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면담 이후, 두 손을 모아 애써 지켜보던 일을 향한 내 안의 불꽃이 훅 꺼져버렸다. 모든 것이 그 해 겨울밤처럼 차갑고 어두워졌다. 믿고 싶지 않았던 사실 - 나는 이곳에서 언제든 교체될 수 있는, 무명의 일하는 기계뿐이라는 것 - 이 이제야 선명하게 눈에 보였다. 새벽 5시 일어나서 회사로 향하는 출근길. 발걸음 하나에 한숨 하나. 차디찬 겨울 공기 사이로 뜨거운 한숨을 내뱉으며 출근을 하고 퇴근을 했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찾아간 병원에서 나는 또 엉엉 울어버렸고 의사는 3주 병가를 써주었다. 쉬어야 한다고. 산책도 하고, 자연도 보면서 쉬라고 했다. 독일에서 의사가 한 번에 써줄 수 있는 최장치의 병가 - 3주를 한 번에 진단받고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회사에 뭐라고 말하지?
이러다가 내가 죽겠는데도, 상사한테 뭐라고 말할지가 더 걱정되는 나 자신이 싫었다.
우울증이 찾아오기 전에 정신상담을 받아야 빨리 극복할 수 있다는 조언에 상담을 예약했다. 독일에서는 의사 소견서가 있으면 보험처리가 되어 상담을 무료로 받아볼 수 있다. 첫 상담은 과연 이 상담이 효과가 있을지 의문으로 끝났지만, 상담을 거듭할수록 내가 모르고 있던 나를 발견했다. 상담 선생님은 말했다. 내게 능력지향주의 강박이 있다고.
모든 것은 노력하면 이루어진다.
실패하면 그것은 내가 최선을 다하지 않아서 생긴 것이다.
그러므로 더 노력해야 한다.
대략적으로 이러한 루틴의 사고방식.
이러한 사고방식을 갖게 된 데에는 한국 사회, 사람들의 인식, 양육방식, 내 개인적인 성향 등 여러 가지가 원인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상담 중 내가 자주 했던 문장이 있다.
Ich bin nicht gut genug.
영어로 번역하면, I am not good enough.
나는 부족하다.
- 베니가 뇌종양 수술을 받기 전에 내가 적극적으로 더 유능한 의사 선생님이 있는 곳과 병원을 찾아보았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런 결과가 온 것이다. 아내로서 나는 부족했다.
- 베니의 신경마비를 고치기 위해서 내가 사방팔방 뛰어다니며 좋은 재활 의사 선생님과 병원을 찾아보아야 하는데, 내가 부족해서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 나 때문에 베니가 신경마비가 낫지 않을 것 같아서 속상하다.
- 내가 더 잘 남편을 보살피면서 안면 근육 마사지도 해주고, 건강한 음식도 해주고, 집안일도 잘하고 해야 하는데 그렇게 못하고 있다. 나는 너무나도 부족한 아내다.
- 내가 긍정적으로 지내면서 남편에게 힘을 주고, 용기를 주어도 모자랄 판에 이렇게 기분이 처지고 우울해서 답답하다. 밝게 지내보려고 하는데 잘 되지가 않는다. 난 정말 부족한 사람이다.
상담 선생님은 가만히 듣고 있다가 말씀하셨다.
병은 노력한다고 고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특히 신경 마비, 기능 장애와 같은 병은 노력하면 조금씩 개선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노력으로 그것이 완전히 낫고 말고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기분도 마찬가지예요.
감정 - 기분은 당신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슬픈데 억지로 행복하다고 하는 것은 뇌가 착각을 하게 하는 것뿐이지 당신의 진짜 감정이 아니에요.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해요.
지난봄, 영화관에서 본 인사이드아웃 2.
만일 내 머릿속을 들어가 보면 그와 꼭 같지 않을까. 라일리의 머릿속 감정친구들은 다행히도 13살이 되어 깨닫고 성장했지만, 나는 불행하게도 서른이 넘도록 기쁨이에 지배된 것이다. 밝은 사람이 되려다가 결국 진짜 모습을 잃어버린. 그러다가 불안이 찾아오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모든 것이 멈추어 버린.
영화에서 불안이는 라일리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보겠다고 모든 것에 철저히 계획을 짜고 열심을 부린다.
- 하키 팀 - 파이어호크만 들어가면 외톨이가 아닐 거야.
- 잘 적응해야 돼.
- 하키만 잘하면 친구가 생길 거야.
- 그러니 전이랑은 비교도 안 되게 훈련해야지.
- 골을 못 넣을 때마다 링크 한 바퀴를 스스로 더 돌면서 혹독하게 훈련하자.
- 안 그러면 그간 노력이 다 물거품이 된다고!
목적 달성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새로워진 라일리의 모습을 가슴에 품고 불안이는 기대에 찬다. 그리고 말한다. 이것만 있으면 이제 완벽해지는 거야. 하지만 불안이의 기대와 달리 새롭게 완성된 라일리의 자아가 꺼내는 첫마디는 바로 이것이었다.
I am not good enough.
그때 불안이의 표정이 잊혀지지 않는다.
엥? 어랏? 이게 아닌데?
불안이는 뜻밖의 결과에 당황했지만, 그것은 라일리가 자기 계발이 필요하다는 걸 안다는 뜻이라며 더더욱 열심을 부린다. 모든 것이 완전 마비 - 일시 정지 될 때까지.
집 앞 커피숍에서 함께 눈시울 붉혀가며 내 이야기를 들어주던 지인은 가방 속에서 꽃이 그려진 예쁜 메모지를 꺼냈다. 펜을 들어 메모지에 무언가를 적어 내려갔다.
I am not good enough.
그리고는 'not' 단어 위에 거침없이 크게 엑스자를 그었다.
I am good enough.
나는 충분히 괜찮아.
언제나
좋은 사람, 친절한 사람, 착한 사람, 밝은 사람
일 잘하는 사람, 실수하지 않는 사람
힘든 것도 잘 이겨내는 사람, 독립적이고 강한 사람, 성공한 사람
이 아니어도 괜찮아.
우울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짜증도 나고
이기적이고, 실수하고, 힘들 때 무너지고, 실패도 하고,
결국 엉엉 울어버리기도 하지만
지금 이대로의 너도 충분히 괜찮아.
커피숍에서 대화를 나누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속으로 계속해서 웅얼거렸다.
I am good enough. I am good enough.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조금씩 사라지는 것 같았다. 매번 머릿속에서 되뇌이던 문장에서 'not' 하나만 지웠을 뿐인데 이렇게 가벼울 수가.
발걸음이 조금씩 힘차게 바뀌었다. 속으로 조그맣게 되뇌이던 목소리도 조금씩 커져갔다. 마치 기쁨이와 불안이가 화해하고 모든 감정들이 한마음이 되어 함께 외치는 듯.
You are good enough!!!
그간 잊고있던 겨울 햇살이 참 따스했다.
* 이 글은 주관적인 시각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의학적인 내용 등에 있어 사실과 다르게 알고 있거나 틀린 부분이 있을 수 있음을 미리 말씀드리고 양해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