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맑은 베니의 눈동자에 반했던 것 같다.
커다란 등치와 달리 고집 한 한점 보이지 않는 말간 얼굴과 맑은 눈동자는 꼭 새하얀 강아지, 사모예드 같았다.
대학교 4학년, 졸업을 유보하고 떠난 호주 워킹홀리데이에서 우리는 만났다. 취업을 위해 영어를 배운다고 온 한국의 어느 철없는 20대 여학생과, 요리 일을 배우겠다고 온 독일의 어느 20대 청년은 접점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한국의 그 여학생은 호주 어학원 친구들과 함께 간 스테이크가 저렴하다는 레스토랑 겸 펍에서 독일에서 온 그 청년을 처음 마주하게 되었다. 그날은 그 청년이 시드니에 온 첫날이었다. 시시껄렁하게 말을 건네오는 남성들 뒤로, 바테이블에 우두커니 앉아 함께 온 친구들의 뒤통수만 쳐다보고 있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서양인은 무서운 늑대 같은 사람이라며 겁을 주던 엄마 덕분에 이태원 근처도 못 가 보았던 그 한국의 여학생은 도대체 무슨 정신이었는지, 독일에서 온 청년에게 시드니 시내를 보여주겠다고 했다. 일일 관광 가이드를 자처하며 다음 날 오후 맥도날드 앞에서 만나자며 호기롭게 약속을 잡았다. 술이 들어가 조금 취한 탓도 있었지만, 그의 맑디 맑은 눈동자 탓이 더 컸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그때 어떻게, 왜, 너한테 시드니를 보여주겠다고 했는지 이해가 안 가. 나 그때 서양인 울렁증 있었는데 말이야."
"나는 네가 다음 날 맥도날드 앞에 나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너같이 아름다운 사람이 날 만나줄리 없다고 생각했거든."
나의 남편이 된 그때 그 청년은 능구렁이 같이 느끼한 말을 이제는 눈하나 깜빡하지 않고 태연하게 한다. 나는 아직도 그날 일은 신이 이끈 기적이라고 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내 한글 이름조차 제대로 부르지 못하는 남자와 어떻게 연애를 하냐며 친구 이상의 감정을 애써 무시했던 나는 그의 진중함과 순수함에 반해 몇 개월 후 그와의 교제를 시작했다. 한참 후에 그와의 교제를 알게 된 엄마는 한국으로 당장 들어오라고 비행기 티켓을 구매했고, 나는 등 떠밀려 한국에 들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장거리 연애는 꽤 오래 지속되었다. 그는 한국에 와서 청혼을 했고, 나는 그의 반지를 받았지만 사실 엄두가 나지 않았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이제 막 직장생활을 시작한 20대 초반의 여성은 자신이 성인이라는 자각도, 엄마의 반대를 이겨낼 자신도 전혀 없었다. 때문에 그 무렵 해외 취업을 열심히 알아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외국에서 일을 하고 싶다는 꿈도 있었지만, 해외로 나가 일을 하면서 독립적인 여성이 되겠다. 그리고 나면 베니와 결혼하겠다. 이 역시 중요한 이유였다. 운이 좋게 중국 상하이 소재의 어느 스웨덴 기업의 면접에 합격했고, 우리의 장거리 연애는 약 2년 동안 계속해서 이어졌다. 하지만 대부분 장거리 연애의 끝이 그러하듯 우리는 결국 거리의 폭을 좁히지 못하고 헤어졌다. 사랑보다 일이 더 중요하다 생각하며 일을 하다 번아웃이 왔고, 외로움을 달래 보려 사람을 만나도 자꾸만 베니가 생각나서 허한 마음을 완벽히 채울 수 없었다. 쌓이고 쌓인 우울감으로 꽤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던 어느 겨울, 크리스마스이브를 하루 앞둔 12월 23일 저녁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지금 VPN을 켜고, 페이스북에 들어가서 만일 베니에게 최근에 온 메세지가 있다면 그에게 답장하리. 중국에서는 페이스북 접근이 차단되어 있기 때문에 페이스북을 들어가지 않은지 몇 년이 지난 차였다. 컴퓨터를 켜고, 무료 VPN서비스를 찾아 깔았다. 무료 서비스라 접속이 불안정했다. 서버를 바꾸어 가보며 안정된 서버를 찾아 페이스북을 열었다. 아이디, 비밀번호를 넣고 로그인. 메세지 함을 열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잘 지내고 있니?"
12월 23일 전날 밤에 베니가 보낸 메세지였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바로 답장을 했고, 베니에게 실시간으로 다시 답장이 왔다. 우리는 몇 번 메세지를 주고받은 후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에 긴 통화를 했다. 거진 6년 만에 다시 듣는 그의 목소리는 예전 그대로였다. 생각하는 것도 예전 그대로였다. 내가 좋아했던 그의 그 성품과 성격도 그대로였다. 다만 달라진 게 있다면 내가 좋아하지 않았던 아주 사소한 것들이 없어지고 더 멋진 남자로 성장했다는 것.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우리가 그동안 서로를 계속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것. 여전히 사랑한다는 것. 중국에서의 직장생활을 정리하고 나는 독일로 날아갔다. 우리는 이것을 우리의 크리스마스 기적이라고 불렀다.
너무 행복해서 눈물이 날 것 같던 결혼생활 5년을 꽉 채우고 한 달이 지나 베니는 뇌종양 수술을 했다. 일주일 넘게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맸다. 그리고 일반병실을 거쳐 재활 병원에 갔다.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은 것 투성이었지만, 감사할 것을 찾아보려고 노력했다. 느리지만 조금씩 회복하다 보면 언젠가 퇴원하겠지. 간절한 기대와 소망과 달리, 수술 봉합 부위에 자꾸 고름이 나오기 시작했다. 응급차를 타고 수술을 했던 대학 병원에 갔다. 상태를 본 의사는 수술 부위를 다시 열어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염증이 생겼는데 정도가 얼마나 심한지는 수술 부위를 열어봐야 할 것 같다고. 수술 후, 의사는 안타깝게도 염증이 꽤 깊숙이 침투해 버려 항생제 정맥 주사를 맞아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병원 인력이 부족해서 병원에서 정맥 주사를 놔주는 대신, 몸에 어떠한 기구를 투입하여 집에서 혼자 직접 항생제 주사를 맞으라고 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새로운 의료 시스템에 대한 팸플릿을 전해주고 직접 전화해서 문의해 보라는 병원 관계자의 말에 헛웃음이 나왔다. 베니와 같은 이유로 입원했던 남자는 염증이 생각보다 깊지 않아 항생제 약을 받고 퇴원했다. 병원 복도 건너편 다른 방에서는 환자와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속상했다. 누구는 약만 먹고도 문제없고, 누구는 수술이 무탈하게 잘 끝나고 즐겁게 웃고 있는데, 왜 우리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정말이지 그때는 더 이상 얼마나 힘들어져야 하냐고, 고생 끝에 진짜 좋은 날이 오긴 오는 거냐고, 최소한 약간의 희망은 주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늘을 향해 원망을 퍼부었다. 퇴원은 미루어지고 미루어졌다. 날은 점점 추워졌고 밤이 길어졌다. 비가 많이 오는 독일의 겨울이 이번 해에는 유독 더 어둡고 우울했다. 베니는 더 이상 재활병원에 있고 싶지가 않다고 했다. 다른 건 몰라도 크리스마스는 병원에 있고 싶지 않다고. 집에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했다. 나는 내심 불안했고 더 병원에 머무르기를 바랐지만, 베니의 마음도 이해가 갔다.
또 모르지. 크리스마스의 기적이 우리에게 다시 찾아올지.
수술을 한 대학병원과 달리 너무나도 친절하고 세심하게 환자를 보호해 주었던 재활병원 의료진, 간호사, 관계자 분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어서 초콜릿과 한국 라면, 마스크 팩들을 넣어 작은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비했다. 그간 주말마다 머물었던 마치 할머니 집에 온 것 같은 포근한 분위기의 호텔을 운영하던 주인아주머니께 드릴 선물과 감사 카드도 준비했다. 매해 12월 1일이 되면 베니는 어드벤트 캘린더(Advent Calender: 크리스마스를 카운트다운하며 즐겁게 기다릴 수 있도록 12월 1일부터 25일까지 매일 각기 다른 작은 선물을 매달아 놓는 달력)를 정성스레 손수 준비하여 나를 행복하게 해 주었다. 이번 해에는 내가 베니를 위해 어드벤트 캘린더를 만들어 선물해 주었다. 병원 벽에 걸어놓은 트리 모양의 어드밴트 캘린더를 보며, 베니가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들어오는 간호사와 의료진들에게 모두 자랑을 했다고 했다.
우리는 12월 24일을 카운트다운 하며, 그때까지 무탈하게 지내다가 퇴원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그리고 나는 속으로 크리스마스의 기적이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찾아오기를 기도했다.
12월 20일, 병원 이송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올 예정인 베니를 집 앞 골목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렸다.
도착할 때가 되었는데, 왜 이리 안 오지? 혹시 중간에 무슨 사고가 나는 건 아닐까?
이런저런 상상을 하며.
다행히도 베니는 무사히 집에 왔고, 문 앞에 걸어놓은 웰컴 글자가 쓰여있는 가랜드를 보고 세상 행복해했다. 행복해 하는 베니를 보고 따라 웃으며, 열심히 그의 사진을 찍었다.
우리에게 크리스마스의 기적은 찾아오지 않았다.
수술 직후보다 많이 회복했지만, 수술 중 손상된 신경은 그대로였다.
왼쪽 안면 마비, 눈 복시 현상, 청각 손상 - 모두 그대로였다.
네잎클로버가 행운이라면 세잎클로는 행복이라는 말이 있다.
큰 기적만 바라보다가, 결코 당연하지 않은 일상의 행복을 놓치는 바보가 되고 싶지 않다.
행운은 없었지만, 행복은 분명 여기 있다.
* 이 글은 주관적인 시각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의학적인 내용 등에 있어 사실과 다르게 알고 있거나 틀린 부분이 있을 수 있음을 미리 말씀드리고 양해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