를 적고 서명했다. 족히 백 번은 넘게 각서를 썼으리라. 각서를 쓸 때만큼은 아버지도 반성하는 것 같았고 다시는 술을 입에 대지 않을 것 같았다. 알콜 중독이라는 게 뭔지 몰랐던 나는 아버지의 굳은 결심을 믿고 싶었다. 그래서 희망을 품고 또 실망하고 다시 희망을 품고 실망하는 과정을 얼마나 되풀이했는지 모른다. 어머니도 그러셨던 것 같다. 그러니 포기하지 않고 각서를 쓰게 하고 또 쓰게 했을 것이다. 결심을 굳게 하면 술을 끊을 수 있을 거라고 믿은 것이다. 중독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뇌가 망가져 버린 것이라는 걸 70년대 그 옛날 소박한 사람들이 어찌 알 수 있었겠는가. 언제부턴가 어머니는 더 이상 아버지에게 각서를 내밀지 않았다. 내가 원하던 대로 되지 않을 때 자주 실망하고 쉽사리 다시 희망을 품지 못하는 것이 그 때문일까.


아버지의 과대망상

     

  나는 아버지가 술을 마시는 이유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학교에서 사람들과 무슨 일이 있기에 아버지는 저리도 술을 마시는 것일까. 무엇이 아버지를 저리 화나게 하고 속상하게 만드는 것일까. 남들 아버지처럼 적당히 술을 마시고 가족을 괴롭히지 않을 수는 없을까. 술만 마시면 잔다는 사람들도 있던데 그렇게만 마시면 얼마나 좋을까.

  어머니도 그런 갑갑증이 있었나 보다. 멀쩡할 때 “도대체 왜 그렇게 술을 마시는 거예요?”라고 물으면,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다.”는 애매한 대답만이 돌아왔다. 속된 말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술을 마시면 아버지는 신세 한탄을 늘어놓았다.

  “내가 말이야, 꿈이 대통령이었어, 대통령! 지금이라도 얼마든지 될 수 있어! 내가 대통령 나가면 나 찍어줄 사람이 수두룩해, 알아? 이거 왜 이래!”

  “알았어요, 알았어.”

아버지의 말을 듣고 나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아버지는 머리도 영특하고 공부도 잘해서 고등학생 때까지 대통령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런데 집안이 가난해서 좋은 대학에 가지 못해 대통령이 될 수 있는 길이 막힌 것이다. 그것이 한이 되어 술을 마시게 된 것이라고.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 욕을 하고 돌아다니는 것이라고. 그리 생각하니 아버지가 좀 안 돼 보이기도 하고 이해될 것 같았다. 그래도 이제 자식들도 있고 교사라는 좋은 직업도 있는데 왜 아직도 옛날 꿈을 못 잊고 술에 빠져 사는지 도저히 그 마음이 헤아려지지 않아 갑갑했다. 아버지의 술만 아니었다면 우리 집은 누구나 부러워할 만큼 화목했을 텐데. 훌륭한 어머니와 말 잘 듣는 자녀들, 뭐가 부족하단 말인가. 나에게는 아버지가 철없는 사춘기 소년으로 보였다.

  그런데 문제는 더 심각했다. 아버지는 여전히 대통령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아버지는 그 꿈을 놓지 못했다. 과대망상이 지나쳐도 너무 지나친 것이다. 실제 행동으로 옮기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아버지는 국회의원 선거가 있을 때마다 출마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버지의 그 많다는 지지자들은 다 어디 숨어 있는 것일까. 커가면서 나는 ‘대통령’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깊은 비애를 느꼈다. 도대체 아버지가 저 꿈을 붙잡고 있는 이유가 뭘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언젠가 그 이유를 알 날이 올까. 그러면 아버지는 그 꿈의 마수에서 벗어나 온전해질 수 있는 것일까. 나의 그 의문은 오랜 시간이 지나서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야 풀렸다.     


아버지에 대한 애증     


  아버지는 큰 딸인 나를 유독 예뻐했다. 내가 태어나고 한 살이 지나자 매일 학교에 데리고 가 교무실 책상 위에 나를 앉혀놓았다고 했다. 그때 찍은 사진이 있는 걸 보면 사실이었던 것 같다. 사진 속 나는 눈이 동그랗고 얼굴이 까무잡잡한 별로 예쁘지는 않지만 귀여운 아기였다. 나는 특히 눈이 커서 선생님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고 한다.

  나는 계란형의 얼굴 윤곽과 검은 피부가 아버지를 빼닮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키가 크고 미남형이었는데 나는 키도 작고 예쁘다는 말을 거의 듣지 못하고 자랐다. 어쨌든 처음 얻은 딸이라 그런지 아버지는 커서도 두 남동생보다 나를 더 귀여워했다. 내 기억에는 없지만 내가 세 살 때 소아마비를 앓자 아버지가 나를 업고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녀서 그나마 지금의 상태로 고쳐놓았다고 한다. 사람들이 내가 소아마비가 있는 걸 잘 모르는 것을 보면 아버지의 정성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것 같다. 아버지에 대해 뭐라도 고마운 것이 있나 생각할 때면 나는 이 사실을 떠올린다. 대학생이었을 때도 아버지는 내가 걷는 모습을 보면 “아기처럼 아장아장 걷는다.”고 말했다. 그렇게 예쁜 딸을 어찌 그리 괴롭히셨을까.

  아버지가 술을 먹지 않을 때는 나도 아버지가 좋았다. 어머니는 엄한 분이었지만 아버지는 자상한 편이었다. 멀쩡한 아버지에게는 혼이 나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훈계를 늘어놓지도, 잔소리도 하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에게 천자문도 배우고 바둑도 배웠다. 나중에 중학교로 옮겨 영어 선생님이 된 아버지는 가끔 영어책을 가져오게 해서 나보고 해석해보라고 했다. 그럴 때면 나는 신이 나서 내 실력을 뽐내곤 했다. 술만 안 먹으면 최고의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내가 원하는 것은 뭐든 해주겠다고 했지만 실제로 아버지가 내게 해준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6학년 때였다. 아버지와 나는 함께 TV를 보고 있었다. 화면에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고풍스러운 정문이 큼지막하게 클로즈업되고 있었다. 그 대학이 어떤 대학인지도 몰랐던 나는 그 장면에 순간 압도되어서 “아빠, 나 저 대학 가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아버지는 “그래, 보내주마.” 했다. 내 가슴은 갑자기 원대한 미래를 향해 날아가는 듯했다. 아버지의 그 말이 현실이 될 것만 같았다. 나는 정말로 아버지가 나를 그 대학에 보내줄 거라고는 믿지 않았지만, 아버지가 나의 미래를 격려하고 믿어준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언젠가 그 일이 나에게 이루어질 것 같은 기대로 부풀었다. 그때부터 옥스퍼드 대학은 나의 동경이자 꿈이 되었다. 훗날 토마스 하디의 소설 『무명의 주드』를 읽었을 때, 나는 주드의 운명과 나를 동일시하며 속으로 흐느꼈다. 옥스퍼드를 모델로 한 크라이스트민스터가 주드에게 불가능한 꿈이었듯이 내게도 옥스퍼드는 그러했다. 그러나 주드에게 그 동경이 포기하기엔 너무나 쓰라렸던 것처럼 내게도 역시 그랬다. 아버지의 그 한마디가 없었더라면 옥스퍼드가 나의 삶 속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 일로 아버지를 원망하지는 않는다. 아버지의 한마디 말이 자녀에게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갖는지 말해주고 싶었을 뿐이다.

  아버지가 술에 취해오지 않는 날이면 나는 기분이 들떠서 저녁 내내 신이 났다. 여름날이면 마당에 있는 펌프에서 물질을 해서 등목을 하곤 했는데, 어느 날 아버지가 술을 먹지 않은 채로 퇴근해 마당에 들어왔다. 나는 “아빠!”하며 달려갔다. 그때 나는 벌거벗은 몸이었다.

“저런, 다 큰 계집애가 창피한 줄도 모르고!”

어머니의 한마디가 나를 멈춰 세웠다. 아버지는 그저 빙긋이 미소 지었다. ‘이게 창피한 건가. 아버지인데.’ 나는 어머니의 말에 혼란을 느꼈다. 그래도 어머니의 말이 옳은 것 같아서 그 후로 절대로 아버지 앞에서 벌거벗은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 초등학교 5학년쯤 되었을 때였으니까 내가 너무 순진했던 것인지, 어머니가 너무 보수적이었던 것인지 잘 모르겠다.

  아버지에 대한 내 감정은 좋아하는 마음과 극도로 싫은 마음 사이를 오갔다. 술에 취하는 날이 많아 괴로울 때면 왜 이런 아버지를 만났을까 억울하고 슬픔 마음이 들었다. 분노는 억압했다. 우리 집에서 아이들이 분노를 표출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분노를 느끼는 것을 스스로 허용하지 않았다. 아버지에 대한 증오가 너무 깊어 아버지의 죽음을 바란 적이 많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의 주인공인 『카라마조프 형제들』의 이반은 법정에서 “자기 아버지가 죽기를 바라지 않는 자식이 있는가?”라고 외치는데, 그 장면을 읽으며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맞아, 맞아. 도스토옙스키도 이걸 알았구나. 나만 그런 게 아니었네.’ 아버지의 죽음을 바라는 죄책감이 인류 공통의 보편적인 감정이었음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어머니는 절에 다녀서 나는 우리 가족이 믿는 종교가 불교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부처님은 왠지 기도를 들어줄 신 같지 않았다. 그래서 때로 부엌 아궁이 앞에서 울면서 나는 잘 알지 못하는 하나님에게 기도했다. “우리 아버지 술 좀 끊게 해주세요. 도와주세요.” 나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것도 몰랐다. 그저 신이 있다면, 하나님이라는 분이 정말 계시면 혼을 내서라도 아버지가 술을 못 마시게 해주기를 간절히 빌었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었겠지만 응답해 주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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