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나무 Oct 05. 2023

더블유와 브이

플랫폼에 선 W는 V를 떠올리기 시작했다.

이제 너를 펴볼 수 있을 것 같다.


뒤죽박죽한 것들은 대체로 거대하고 울퉁불퉁하다. 군데군데 파인 곳과 모서리진 곳을 번갈아 만지다 보면 기필코 손을 베인다. 그럼에도 다음에 같은 장소에서 베이고 싶지 않다면 지금 이것들을 펴놓아야 하고, 그러나 너무 무리하지는 않아야 한다. 순서까지 맞추려 애쓰는 일은 다시 W를 지치게 할 것이고, 지치고 피곤한 사람은 대체로 실수를 저지르니까. 그러니 W는 올 것은 오고야 말고, 해야할 일은 결국 하게 돼 있다는 담담하고 지루한 마음으로 구겨뒀던 것들을 하나씩 펴놓기 시작했다. 가지런히 피거나 순서대로 정리하겠다는 결심 같은 것은 없이.

목포에서 출발한 기차가 도착했다. 지체 없이 서울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간다고 해야 하나, 집을 떠난다고 해야하나. V를 만나러 숱하게 오고 갔던 이길 안에서 W는 아직도 정하지 못한 마음들이 많다. 떠나는 걸까 향하는 걸까, 아니 그 둘은 원래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이었던가, V와 함께 기차를 기다릴 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 광주에 사는 V에게서 멀어지는 일은 W를 어렵게 하는 것들로부터 잠시 해방이라는 걸 뜻했다. 세상에서 가장 무질서한 곳, 그래서 거짓말을 해도 혼나지 않는 W의 방으로. 그러나 멀어짐이 한달을 넘어가면 W는 다시 V에게 돌아가고 싶어졌고, 그때가 되면 W는 어느새 V가 있는 도시를 집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집에 가고 싶다. 보고 싶다. 우리 전시보러 가자, 맛있는 거 먹자. 날씨가 너무 좋더라. 수화기 너머로 내가 그런 말을 할 때 너는 무슨 마음이었을까. 너는 나랑 또 어떤 것들을 하고 싶었을까,

W는 철지난 생각들을 했다.


기차에서는 보름에서 하루쯤 멀어진 달의 어두운 분화구들을 오래 바라봤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명절날 마지막 밤이었다. 우리가 같이 달을 본적이 있던가, 오늘의 달은 보름달을 닮았지만 언젠가 우리가 봤던 달은 초승달을 닮았던 것 같다. 손톱 같다. 아, 손톱 깎아야 하는데. 귀찮다. 고양이는 손톱 안깎나? 고양이 발톱은 자랄만큼 자라면 더 이상 안 자라. 아 정말? 부럽다.

전부 오래된 이야기였다.


그러나 사실 오래지 않은 이야기였다. 움직이지 않는 것 안에서 시간은 흐르지 않으니까. 시간은 운동이다. 그날 전화를 끊고부터 W의 어떤 부분들은 거의 운동하지 않았다. 어떤 부분들은 매몰차게 뻗어나가 만나고 부딪고 엉키고 끊어지고를 변주하는 동안에도. 그러니 W의 어떤 부분들은 아직도 V와 함께 있다. 그것들은 W도 모르는 사이 V와 부딪고 엉키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아마 영원히 그럴 것이다.


V에게도 오늘이 있었을 것이다. V는 무얼하면서 그날을 넘었을까. W는 돌아오려는 V를 상상하곤 했다. 그런 날은 이미 몇번이고 있었다. 그럴때마다 W와 V는 지금이 그때보다 더 나아, 그렇지 않나? 하는 생각을 애써 오래 했을 것이다.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는 일은 그 둘 사이의 어떤 새로운 결합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리운 마음은 막을 수 없다고 인정하자 비로소 그 둘은 연결되기 시작했다. W가 과거라고 부르던 것들이 마침내 지금여기로 흘러오기 시작한다. 뒤죽박죽하고 울퉁불퉁한 것들이. 이것들은 다시 어디선가 부딪고 깨지고 새롭운 연결을 거듭하겠지. 당최 알 수 없이 구겨진 것들을 일단 이곳에 데려오길 잘한 것 같긴 하다고, V를 펴며 생각했다.

창문 위로 노란색과 오렌지색이 경계없이 펼쳐진 평면이 보인다. 슬프고 따뜻한 기분은 외로움이었다. 그리고 평온이었다. 네가 좋아하던 노란랗고 붉은 평면은 참 슬프다고 언젠가 V에게 말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W는 철지난 현재를 살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