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배, 전설의 시작
17세기, 대항해시대.
카리브해의 무역길 중심에 거대한 전함 하나가 정박해 있었다. 하지만 갑판 위에는 대포 대신 붉은 등불과 간판이 걸려 있었다.
오션뷰 카페.
원래는 전함이었으나, 사장 김성곤이 통째로 개조해 만든 해상 레스토랑이다. 혹시 모를 해적의 침입에 대비해 최소한의 무장은 남겨두었지만, 이곳은 더 이상 전쟁의 배가 아니었다. 세계 각지의 커피, 차, 과일, 빵, 디저트가 모여드는 바다의 살롱.
오늘도 카페 안은 바쁘게 돌아갔다. 종업원들은 분주히 움직였고, 과일과 빵 냄새, 커피 향이 뒤섞여 손님들의 코를 자극했다.
그때,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들어섰다.
정규만, 천재 선박 제작자.
성곤은 그를 보자마자 반갑게 달려갔다.
“야! 규만아! 드디어 왔구나.”
규만은 피식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성곤아, 아직도 손님이 이렇게 많냐? 네 카페는 언제 와도 북적북적 이야.”
성곤은 어깨를 으쓱였다.
“다 네 덕분이지. 네가 이 배를 개조해 줬잖아. 난 그냥 장사만 할 뿐.”
규만은 귀빈석에 앉으며 럼주를 들었다.
“오늘은 조심해라. 성에서 큰 행사가 있어. 분명 귀족들, 아니… 해군 장교들까지 네 카페에 올 거다.”
성곤은 잔을 채우며 씩 웃었다.
“좋지. 손님이 많을수록 내 주머니도 두둑해지니까.”
둘은 친구이자 파트너였다. 성곤은 장사꾼의 촉을 가졌고, 규만은 그 촉을 현실로 바꿔줄 기술을 가진 자였다.
곧, 갑판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영국 해군의 군함과, 스페인 해군의 갈레온이 동시에 정박한 것이다.
문을 열고 들어온 두 명의 장교.
영국 해군의 냉철한 장교 강신혁,
스페인 왕립 해군의 거칠고 탐욕스러운 장교 정한별.
두 사람은 나란히 걸어왔지만, 눈빛만큼은 칼날처럼 부딪쳤다.
“홍차를 주시오.”
신혁이 단호하게 말했다.
“난 커피로 하지. 스페인의 커피가 훨씬 훌륭하다네.”
한별은 일부러 크게 말하며 앉았다.
성곤은 곧장 주문을 받아 나르면서도, 살짝 규만과 눈빛을 주고받았다.
“왔군.”
“그래, 오늘이 바로 그날이야.”
홍차와 커피가 테이블에 놓이자, 대화는 곧 해적 이야기로 흘렀다.
신혁은 잔을 내려놓으며 이를 갈았다.
“블랙 코메트 호… 그 악질 해적선. 내 정밀 포격을 약 올리듯 다 피해내더군. 심지어 내 군함에 총격까지 가했지. 그 배를 만든 자부터 교수형에 처해야 해!”
그는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규만은 럼주를 마시다 사레가 들려 “콜록!” 기침을 했다.
성곤이 얼른 물 잔을 밀어주며 속삭였다.
“야, 너 티 난다.”
정한별은 비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영국군이 그 정도로 당했단 말이오? 하지만 내겐 ‘크림슨 크로우’가 더 문제요.”
그는 잔을 꽉 쥐며 이를 악물었다.
“내 엘 디아블로 호와 정면으로 포격전을 벌여 버텨낸 배는 처음이오. 놈들의 트리플 케논… 그 포격은 악몽이라 해도 모자람이 없소.”
규만은 속으로 땀이 났다. 성곤은 능청스럽게 웃으며 분위기를 바꿔보려 했지만, 두 해군 장교의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카페의 공기는 묵직해졌다.
바다 위의 살롱, 오션부 카페.
오늘 이곳에 모인 사람들.
아무도 몰랐다.
이 사소한 대화가 훗날, 대양을 뒤흔드는 거대한 전쟁의 시작이 될 줄은…
두 장교는 해적을 욕하며 씩씩대다가, 결국 홍차와 커피 값을 내고는 위풍당당하게 카페를 나갔다.
그들의 발소리가 사라지자마자, 규만은 긴 숨을 내쉬었다.
“휴… 들킬 뻔했네.”
성곤이 킥킥 웃으며 물었다.
“왜? 뭐 숨기는 거라도 있어?”
규만은 럼주잔을 돌리며, 자연스럽게 과거로 생각을 던졌다.
몇 년 전
“제발, 만들어줘라. 대포는 적어도 좋으니까, 대신 바람을 가르는 속도와 방향전환이 누구도 따라올 수 없게 해 줘.”
젊은 사내가 그의 앞에 서 있었다.
검은 눈빛, 검은 망토. 이름은 안형준.
그는 어디서 큰돈을 마련했는지, 주머니 가득 금화를 쏟아내며 애원했다.
“그리고 꼭... 전부 검은색으로 해줘. 배도, 돛도. 내 이름은 바다 위의 그림자가 될 거야.”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블랙 코메트 호.
이제는 영국 해군 강신혁이 이를 갈며 증오하는, 악명 높은 해적선이었다.
현재 형준의 현상금은 전함 한 척 값에 맞먹는 수준.
올 블랙 해적단의 이름은 이미 바다 전역에 공포의 상징이 되었다.
또 다른 기억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한 사람이 찾아왔다.
이번엔 정반대였다.
“크고 튼튼하게. 대포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 그리고 뭔가 특별한 것도 하나 넣어줘. 속도? 그딴 건 중요치 않아.”
서우덕, 탐욕스러운 눈빛의 사내.
그는 금화를 내던지며 거대한 괴물 같은 배를 원했다.
그 결과, 바다를 울리는 크림슨 크로우 호가 탄생했다.
삼중 포신, 트리플 케논까지 장착된 괴수.
우덕은 그 배를 몰고 해적질과 노예 거래까지 일삼으며 크림슨 해적단을 꾸려냈다.
규만의 배는 이제 평화보다는 피와 약탈의 상징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규만이 만든 배를 진짜로 평화롭게 사용하는 사람은 성곤뿐이었다.
그날 밤
카페 영업이 끝나고, 성곤은 청소를 하며 분주히 움직였다.
남은 빵을 정리하고, 바닥을 닦으며 스스로 흥얼거렸다.
그때, 바다를 가르는 귀를 찢는 대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성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설마…?!”
그는 급히 카운터 아래에 숨겨둔 칼을 찾으려 뛰었다.
그리고 눈앞에 검은 그림자가 서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옷, 허리에는 칼집까지 칠흑빛으로 물든 칼.
성곤은 단박에 알아봤다.
“형준!! 네가 여기 오면 안 돼! 지금 이 섬엔 영국이랑 스페인 해군이 같이 있단 말이야!!”
그러나 형준은 태연하게 웃으며, 손에 뭔가를 내밀었다.
“혹시 초콜릿이란 걸 먹어봤냐? 설탕을 타서 마시면… 기가 막히거든.”
그는 윙크하며 초콜릿을 건넸다.
“엄청 비싼 건데, 특별히 반 값에 줄게. 어차피 약탈품이니까 말이야.”
성곤은 순간 기가 막혔지만, 초콜릿 드링크를 마시는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
“세상에… 이런 맛이 다 있어?!”
형준은 여유롭게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그는 약탈한 물건을 모두 성곤에게 팔아넘기고 있었다.
성곤은 시장보다 저렴하게 진귀한 물건을 얻었고, 형준은 팔 곳 없는 전리품을 현금화했다.
서로 남는 장사였다.
한편 잠을 자던 강신혁은 침실 문을 박차고 나와 차가운 칼을 뽑아 들었다.
“저놈들을 끝까지 쫓아가라! 한 놈도 남김없이 붙잡아 교수형에 처하겠다!!”
명령이 울려 퍼지자 영국군 병사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한편, 오션뷰 카페.
형준은 태연하게 성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또 보자! 초콜릿은 맛있게 먹고~”
그는 창문을 열고 가볍게 뛰어내렸다. 순간, 칠흑빛 망토가 밤공기 속으로 스르르 흩날렸다.
검은 파도 위에서 기다리던 블랙 코메트 호.
형준은 경쾌하게 갑판에 착지하며 외쳤다.
“아론!! 우리의 상징은 뭐다?”
부선장 아론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야간 해전, 아닙니까! 아주 즐거운 밤이 되겠군요, 선장님!!”
형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명령을 내렸다.
“좋다! 연막을 피워라! 회전포를 비롯한 모든 포를 장전해라!!”
아론은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리며 선원들 속으로 뛰어갔다.
형준은 다시 고개를 돌려 항해사석으로 향했다.
“누나!!”
그곳에 서 있는 이는 윤아, 블랙 코메트 호의 1등 항해사이자 형준의 짝사랑 상대였다.
“윤아 누나! 저놈들 싹 다 때려잡고 어디로 갈지 항로를 정해줘! 오늘은 별이 아주 잘 보이잖아!”
윤아는 별자리를 확인하며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하지만 선장, 너무 신나게 굴지 마. 아직 해가 뜨기 전이야. 철수 타이밍 놓치면 우리 끝장이야.”
그 시각, 스페인 해군의 거대한 전함 엘 디아블로 호도 출동을 마친다.
정한별은 창백해진 병사들을 밀쳐내며 외쳤다.
“좋다! 영국군 앞에서 우리 배의 힘을 보여줄 절호의 기회다! 출항하라!!”
반면, 강신혁은 바다에 드리운 안개와 블랙 코메트의 검은 연막을 보자 즉각 명령을 내렸다.
“리갈 저스티스 호를 안전한 수역으로 이동시켜라. 저놈은 어둠 속의 망령이다. 섣부르게 맞붙지 마라.”
정한별은 그 모습을 보고 코웃음을 쳤다.
“겁쟁이 영국 놈 같으니! 제대로 싸울 용기도 없으면서 동맹을 맺자고?”
신혁은 차갑게 쳐다보며 혀를 찼다.
“바보. 곧 대가를 치르게 될 거다.”
망루에서 망을 보던 선원이 형준에게 외쳤다.
“선장! 스페인의 엘 디아블로 호가 보입니다!”
형준은 미소를 지었다.
“대포 개수만 믿고 까부는군... 좋다. 발포해라! 돛대를 향해 쇠사슬 포탄을 쏴라!!”
쇠사슬 포탄이 하늘을 가르며 날아가더니, 엘 디아블로의 돛대를 단숨에 꺾어버렸다.
거대한 돛이 갈라진 배 위로 무너져 내렸다.
정한별은 이를 갈며 외쳤다.
“노를 저어라! 방향을 바꿔라! 전 포문, 개방!! 쏴아아 아아!!!”
엄청난 포성이 울렸지만
안개와 연막 속, 검은색의 블랙 코메트 호는 더욱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형준의 배는 조류와 바람을 정확히 읽으며 엘 디아블로의 뒤쪽으로 미끄러지듯 파고들었다.
마치 바다 위에서 드리프트를 하듯, 검은 그림자가 원을 그리며 돛대 잔해를 돌았다.
선원들은 익숙하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며 대포를 쏘아댔다.
“이양하하! 역시 우리 배야!”
“선장님, 최고!!”
윤아가 다시 소리쳤다.
“이봐 선장!! 그만 신나 하고 슬슬 철수해야 해! 곧 해가 뜬다고!!”
형준은 잠시 아쉬운 눈빛을 보냈다.
“쳇, 벌써 시간이… 알았다! 공격 중지! 전원 철수!”
블랙 코메트 호는 거대한 물보라를 일으키며 빠르게 퇴각했다.
안개와 연막이 흩어지고, 바다 위에는 개망신을 당한 엘 디아블로 호만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