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바다의 카페

몰락은 끝이 아닌, 항해의 서막

by 동룡

아침 바다는 고요했지만, 카리브해 전역은 떠들썩했다.
스페인 왕립 해군의 상징, 엘 디아블로 호가 밤새 탈탈 털렸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져나간 것이다.

돛대가 부러지고, 선체가 구멍투성이가 된 거대한 전함은 다른 배들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항구로 끌려왔다.
그 모습은 마치 바다의 지배자가 아니라, 조각난 표류선 같았다.

오션 뷰 카페, 귀빈석.
정규만은 성곤이 내온 신메뉴, 진한 초콜릿 드링크를 홀짝이며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그때 문을 박차고 들어온 사람이 있었다.
붉은 제복 차림의 정한별이었다.

“규만! 배 좀 봐달라. 내 엘 디아블로가... 아주 개판이 되어버렸어.”


규만은 한숨을 쉬며 컵을 내려놓았다.
“알았어. 어디 한 번 보지.”

부두에 정박된 엘 디아블로 호.
규만은 배 주위를 돌며 점검했다.

“앞뒤 선체 다 터졌고 양옆 판재는 대포 흔적, 돛대는 아예 부러졌네. 하... 이건 배를 고치는 게 아니라 다시 만드는 수준인데.”

규만의 말에 한별은 얼굴을 붉혔다.
“내 체면이 걸린 일이야. 기어이 복수할 테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고쳐줘야 해.”


한편, 영국 해군의 장교 강신혁은 여전히 분노를 삭이지 못한 채 말을 꺼냈다.
“한별, 다시 한번 말하지만 블랙 코메트와는 야간 해전을 벌이지 마시오. 그건 어리석은 짓이오.”

그러나 한별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다시 오션 뷰 카페로 향했다.


카페 안.
한별은 메뉴판을 보다 이상한 걸 발견했다.
“흠... 초콜릿 드링크? 어제까지는 없었던 메뉴군.”

그리고 성곤에게 다가가 묻는다.
“이건 굉장히 귀한 재료요. 게다가 시장에선 구할 수도 없을 텐데, 어디서 가져온 거요?”

성곤은 익살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시장? 아니오. 그냥 바다 위에서 직접 거래했지. 항해하는 상인들하고 직거래로!!”

한별의 눈빛이 살짝 날카로워졌지만, 신혁이 끼어들었다.
“쓸데없는 의심은 집어치우시오. 중요한 건 블랙 코메트를 어떻게 잡느냐는 거요.”

그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때였다.
카페 한쪽에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바다에서 제일 좋은 배는 블랙 코메트죠? 한 번도 진 적 없다면서요! 저도 나중에 그런 선장이 될래요!”

엄마는 아이의 입을 틀어막으며 허둥지둥 신혁에게 사과했다.
“장교님, 죄송합니다! 아이가 철없는 소리를!”
그리고는 빠르게 가게를 나갔다.

카페 안이 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정한별은 피식 웃으며 신혁을 향해 물었다.
“그래… 혹시, 자네 그 블랙 코메트와 붙어 한 번이라도 이겨본 적 있나?”


신혁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천천히,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 없다.”

3년 전, 갓 장교가 되었을 때 처음 마주쳤다.
그 후에도 두 번 더 맞붙었지만, 결과는 같았다.

특히 마지막 전투.
형준은 닻조차 내리지 않은 채, 마치 바람과 조류를 장난처럼 다루며 배를 원형으로 돌렸다.
리갈 저스티스 호는 속수무책으로 얻어맞았고, 신혁은 그날의 굴욕을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정한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나도 어제 그렇게 당했네. 돛대가 박살 나고, 대포는 허공만 때리고… 그놈들의 움직임은, 마치 닻을 내리고 도는 것 같았다네.”


신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그건 닻을 내린 게 아닙니다. 놈들은… 단순히 조류와 바람을 이용한 겁니다.
그 배가 워낙 빠르니, 그런 묘기가 가능했던 거지요.”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동시에 어쩔 수 없는 인정이 섞여 있었다.


신혁과 한별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 순간, 카페 구석에서 또 다른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블랙 코메트의 1등 항해사 진짜 예쁘대!”


“맞아, 별명이 아프로디테라며? 항해술보다 미모가 더 뛰어나다던데?”

순식간에 카페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신혁은 눈을 질끈 감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들은 곧 부모에게 귀를 잡힌 채 끌려나갔고, 남은 건 찌푸린 신혁의 표정뿐이었다.


한편, 그 시각 바다 위.
블랙 코메트 호의 갑판에서 형준은 망원경을 이리저리 돌리며 중얼거렸다.
“흠, 오늘은 어떤 배를 털어볼까나”

그러나 그의 시선은 결국 지도를 들여다보는 항해사 윤아에게서 멈췄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 달빛 같은 눈빛.
형준은 멍하니 바라보다가

쾅!
윤아가 망원경을 밀어 그의 이마를 툭 때렸다.

“야!! 선장이면 선장답게 좀 해봐! 맨날 나만 뚫어져라 보지 말고!”
“아, 아니 그게... 나는 배를 보려던 거지, 배...”

윤아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어제 털은 초콜릿! 다 어디 갔어?!!”

형준은 딴청을 피우며 갑판 아래로 고개를 돌렸다.

“긱스! 오늘 메뉴 뭐야?”

선내 요리사 긱스가 고개를 내밀며 대답했다.
“선장님, 오늘은 해산물 스튜인데요”

그러나 윤아는 형준의 귀를 낚아채며 당겼다.
“또 그 카페에다 반값에 넘긴 거지?! 대체 해적단 운영을 이렇게 하면 어떡해!!”

형준은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 아냐! 이번엔 진짜!!.”

갑판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선원들은 배를 치며 폭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우리 선장은 또 혼난다!”
“바다의 공포, 검은 그림자도 윤아 앞에선 쥐 죽은 고양이네!”

형준은 억울한 얼굴로 외쳤다.
“야! 너희들 다 조용히 안 해?! 내가 선장이야!! 내가 선장이라니까!”


그러나 선원들의 웃음소리는 더 커져만 갔다.


그날 저녁.
스페인 장교 정한별은 오션 뷰 카페의 특별 침실에 누워 있었다.
“오늘은 대포 소리도 없고… 드디어 편히 잘 수 있겠군.”

그는 눈을 감으며 미소 지었다.
그러나 그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헤헤~ 성곤!! 덕분에 이번에도 물건 잘 풀었어. 역시 우리 크림슨 크로우와 올 블랙은 이 카페의 단골이라니까.”

한별의 눈이 번쩍 떴다.
캐논킹 우덕.
크림슨 크로우의 선장이자, 대포를 사랑하는 악명 높은 해적의 목소리였다.


한별은 몸을 숨기고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우덕의 말은 점점 더 놀라웠다.

“그동안 그렇게 싸게 식자재를 들여온 이유가 뭐겠어? 우리가 약탈해 온 걸 바로 넘긴 거지.
규만이가 크림슨 크로우랑 블랙 코메트를 만들어준 덕분이지!”

성곤은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쉿! 목소리 줄여! 손님 들으면 다 끝장이야!”

하지만 이미 늦었다.


침실 문이 열리며 한별이 칼을 뽑아 들고 뛰쳐나왔다.

“이 배신자 놈들! 감히 해적들과 내통을 했단 말이냐?!”

우덕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곧장 창문으로 몸을 날렸다.
“에잇, 이런 젠장!”
그는 바다로 뛰어내리며 도망쳤다.

남은 성곤과 규만은 꼼짝없이 붙잡혔다.


다음 날 아침, 카페 안은 얼음장 같은 공기였다.
영국과 스페인 해군은 두 사람을 해적 내통죄로 단상 위에 세웠다.


“본디라면 교수형이다.” 신혁의 목소리는 냉혹했다.

그러나 곧 판결이 내려졌다.

정규만은 그동안 해군의 전함을 정성껏 수리하고 제작해 왔던 공을 감안하여, 교수형 대신 3개월간 해군 전함 무상 수리·보수를 명령받았다.

김성곤은 해군 장교와 병사들에게 항상 식사와 음료를 제공해 왔던 공로를 감안하여, 목숨은 살려주지만
오션 뷰 카페는 몰수당한다.
카페 전체가 스페인으로 압송되며, 성곤은 자신의 터전을 빼앗기고 쓸쓸히 끌려갔다.


항구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았다.
규만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고, 성곤은 마지막까지 카페 간판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속에는 한 가지 생각만이 맴돌았다.


“이 모든 화근은 결국... 블랙 코메트와 크림슨 크로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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