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제국 독로국(瀆盧國)

시인의 문화기행

by 김백


3화 미지의 제국 독로국(瀆盧國)



— 사자의 지붕 위에 집을 짓다


숲 속의 성채는 한낮의 태양 아래 눈부셨다. 굳이 성주의 초대는 없었으나 마음이 먼저 성안으로 들어섰다. 잘 정비된 동래읍성, 마지막 함락의 오욕에 저항하며 초개같이 목숨을 던진 아비규환의 그림자가 늦여름 나뭇잎처럼 나풀거린다. 동래읍성 성곽을 울타리 삼아 서남쪽 도심을 바라보고 우뚝 서 있는 복천박물관. 석조건축의 견고한 이미지가 오랜 전장에 나간 부재의 성주를 기다리는 고고의 요새처럼 보였다.

복천동 고분군은 박물관 건물과 구름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남쪽 마안산 구릉에 반달 모양으로 분포돼 있었다. 인류는 삶을 영위하면서 어딘가에 그들의 흔적을 남겨 놓는다. 그 흔적들은 때로는 느닷없이 우리 앞에 나타나 찬란한 역사가 되기도 한다. 복천동고분군이 바로 그런 곳이다.

복천박물관은 복천동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을 중심으로, 삼한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 부산의 역사를 보여주는 고고학전문박물관이다. 복천동고분군에서 출토된 풍부한 유물과 다양한 무덤 양식은 아직 미지의 왕국으로 남아 있는 가야의 신비를 푸는 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이웃 일본 고대문화의 원류를 규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도 평가되고 있다.


▶ 흙이 노래를 품을 때, 역사는 깨어난다.


부산 동래구 복천동 일대는 60년대 말까지만 해도 산비탈을 따라 판잣집들이 옹기종기 들어선 난민촌이었다. 6·25 전쟁의 포성을 피해 남으로 남으로 밀려 이곳까지 내려온 피난민들이 이곳에다 터를 잡고 소위 루삥지붕 밑에서 애환을 달랬다. 빈손 들고 갈 곳 없는 난민들은 구릉지 어디라도 빈 땅만 보이면 하늘 한 평 땅 한 평의 집을 짓고 정착했다.

그러나 그들이 고단한 삶의 짐을 부려 놓은 이 일대는 사라진 제국(AD 2세기 ~ AD 7세기)의 사람들이 살다 간 천 5백 년 흔적이 묻힌 땅이었다. 그런 사실을 알 수 없는 난민들은 사자(死者)의 지붕 위에다 다시 집을 짓고 가난한 일가를 이루며 살았다. 부산시가 이 무허가촌 일대를 정비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1969년, 부산시는 복천동 구릉지의 무허가 판자촌 일대를 정비하기 위해 땅을 주민들에게 불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개발 바람이 불었다. 어지럽게 널브러진 판자촌을 밀어버리고 반듯한 집을 짓기 위해 중장비가 동원됐다.

굴착기가 판자촌을 밀어붙였다. 그런데 육중한 굴착기가 허방을 짚듯 힘을 쓰지 못하는 일이 발생했다. 굴착기가 땅속을 헤집자 곳곳이 마치 거대한 벌집처럼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토기 조각이 굴착기 팔 끝에 걸려 나왔다. 공사는 4일 만에 중단됐다. 그사이 이미 많은 토기가 유출됐다. 당국은 유출된 토기들을 회수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부산복천박물관.jpg 복천 박물관



▶ 잠든 왕국의 문을 열다


동아대학교 박물관조사팀이 복천동 1호분을 발굴했다. 부산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금동관과 다량의 철제유물이 출토됐다. 이때부터 이 일대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다음 해 4월 고분군 아래 구릉에 있는 법륜사 경내에서 5세기 후반께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수혈식석곽묘 1기가 더 발견됐다. 그 후 70년부터 72년 사이 9기의 고분이 산발적으로 발견되고 74년 9월 구릉 아래쪽 사면에서 3기의 분묘가 부산대학교 박물관조사팀에 의해 발굴됐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고분군의 전반적인 규모나 성격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부산시는 80년 고분군이 분포해 있는 구릉 일대에 대한 택지조성 계획을 세웠다. 공지로 남아 있던 구릉의 북쪽 정상부를 중심으로 유구 확인을 위한 시굴 조사가 이뤄졌다. 시굴 조사 결과 이 일대가 대규모의 분묘 유적일 가능성이 제기됐다. 따라서 복천동 고분군 제1차 발굴 조사가 실시되고 이 지역이 대규모의 삼국시대 고분군임이 확인되었다.

목곽묘라는 새로운 묘제가 확인되고 마구류와 철갑옷 등 수많은 철제유물이 발굴됐다. 목곽묘는 2세 기대의 널무덤(목관묘)에 이어 4세기 대에 나타나는 것으로 다량의 유물을 부장 하기 위해 사자의 무덤 곁에 또 하나의 무덤을 만든 덧널무덤을 말한다.


▶ 철의 나라, 갑옷의 무덤들


지금까지 이곳에서 10여 차에 걸쳐 조사된 고분은 모두 191기로 말머리 모양 뿔잔을 비롯해 토기, 무기, 갑옷, 금동관, 덩이쇠 등 1만 2천 점이 넘는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이것들은 당시 빈약한 가야사 연구와 고대 한일(韓日) 관계 규명의 획기적 자료가 됐다. 또한 유물의 보존 상태가 양호해 삼국시대의 고고학적 연구와 고대사 해명에 중요한 유적임이 입증됐다.

복천동 고분군은 81년 사적 273호로 지정됐다. 이때부터 부산시는 도시정비계획을 수정, 주민들을 이주시키는 한편 연차적으로 부지를 매입하고 유적을 보존관리하게 됐다.



✦ 사라진 제국의 지붕 아래


창문마다 다른 햇살이 드나들고

아이들의 웃음이 무덤 위를 지난다

밤이면 별들이 내려와

성채의 잠을 비추고

흙에서 피어난 꿈이 아침을 열어젖힌다

삶은 사자의 지붕 위에서

다시 피고

다시 지고

도시의 불빛은

사라진 발자국과

사라진 제국의 시간을 기억한다



철의 문명, 복천동이 증언하다


복천동 고분군은 경주의 고분군 다음가는 남부지방 최대의 고분군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경주의 대형 묘 다음으로 많은 양의 유물이 나왔고 그 종류도 다양하다. 특히 철제유물이 많은 것이 특징적이다.

대형의 목곽묘와 수혈식석곽묘에서 예외 없이 갑옷과 투구들이 나왔다. 1기의 분묘에서 세벌 이상의 갑옷이 나오기도 했다. 지금까지 한반도 전역에서 조사된 고분군 가운데 갑옷이 가장 많이 나와 고대 남부지방의 정치 상황과 국제관계를 규명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복천동 고분군



이곳에서 발굴된 각종 유물의 편년은 4세기 전반부터 6세기 후반까지 이른다. 말하자면 가야의 유물과 신라의 유물이 혼재해 있는 것이다. 특히 4세기 후반부터 5세기 전반까지의 함안(咸安) 토기와 왜계(倭系) 토기, 그리고 5세기 후반대의 창녕(昌寧) 토기가 발견됨으로써 이들 지역에 존재했던 사라진 가야제국의 실체를 가늠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다. 모든 분묘에서 발견된 5세기 후반 이후의 전통적 신라계 토기는 부산 지역의 가야가 멸망하고 신라의 지배로 편입되어 가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복천동 언덕에 서면, 아주 먼 옛날의 쇳물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바람이 흙의 틈새를 헤집으며 풀무의 숨결처럼 뜨겁게 오른다. 이곳 사람들은 흙과 불과 쇠를 다루며 세상을 바꾸었다. 투구를 쓰고 말을 달리던 젊은 전사의 숨결이, 지금도 언덕 어딘가에서 미세한 울림으로 남아 있는 듯하다. 고대의 철 문명은 그렇게 이 땅을 달구며, 오늘의 부산을 빚어냈다.

고대의 동래 지역은 어느 국가에 속했는가?'는 고대사 연구자들 사이에서 늘 안갯속의 의문이었다. 인접한 김해나 양산 지역에 비해 결코 소홀할 수 없는 지역임에도 그만큼 사료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급격히 도시화해 버린 것도 한 원인이기도 했지만.

그러다 근세기 들어 부산 지역에선 유일하게 6세기 이전의 지배자 계층의 무덤이 확인되고 체계적으로 나타난 유구와 유물의 변화를 통해 이 지방 지배계층의 성격과 상충 문화를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게 됐다. 따라서 동래 지역을 중심으로 한 당시의 국내외적인 정치, 군사 관계와 문화 수준까지도 가늠해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제국의 노을


수영강에 저녁이 내리면
강물은 붉게 타오른다


전사들의 핏물인가
제국의 불빛인가


바람이 스치면
무덤의 돌비석마다
저물녘 숨결이 번쩍인다


붉은 빛살이
천오백 년 깊은 잠을 흔들고 있다



상고(上古) 시대 한반도 남부에 번성했던 부족사회를 통칭 삼한(三韓) 시대라 한다. 마한(馬韓), 변한(弁韓), 진한(辰韓)의 연맹국이다. 삼한에는 모두 78개의 소국이 속해 있었다. 그 후 마한의 백제국이 백제로, 변한의 구야국이 가야로, 진한의 사로국이 신라로 발전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고대사를 보면 변한 은 마한의 동쪽과 진한의 남쪽에 위치, 12개의 작은 부족 국가로 형성돼 있다. 그 12국은 미리미동국, 접도국, 고자미동국, 고순시국, 반로국, 낙노국, 미오야마국, 감로국, 구야국, 주조마국, 안야국, 독로국이다. 서쪽으로는 지리산, 북쪽은 가야산, 동쪽은 낙동정맥을 경계로 하고 있다. 각국에는 신지(臣智·군주)를 정점으로 험측, 번예, 살해, 읍차 등 단계의 신분이 서열화돼 있다.

당시 동래는 변한의 독로국(瀆盧國)에 속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학계에선 독로국이 존재했던 위치가 현재의 거제도 사등성이라는 설과 동래라는 두 가지 설이 맞서고 있다. 삼국지 위지(魏誌)에는 독로국의 위치가 왜(倭)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甘瀆盧國與倭接界)고 기록돼 있다. 때문에 바다를 끼고 왜와 가까운 거제도와 동래 두 지역을 두고 꼭 집어 결정짓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노포동과 복천동에서 독로국이 존재했던 시기의 유적들이 다량 나타남으로써 동래설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동래라는 지명도 독로- 동네- 동래로 음전돼 왔다고 한다.

▶ 금관가야의 붉은 쇠, 신라의 그림자


가야제국의 역사는 4세기대와 5세기 전반기 낙동강 하류 지역의 금관국을 중심으로 한 전기 가야와 5세기 후반 멸망한 고령의 대가야가 맹주로 군림했던 후기 가야로 나뉜다.

전기 가야의 맹주로 활약했던 금관국은 김해 대성동 유적에서 드러났듯이 풍부한 철을 바탕으로 중국 일본과 활발한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했다. 동시에 강력한 군사 집단으로 성장했다. 같은 시기의 복천동 유적에서도 김해 대성동 유적에 버금가는 국력과 문화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강성했던 금관가야도 4세기말~5세기 초에 이르러 고구려의 남하정책으로 변화를 맞게 된다. 고구려와 백제 사이의 패권 다툼에서 백제가 패하고 고구려 광개토왕의 군대가 낙동강 하류까지 남진, 가야를 토벌함으로써 금관가야는 그 세력이 약화된다.

고구려의 후원으로 급성장한 신라는 5세기 후반 들어 독자적으로 금관국을 비롯해 낙동강 하류 지역의 전기 가야연맹 세력들을 영향권 내로 편입시킴으로써, 이 지역의 가야 세력들은 사실상 와해한다.

김해, 동래, 양산 지역의 금관가야는 일찍부터 중국과 일본을 연결하는 교역의 중심지였다. 풍부한 철 생산으로 강성했던 이 지역은 신라와 백제로부터 끊임없는 영토 확장의 공격목표가 되었다. 그러다 점차 강성해진 신라 세력의 영향권으로 들어가게 된 것.


▶ 안개처럼 사라진 제국의 사람들


후기가야연맹 역시 백제의 강압과 회유로 대규모의 백제. 가야 연합군을 구성 신라와 맞섰으나 관산성(옥천) 전투에서 크게 패해 쇠퇴의 길로 접어든다. 이 같은 신라와 백제의 틈바구니에서 가야연맹 제국들은 하나의 통일된 집권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하나둘씩 멸망했다.

고분의 봉분 사이로 바람이 지난다. 쇠붙이의 녹슨 빛이 풀잎에 스며 있고, 이름 모를 새들이 묘역 위를 스친다. 누군가의 웃음과 울음, 사랑과 이별이 흙으로 돌아가 이제는 돌과 바람의 언어로 남았다. 역사는 그렇게 사라지지 않는다. 땅은 기억하고, 강은 흘러가며, 시간은 우리를 그 기억으로 되돌려 놓는다.

금정산에서 사냥하고 회동천과 온천천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삶을 영위했던 2천5백여 년 전 미지의 독로국 사람들은 수영강 짙은 안갯속으로 아스라이 사라져 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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