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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그림자

소통과 단절

by 강인한

이건 무슨 색이야?

붉은색이지.

붉다는 것은 뭐야?


내가 보고 느끼는 세상은 남들과 똑같을까. 그러니까, 내 눈앞에 있는 뜨거운 김이 나오는 아메리카노는 검고 쓴 액체이고, 드라마에 나오는 저 배우의 코는 어느 정도로 오뚝하고 한 여름의 햇빛은 정말 죽을 정도로 뜨겁다는 사실이 남들에게도 똑같이 보이고 느껴지는 것인지. 네가 화가 난 이유와 내가 실망한 마음은 어쩌면 같은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어떤 사람은 전혀 웃기지도 않은 부분에서 웃음을 터뜨리는데 그 사람의 웃음은 나의 웃음과 같은지에 관해 떠올릴 때면, 머릿속이 자꾸만 흐려졌다. 바보 같은 생각을 하는 것만 같고, 관자놀이가 지끈지끈 아파온다.


그럼에도 내가 웃는 것과 네가 웃는 것은, 그러니까 내가 느끼는 것과 보는 것은 너와 약속되어 있다. 하나의 상황에 입꼬리가 올라가고, 호흡이 가빠지며 큰 목소리로 깔깔대는 행위를 웃음이라고 부르듯이. 떠오르기만 해도 얼굴이 붉어지며 온몸의 근육이 굳어버리는 것만 같은 기분을 사랑이라고 부르듯이. 하지만 사랑은 영어로는 love, 일본에서는 愛라고 부르는데, 그 언어가 뜻하는 의미도 내가 생각하는 의미와 똑같을까 생각을 해 보니 그렇다고 확실하게 말할 자신이 없었다.


다시 돌아와 누군가는 다른 부분에 웃음을 터뜨리고, 사랑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게 느껴진다. 하지만 웃음과 사랑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추상적 개념인데, 언어로 경계를 정하고 그 언어가 개념의 전부를 나타내듯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정말 옳을까. 누군가 ‘이건 정말 웃겨.’라고 말한다면 그 말이 완벽하게 상대에게 전달되고 표현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어쩌면 언어의 착각 속에 빠져사는, 오해의 늪에 빠지기 쉬운 행동을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러한 언어의 약속이 없다면, 우리는 단절되어버리고 만다. 내 느낌을 완벽하게 담을 수 없더라도, 비슷하게나마 전달을 해야 하기에 우리는 언어를 사용한다. 우리가 약속을 하지 않으면, 그러니까 사랑의 감정과 기준이 다른 사람들과 다를지라도, 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상대방에게 내 마음을 전달할 수 없다. 태양에 가까워지려다 날개가 녹아 추락한 이카루스와도 같이, 완벽하게 나의 마음을 표현하려고 할수록 완벽하지 않은 방법으로 표현이 되는 것. 나는 그것을 언어의 그림자라고 부르기로 했다.


단절. 우리는 단절을 무서워한다. 누군가에게 내 마음을 표현해야 하고 누군가의 마음을 이해해야만 살아갈 수 있기에 우리는 언어를 사용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언어로 완벽한 마음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잘못된 방식인 것을 알면서도 그것 이외에는 사용할 방법이 없으니까. 태초의 누군가는 그렇게 계속해서 언어의 약속을 만들어갔을 것이다. 사람의 감정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이고, 그렇게 언어가 서로 연결되며 하나의 우주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느끼는 감정과, 상대방이 느끼는 감정이 약속된 비슷한 언어로 표현이 된다 해도, 내 입 속에서부터 빠져나온 언어는 상대방에겐 비슷하지만 분명 내가 말하고자 하는 느낌과 다른 느낌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렇다면 내 마음이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다 해도, 상대방에게 진심이 전달되지 않아도 괜찮다. 그것은 내 진심이 무시된 것이 아닌 언어의 그림자에 가려졌을 뿐이니까. 당신이 언어의 그림자를 느꼈다면, 그 그림자에 삼켜지지 않도록 항상 주의해야 할 것이다. 언어의 그림자를 항상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붉다는 게 뭐야?라는 질문에 당신은 어떻게 답할 것인가.

나 또한 확실한 답을 알지는 못하지만, 분명한 건 더 많은 언어로 길게 설명하려고 하진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늘어지게 말한다 해도 오해만 쌓일 뿐이니까.

‘붉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약속’의 의미에서 붉다고 말하는 것일 뿐, 네가 느낀 붉음은 고유적이고, 아무도 모르는 작은 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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