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의 평가 속에서 나다움을 유지하는 법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평가를 받으며 사는가?
원하든 원치 않든, 간적접으로든 직접적으로든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다 보면 피할 수 없이 받게 되는 크고 작은 평가들.
누군가에게 받는 '평가'는 아주 작고 사소한 것이라 한 시간 후면 까먹어 버리는 그런 평가가 있을 수도 있지만, 어떠한 '평가'는 인생의 진로를 결정할 만큼 한 사람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도 있고, 누군가의 마음을 날카로운 칼로 도려내는 무서운 무기가 될 수도 있다.
문제는 이 '평가'가 주는 사람의 생각이나 의도와 전혀 달리 받는 사람에게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렸을 때 나는 그림 그리는 것을 참 좋아했다. 그림 그리기는 나 말고도 웬만한 유치원생들이라면 다 좋아하는 것 아니었을까 싶다. 어린아이만이 가지고 있는 넘치는 상상력과 창의력을 표출해 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수단 중 하나가 '그림 그리기'니까. 장래희망이 뭐냐고 물어보면 언제나 주저 없이 '화가'를 적고는 했던 나는 유치원이 끝나면 방과 후 수업으로 그림 학원을 다녔다. 그 날은 사생대회였는지 밖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나는 시소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때 그림 학원 선생님이 내 옆에 다가와 그림을 홀깃 보더니 말씀하셨다.
'어머, 너는 이거를 왜 이렇게 그렸니? 너 조금 특이하구나, 호호호'
솔직히 말하면 정확히 그때 내가 무엇을 그렸고 선생님이 정확히 무슨 말을 했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때 그 평가는 어린 마음에 상처를 주기 충분했고, 그 이후로 그림 그리기를 '증오'하기 시작했다. 초등학생 때는 울면서 미술 과제를 들고 와 엄마에게 대신해달라고 징징거렸고, 중고등학생이 되고 나서는 미술시간이 되면 주변 친구들에게 구걸을 해가며 대신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하기 일쑤였다. 그렇게 나는 내가 제일 좋아했던 그림 그리기와 드라마틱하게 멀어졌다.
내가 소심해서일 수도, 옹졸해서 일 수도 있지만 유치원 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을 두고 받은 평가는 아직도 종종 내 기억 속에 소환되고는 한다.
그리고 가끔 생각한다.
그때 왜 그 선생님은 그 말을 유치원생인 내 앞에서 했어야 했을까?
이 외에도,
초등학생 때 내가 부르는 노래를(국악풍의 노래였다) 들은 한 엄마가(내가 초등학생 때 짝사랑했던 남자아이의 엄마다)
'얘는 노래 취향이 조금 특이한 거 같아요, 호호호'라고 우리 엄마한테 하는 이야기를 우연히 듣고 상처 받은 기억이 있는가 하면,
원고지에 띄어쓰기며 맞춤법 신경 쓰며 글 쓰는 것을 너무나 싫어했던 내게 글쓰기 선생님이
'너는 글을 참 짜임 있게 잘 쓰는 것 같아.'라고 해준 한 마디에 글쓰기 학원에 가는 것이 세상 신나는 일이 되기도 했다.
고등학교 때는 어버이날 부모님께 쓴 편지를 부모님이 눈물을 훔치며(평소 그런 분들이 아니다) 읽으시면서,
'너는 글을 정말 잘 쓰는 것 같아.'라고 칭찬해 준 덕분에 지금까지 어디 가서 글 쓰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다닐 수 있게 만들었다.
좀 더 객관적으로 유치원 때 그 상황을 떠올려 본다. 어쩌면 그때 유치원 그림 학원 선생님은 '지나가는 말로' '아주 가볍게' '농담'으로 그 말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내가 기억하는 것처럼 직접적인 '단어'들을 사용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지 '평가'라는 단어가 무겁다 못해 무섭게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가볍게 한 말인데, 누군가의 인생에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으니까.
진실이 어찌 되었건 간에 만일 유치원 때 내 그림에 대한 그런 평가를 받지 않았더라면 나는 다른 인생의 길을 걷고 있었을까?
그림 그리는 것을 계속해서 좋아하며 그림 그리는 직업을 갖겠다고(실제로 소질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뜬 구름을 잡고 있었을까?
그렇다면 있는 사실 그대로 말해주어 일찌감치 뜬구름 잡지 않는 인생을 살 수 있게 해 준 그때 그 그림 유치원 선생님께 고마워해야 하는 것일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꼭 잘하는 것만 해야 할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그 결과물이 남들이 비해 좀 떨어진다고, 좀 특이하다는 이유로 내가 재밌어하고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것을 하지 말아야 하는 법은 없지 않은가?
해외에서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8년 넘는 시간을 살아가고 생존경쟁을 위한 사회 물을 제대로 먹은 지금에야, 누가 나한테 지나가는 말로 하는 평가 따위는 '흥! 지가 뭔데?'라고 가볍게 넘겨버릴 수 있는 짭밥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누군가 - 특히 내가 평소 좋아하는 사람이 주는 평가는 큰 상처가 되기도 하고, 인생을 살아가는데 좋은 동기부여가 되기도 한다.
이런 거 보면 '나의 소심함'이 문제인 것 같기도 하다.
아가아가할 때부터 춤추는 것을 참 좋아했던 우리 조카는 나를 포함한 우리 가족들의 객관성을 가장한 이런저런 평가와 농담을(이렇게 보니 나도 그림 유치원 선생님보다 더하면 더했지 똑같다) 깔끔히 무시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춤추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고, 지금은 정말 아이돌 태가 나게 춤을 춘다. 이런 조카를 보고 있으면 내게는 부족한 조카의 열정과 뚝심이 존경스러울 정도다.
대중가요의 큰 획을 그은 서태지도 첫 공연 때 '음악 평론가'들한테 온갖 비판을 받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거장 화가 반 고흐는 생전에 오직, 단 하나의 제품만을 팔았을 정도로 살아생전 최악의 저평가를 화가였지만 멈추지 않고 계속 그림을 그렸다.
무시하고 싶어도, 듣고 싶지 않아도 앞으로도 살면서 끊임없이 크고 작은 평가를 받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이라면, 내가 꼭 해보고 싶은 것이라면 남들의 부정적인 평가는 고맙지만 '감사히'만 받고 나만의 뚝심을 갖고 걸어가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꼭 잘하는 것만 해야 할 필요는 없으니까.
넌 못할 거란 말 절대 귀담아듣지 마.
그게 아빠인 나더라도 말이야.
꿈이 있다면 그것을 지켜내야 해.
- 영화 '행복을 찾아서' 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