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by 임준규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십칠 년 만에 다시 꺼내 보았다.

기억력이 나빠진다는 건 어떤 경우에는

좋은 의미를 갖기도 한다.

주인공 츠네오가 찍었던 사진들

쿠미코와 나눈 대화들이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신선했고 어떤 장면은 아예 기억조차 나질 않았다.


쿠미코가 마음의 문을 겹겹이 두르고

표독스러움과 시니컬한 말투로

츠네오를 대하다 서서히 마음도 몸도 허락하면서

이전 장면에서 볼 수없었던 밝은 미소를 내보일 때쯤 영화 보기를 그만두었다.

사랑이 주는 설렘과 환상의 막바지가 거기까지였기 때문이다.



'조제'는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 <한 달 후, 일 년 후>의 여주인공이다.

츠네오와 쿠미코는 책 이야기를 하면서 가까워지는데

이때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이 언급된다.

영화의 첫머리 '조제'는 쿠미코를 은유하는 동시에

두 사람이 처음 호감을 갖기 시작한 순간을 뜻한다.


쿠미코와 츠네오가 본격적으로 사귀고

첫 데이트를 시작한 곳은 동물원이다.

쿠미코는 좋아하는 남자가 생기면 '호랑이'를 보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쿠미코는 그 소원을 이루었다.


'그리고'라는 접속사에서 보듯 '물고기들'은

두 사람의 이별을 뜻한다.


영화는 츠네오의 시점으로 진행이 된다.

때문에 쿠미코의 마음이 어땠는지,

쿠미코의 할머니는 또 어떤 마음이었을지에

대해 많은 부분이 생략된다.


할머니는 츠네오가 자신의 손녀에게 다가가는 것을 경계한다.

그러면서도 츠네오가 쿠미코와 식사를

하고 잠시 말벗이 되어주는 것까지는 허락한다.

츠네오가 싫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손녀가 상처를 받을까 걱정이 되었던 것

만일 쿠미코에게 장애가 없었다면 세 사람은

사위와 장모 아내 사이가 되었을 것이다.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츠네오와 쿠미코 사이의 결개는 사라진다.

츠네오와 보냈던 뜨거운 시간들이 쿠미코에게는

일생의 추억이 됐을까

아니면 현실을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상흔으로 남았을까


어떤 경험이 나에게 유해했냐 무해했냐는

결국 타인과의 관계에서 재정립되어진다.


마당에서 뛰어놀던 아이들에게

쿠미코가 좋은 언니 좋은 엄마가 되어주었기를,

사랑의 열병을 바탕으로

프랑수아즈 사강을 뛰어넘는 작가가 되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