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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지킴이 Apr 10. 2023

나는 코아였다. 1장 괴물 아버지

3화 공포의 밤

공포의 밤    

  

  나에게 삶이란 예측 불가능한 것이다. 오늘, 이번 주에, 다음 달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면 불안하다. 그래서 나는 예측 가능한 상황을 좋아한다. 과제를 받으면 언제까지 제출해야 하는지, 일을 맡으면 마감 기한이 언제인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 그때까지 내가 일을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없으면 절대로 어떤 일도 맡지 않는다. 사람도 그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이 좋다. 어디로 튈지 알 수 없고 언제 기분이 바뀔지, 약속을 자주 틀어버리거나 이랬다저랬다 하는 사람은 관계를 지속하기 어렵다.

  내가 이렇게 된 데는 아버지의 영향이 절대적이다. 오늘 아버지가 술을 먹지 않았다고 내일 먹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렇다고 꼭 먹는다는 확실성도 없었다. 모든 것은 아버지의 그날 기분에 달려 있었다. 하루하루가 예측할 수 없는 날들의 연속이었기에 나는 늘 불안을 안고 살았던 것 같다. 어렸을 때는 내 안의 불안이 그렇게 심한 정도였는지 몰랐다. 오랜 세월 누적되고 쌓인 불안은 나이 서른이 넘어서야 불안장애라는 병명이 되어 내게 돌아왔다.

  아버지의 술주정이 이어지는 밤이 어떻게 지나갈지도 예측할 수 없었다. 오늘은 몇 시에 잠잘 수 있을까. 내일 학교는 갈 수 있을까. 아버지 때문에 결석한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도 항상 그것이 걱정되었다. 때로는 분노가 급작스럽게 어머니와 우리를 향해 쏟아졌다. 무엇 때문에 아버지가 화가 났는지조차 파악할 수가 없었다. 왜 혼나는지도 모르면서 무릎을 꿇고 벌벌 떨면서 아버지의 분노를 받아내야 했다.

  아버지는 화가 나면 눈빛이 변했다. 평소 부드럽던 눈빛이 온 세상을 향한 적의로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아버지가 그런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면 우리는 저절로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고 어깨를 움츠렸으며 꼭 쥔 두 손은 무릎 위에서 덜덜 떨렸다. 아버지는 아래턱을 불쑥 내밀고 무서운 표정을 짓는 습관이 있었다. 때로는 우리 앞에서 담배를 피웠는데 짐승처럼 이빨을 드러내고 입 가장자리로 담배를 물었다. 아버지는 담배를 문 채 알아듣지도 못할 말들을 내뱉었고 담배 연기를 우리 쪽으로 내뿜기도 했다. 얼굴을 돌릴 수가 없어서 우리는 고스란히 담배 연기를 다 들이마셔야 했다. 양반다리로 앉은 아버지는 늘 몸을 한쪽 옆으로 기울였는데 가끔 느닷없이 담뱃재를 털던 재떨이를 손에 집어 들었다. 유리로 만든 아주 무거운 재떨이여서 그것에 머리를 맞는다면 머리는 박살이 나고 말 것 같았다. 다행히 아버지는 재떨이를 들었다가 위협만 하고 내려놓곤 했는데, 언젠가 저 재떨이가 날아가서 누군가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가벼운 재떨이로 바꿨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했다.

  아버지는 그런 밤에 어머니나 우리를 때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언제나 아버지는 곧 때리기라도 할 듯 팽팽한 긴장감과 공포를 연출했다. 연약한 아내와 자식들이 자신 앞에서 두려워하는 모습이 아버지의 상처받은 자존심에 어떤 만족감을 준 것일까. 아버지는 밖에서 받았던 굴욕감이나 기분 상한 일들을 가족에게 화풀이하면서 그것으로 자신의 분노를 삭이는 것만 같았다. 가끔은 대답할 수 없는 어려운 질문을 우리에게 하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나와 동생들은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울먹였다. 대답하지 않아도, 잘못된 대답을 해도 아버지는 불같이 화를 냈다. 어쩌다 껄껄 웃고 넘어갈 때는 ‘이제 살았구나’ 싶어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가 밖으로 나가지 않고 집 안에만 있을 때 우리 집은 이 세상에서 완전히 고립된 비현실적인 공간이었다. 나는 다른 집에서 곤히 자고 있을 아이들이 너무나 부러웠다. 우리 집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아무도 모르겠지? 내가 이야기해도 아무도 믿지 않을 거야. 슬프고 서러워도 아버지가 무서워 울 수도 없었다. 거의 감정이 마비된 상태에서 빨리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빌며 벽시계를 쳐다보곤 했다.

  밤 열두 시가 되어 가면 어머니가 아이들 학교 가야 한다며 아버지를 달랬다.

“그래 학교 가야지. 이제 가서 자.” 그제야 해방된 우리는 뻣뻣해진 다리를 펴고 날쌔게 이불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어머니 차례는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지칠 대로 지친 우리는 곧 잠에 빠져들었다. 아버지의 계속되는 주정과 간간이 들리는 어머니의 달래는 목소리를 자장가 삼아 누구도 다독여주지 않은 불안해진 마음을 잠으로 잊었다.


술 심부름

  

  그나마 아버지가 집에서 술을 마시지 않는 날은 나은 편이었다. 내가 제일 싫어했던 것은 아버지의 술 심부름이었다. 아버지는 밤에 집에서도 혼자 맥주나 막걸리를 마시곤 했는데, 그런 날 아버지는 다른 날보다 더 난폭해졌다. 처음에는 내가, 나중에는 동생들도 술 심부름꾼이 되었다.

  동네에는 가게가 하나밖에 없었다. 가게는 우리 집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컴컴한 밤길을 걸으며 불이 밝혀진 다른 집을 쳐다보면서 저 집이 우리 집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아이가 맥주 달라는 말을 선뜻하기가 창피했다. “저, 아버지가...” 하면 주인아저씨는 “술 사 오라고?”하며 혀를 끌끌 찼다. “아이들 생각해서 술 좀 줄이지, 참.” “아저씨가 가셔서 우리 아버지 좀 말려 주시면 안 돼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지만, 말을 하지는 못했다. 힘 세 보이는 아저씨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아버지 정도는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동네에서는 누구도 우리 집 일에 관여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당시 분위기로서는 술 문제는 순전히 집안일로 남이 관여할 성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때 경험 때문인지 나는 내 주위에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다고 느끼면 심한 불안 상태에 빠진다. 그래서 늘 위험한 일이 생기면 연락할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하면서 사는 게 버릇이 되었다.

  때로는 막걸리 심부름도 했다. 막걸리는 가게가 아니라 어느 집에서 만들어 팔았는데, 그 집은 우리 집에서 동네 정반대 쪽에 있었다. 하늘에는 달이 떠 있었다. 시골 마을은 어두웠지만 나는 어둠이 무섭지 않았다. 어느 집에 누가 사는지 다 알고 있어서 밤에 동네를 돌아다녀도 두렵지 않았다. 두려운 건 술을 사 가면, 아버지가 어떻게 할까 하는 것이었다. 집에서 들고 간 주전자에 막걸리를 가득 담아 돌아오면서 나는 그 길이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면 영원히 집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니까.

   한번은 그 와중에도 막걸리를 주전자 뚜껑에 따라서 홀짝 마셔본 적이 있다. 생각보다 막걸리가 달짝지근하니 맛있었다. 그래서 또 한 번, 또 한 번 마셨다. 맥주나 소주는 냄새만 맡아도 얼굴이 찡그려져서 도대체 왜 마실까 했는데 막걸리를 마시는 이유는 알 것 같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동생들도 막걸리를 받아오면서 도중에 마셔본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런 행동이 잠시나마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을 가시게 해주는 것 같았다.

  언제나처럼 무릎 꿇고 앉은 우리 앞에서 아버지는 혼자 술병을 비웠다. 어머니가 “여보, 그만 좀 마셔요.”라고 말하기만 하면 아버지는 어머니를 향해 욕을 해대고 눈을 부라렸다. 차라리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가 될 때까지 술을 마시고 쓰러지는 편이 나았다. 그러나 술이 센 아버지는 좀처럼 그런 법이 없었다. 마루 아래 댓돌에 술병이 하나둘 늘어섰다. 아침이 되어 보면 열 병이 넘는 술병이 늘어서 있을 때가 많았다. 우리는 그 술병을 모아다가 가게에 가지고 가서 돈을 받아오거나 아이스께끼를 사 먹었다.      


수국 사건       


   어느 날 아버지가 여느 때보다 조금 집에 일찍 돌아왔다. 여름이었던 것 같다. 우리 집 마당에는 화단이 있어서 각종 계절 꽃이 피어있었다. 그해는 수국이 탐스럽게 한 무리 피어서 마당 한쪽을 예쁘게 치장하고 있었다. 나는 그날까지 그 꽃 이름이 수국이라는 것도 몰랐다. 사실 우리 집에 수국이 있었다는 것조차 몰랐다. 아버지가 삼 남매를 마당으로 모이라고 불호령을 내렸다. 보통 아버지가 마당으로 우리를 불러내는 일은 없었기에 웬일일까 불안한 심정으로 마당 한 가운데 섰다.

“여기 있던 수국 어디 갔어?”

수국? 수국이 뭐야? 우리 삼 남매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볼 뿐이었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우리는 무슨 일이 터졌구나 싶어 안타까운 눈길로 어머니만 바라보았다. 지금도 그때의 사정은 모른다. 수국이 정말로 있었는지, 누가 그 수국을 없앴는지. 어머니가 뭐라도 하셨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수국이 없어져서 아버지가 크게 노했다는 것이다. 아버지한테 그 수국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었는지는 모르겠다. 평소 꽃에 관심이 있던 아버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마 아버지는 뭔가 화풀이를 할 트집을 잡을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범인으로 우리를 지목했다.

“누가 그랬는지 말해!”

아무도 아는 바가 없었기에 우리는 답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제가 그랬어요.”라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동생들도 묵묵부답이었다. 아무도 대답 없이 고개만 수그리고 있자 아버지는 더 화가 난 모양이었다. 우리는 오늘 드디어 맞게 된다고 생각했다. 끔찍하다는 감정이 온몸을 마비시켰다. 악몽 같은 순간이었다.

“지금부터 동네 열 바퀴 돌아! 느리게 뛰면 죽어.”

  우리는 맞지 않는다는 생각에 부리나케 집 밖으로 나와 동네를 뛰기 시작했다. 크지 않은 동네였지만 동네를 열 바퀴 돈다는 것은 어린 우리에게는 큰 벌이었다. 우리는 나란히, 혹은 줄을 지어 동네를 달렸다. 저녁 무렵이어서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한낮이었으면 얼마나 창피했을까. 그래도 여름이어서 아직 그다지 어둡지 않았다. 우리는 무서움 때문에 창피하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뛰는 것이 힘들었지만 집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나았다. 왜 뛰어야 하는지 이유도 모르면서 화난 아버지의 분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뛰어야 한다는 생각만 들었다. 우리가 열심히 뛰어야 아버지가 안정을 찾을 것 같았다.

  열 바퀴를 다 돌고 마당으로 들어섰다. 그때까지 아버지와 어머니는 마당에 서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똑바로 서!”

우리는 헐떡거리는 숨을 참으며 아버지 앞에 섰다. 제발 이것으로 끝나 주었으면...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마라!”

“네에...” 우리는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도 않은 행동으로 호된 벌을 받았다는 억울함보다 오늘은 이렇게 끝나는가보다 라는 안도감이 더 크게 밀려왔다.

“방에 들어가! 밥 먹어!”

그날의 나머지는 무사히 지나갔다. 아버지가 우리에게 그런 벌을 준 것은 처음이었다. 자식들이 아버지의 말에 순종해 군소리 없이 동네를 열 바퀴나 뛴 것이 아버지의 자존심을 만족시켜 주었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집에서 왕이고 무소 부재의 권력자였으니까. 아버지를 거역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밖에서 자신의 초라함을 느끼는 사람일수록 집에서는 폭군으로 군림하는 법이라는 걸 나는 점점 알아갔다. 지금 나는 그날의 경험을 생각하면 회초리로 종아리를 피 나도록 맞은 것만큼이나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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