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도 天馬圖

시인의 문화기행

by 김백


제7화 - 천마총 (天馬塚) 下



■ 담장밖에서부터 시작되는 시간여행


경주는 언제 찾아가도 포근한 도시다. 대릉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담장 밖 시가(詩歌)의 거리를 걸었다. 잘 다듬어진 화강석담장이 바둑무늬처럼 정갈하다. 심신을 수련하던 왕족들의 바둑판이 저랬을까?. 담벼락에 즐비하게 걸린 시편들이 걸음을 세운다. 담장밑을 걸어가며 한용운도 만나고 김소월도 만난다. 목월의 술 익는 마을도 있고 동리의 갈대밭도 있다. 담장 너머 나지막이 보이는 기와집들이 더없이 단아하다.


■ 신라의 자궁, 고분 사이를 걷다


대릉원 넓은 숲을 지나 천마총 가는 길. 나뭇가지를 타고 놀던 멧새들이 포로록포로록 길을 안내한다. 고분과 고분 사이 풍만한 곡선을 따라 걷는 걸음은 느긋하다.

빽빽이 늘어선 숲길을 걸으면서 러시아 설원에서 만났던 자작나무숲을 생각했다. 천마총에서 가장 유명한 천마도(天馬圖)가 자작나무껍질에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핀란드 국경을 넘던 날 폭설이 쏟아졌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출발한 시벨리우스 열차는 뱀처럼 눈 속을 파고들었다. 철길을 따라 도열한 나무들이 하얀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더 이상 갈 곳 없는 백야의 땅에서는 태양도 길을 잃고 주저앉는다. 세상 끝까지라고 우겨대던 사랑도, 모든 것은 그대로 선 채 밤이 된다. 누군가가 밑줄 그어 접어 둔 자작나무 책갈피를 열고 몇 줄의 시를 읽다가 낯선 문장을 만나 잠들기 전엔 낮과 밤의 경계는 모호하다. 5월의 새벽은 밤새 품었던 안개들을 슬금슬금 놓아주고 있었다. 얼음 호수 언덕 위 사우나에도 낯선 안개는 자욱하다 자작나무 회초리로 나신 裸身을 때리며 별리의 꿈을 좇는 사람들, 타닥타닥 영혼을 후려치는 소리, 언젠가 해인사 숲길 걷다 엿듣던 죽비소리


편지를 쓴다

타닥타닥 자판을 두드리며 수취인 없는 편지를

자작나무 타는 냄새가 난다

그녀 입안에 맴돌던 자일리톨 향기가 난다


# 시벨리우스 열차: 러시아에서 핀란드 국경을 넘나드는 정기열차.

# 자작나무: 팔만대장경 판재. 자일리톨 향 추출


- 졸 시 「자작나무 숲에 들다」




■ 영혼이 오르는 나무


옛날 개마고원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자작나무껍질에 싸서 묻었다. 시베리아 무속에서 샤먼들은 죽은 자의 영혼이 하늘의 신과 만나기 위해 자작나무 사다리를 타고 오른다고 믿었다. 따라서 천마총에서 발견된 자작나무 수피로 만든 천마도장니(天馬圖障泥. 마구)가 북방 기마민족 무속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것이다. 자작나무에 대한 샤머니즘적 흔적은 오늘날 무당의 굿판에서 이 나무의 흰 꽃이 사용되는 것에서도 볼 수 있다.

시베리아 여행길에서 본 자작 나뭇가지로 나신을 때리며 주문을 외우는 사우나 안의 풍경이나 카이로박물관 파라오 관속에 든 ‘사자(死者)의 서(書)’가 자작나무껍질에 쓰였다는 점, 이런 것들이 샤머니즘적 사고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 문자는 나무에 먼저 새겼다


신라 고분 가운데 금령총과 양산부부총에서 자작나무껍질로 만든 모자가 나온 적이 있다. 신라시대 고분이나 석탑 등에서 자작나무껍질에 그림이나 불경이 쓰인 것은 불교 시대 이전의 자작나무 신목(神木)의 한 형태라 할 수 있다.

불교학에서 필사본 연구는 중요하다. 기본적으로 불교사에 관한 많은 정보가 수록돼 있고 역사적으로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불교 경전이나 불교에 관한 문헌들은 필사본을 기초로 해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인도의 인더스강과 그 주변 지역에서 문명을 발전시킨 인도 민족은 종교를 중시했다. 그들은 종교에 대한 기록 재료로 나뭇잎이나 돌, 상아, 천 등을 사용했다. 특히 자작나무껍질과 잎을 이용한 패다라를 주재료로 불교 경전을 기록, 보관했다. 이것이 바로 패엽경(貝葉經)이다. 합천 해인사 팔만대장경 판재도 자작나무다.


■ 도시는 무덤 위에 세워졌다


경주시는 황성동 대릉원의 천마총 일대를 세계적으로 유일한 고분 공원으로 조성했다. 이곳에는 신라 5~6세기 왕릉급 고분 30여 기가 밀집해 있다. 천마총은 경주 시내에 산재한 1백56기의 대형 고분 중 금관총, 금령총, 서봉총에 이어 네 번째로 금관이 출토된 고분으로 광복 후 최초로 국내 학자들에 의해 발굴된 곳이다. 발굴 당시 순금관을 비롯해 수많은 유물과 백마가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나는 천마도가 발견돼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유물이 됐다.


흥미로운 사실은 천마총 발굴은 다른 큰 규모의 고분을 발굴하기 위해 시험 발굴된 이름 없는 민무덤이었다는 점이다,

우리 경제는 70년대 들면서 고도로 성장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순수 민족문화유산의 보존에 대한 인식도 높아지게 됐다. 정부도 민족문화유산이 집중된 경주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경주관광종합개발 10개년 계획'을 수립. 문화재 복원보수와 유적지 주변 경관을 정비하고 도로를 신설하는 등 대역사를 시작했다.

이 대대적 사업 일환으로 신라 13대 임금이었던 미추왕의 능을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분포된 수십 기의 대형 고분들을 새롭게 정비해 고분 공원으로 조성한다는 계획이었다. 이 계획에 따라 이들 고분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황남대총(98호분)을 발굴, 학술 전시용으로 꾸밀 예정이었다.


그러나 국민의 관심이 집중된 황남대총 발굴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이고 성공적 발굴을 위해선 다른 고분 하나를 시험 삼아 발굴할 필요성을 갖게 됐다. 이때 선택된 고분이 봉분이 심하게 훼손된 155호분 천마총이었다. 98호분 발굴에 앞서 시험 발굴한 고분에서 뜻밖에도 금관을 비롯해 1만 1천5백여 점의 유물이 산더미처럼 쏟아져 나온 것이다. 이때 마구(馬具)에 천마가 그려진 희귀한 그림이 나왔다. 따라서 고분의 명칭을 천마총이라고 명명했다.


■ 하늘이 반대한 발굴 작업


천마총 발굴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73년, 그해 여름은 유난히 무더운 날씨가 이어지고 있었다. 거기 다 가뭄까지 겹치고 있어 시민들 사이엔 “왕릉을 파헤치고 있기 때문에 하늘이 노했다.”라는 흉흉한 소문까지 돌았다. 시민들은 “발굴 작업을 즉각 중지하라”며 항의했다. 그럼에도 발굴 작업은 진행되었고 드디어 그해 7월 26일 천년의 침묵을 깨고 금관이 출토됐다.


그러나 무덤 주인의 시신은 어디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노출 당시 금관, 요대등 유물의 위치상 신라의 한 제왕(帝王)의 무덤이었을 것으로만 추정했을 뿐이었다.

발굴 요원들이 금관을 들어내는 순간 뇌성벽력이 치고 폭우가 쏟아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천재지변으로 사람들은 망연자실했다. 하늘은 발굴 작업을 중단시킨 채 일주일이나 비를 뿌렸다. 1백여 일간 작업에 지친 발굴 요원들은 악몽에 시달리기도 했다.

천마총 유물이 수습되고 유구 조사가 마무리됐을 때 요원들은 심한 허탈감에 빠지고 말았다. 출토된 그 많은 유물 가운데 무덤의 주인이나 내력을 밝힐만한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고작 명문(銘文)이라곤 칠기 잔 표면에 새겨진 동(童) 자가 하나뿐이었다.


■ 특종 앞에서 인간은 조급해진다


천마총 발굴 작업이 계속되면서 발굴 요원들의 열기 못지않게 뜨거웠던 것은 기자들의 보도 경쟁이었다. 요원들의 손길이 고분의 심장부를 향해 조심스럽게 접근해 가는 동안 현장을 지키는 기자들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출토 유물에 대한 사전 발설 금지’는 발굴요원들의 불문율이었다. 따라서 특종을 노리는 기자들은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게 된다. 학연, 지연, 심지어 단순 역의 노무자들까지 매수하는 등 무슨 첩보전을 방불케 했다.

당시 낌새를 알아차린 모 일간지 기자는 ‘천마총 금관 출토’라는 급보부터 띄웠다. 그리고는 곧장 경주박물관으로 달려가 이미 오래전 다른 고분에서 발굴된 금관을 촬영해서 보도하는 기막힌 에피소드도 있었다.


■ 왕의 금관, 권력과 조우하다


천마총 발굴에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1천4백여 년 전 신라국의 국왕과 현직 대통령의 조우였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발굴 조사가 한창 절정에 이른 7월 3일 현장을 방문, 관계자들을 격려했다. 박대통령은 그 후, 창원성산패총, 경주황룡사지 발굴 현장을 방문하는 등 우리의 문화 유적에 지대한 관심을 나타냈다.

거기다 지난 APEC 경주 회의 때 트럼프 대통령도 금관을 선물 받고 원더풀을 연발했다. 이때 트럼프가 받은 금관도 천마총 금관을 모방해 장인이 만든 재현품이었다. 이처럼 천마총 금관은 신라의 왕에서부터 현세의

대통령들과 인연을 맺은 셈이었다


■ 한 장의 그림이 증언하는 것

.

천마총 발굴 조사에서 무덤의 주인공은 밝혀내지 못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발굴한 금관총 이후, 금관과 수많은 유물이 발굴된 점, 지표면에다 덧널을 놓고 냇돌을 쌓아 그 위에 봉분을 만든 새로운 묘제 형식이 밝혀진 점 등은 고고학적으로 높은 성과로 꼽힌다.

또한 무엇보다 가장 큰 수학은 말다래에 천마가 그려진 천마도의 발견이었다. 말다래는 말을 탄 사람의 옷에 흙이 묻지 않도록 말안장 양쪽에 길게 늘어뜨린 마구(馬具)다. 그런데 여기에 백마가 흰 구름 위를 훨훨 날고 있는 사실적 그림이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신라의 화가 솔거가 “황룡사 벽에 소나무를 그렸다. 나뭇가지에 새가 앉으려다 벽에 부딪혀 떨어졌다”는 기록(삼국유사)이 있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당시의 그림은 한 점도 전해지지 않고 있다. 이런 점에서 천마도의 발견은 고신라 당시의 회화 수준을 증명할 수 있는 획기적인 사료로 평가되는 것이다. 천마는 아직 날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