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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seuli Oct 16. 2024

이렇게 떨릴 수가

벨기에?

벨기에에 뭔가 유명한 것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아, 맞다!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걷다 보면 나오는 미술관. 그곳에서 마주한 르네마그리트의 그림은 찬란하게 빛나던 어느 스무 살 여대생의 마음을 흔들었다. 가로등 하나만이 오롯이 빛을 밝혀내고 있는 집 밖 풍경은 칠흑같이 어두운데, 그 위에 눈이 부실정도로 푸르른 대낮의 하늘이 펼쳐지는 그림을 보고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달걀을 보면서 새를 캔버스에 그려내는 자화상 그림을 보면서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완성된 자화상 그림을 이젤에 세워놓은 후, 천연덕스럽게 그림과 똑같은 포즈를 취한 화가의 사진을 보며 '큭' 하고 웃었다. 뭐지? 이 화가 재밌네. 


벨기에. 그곳은 이십 대의 내가 참으로 많이 애정했던 화가, 르네마그리트가 태어난 나라다. 그리고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에는 르네마그리트 미술관이 있다. 이십 대의 나는 르네마그리트에 푹 빠져있었다. 르네마그리트 그림이 있다는 곳은 꼭 들려보았다. 유럽 여행 때 파리의 퐁퓌드 센터에서, 뉴욕 현대 미술관 Moma에서 르네마그리트 그림을 다시 만났다. 해외에서 막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즈음, 나에게 주는 소소한 선물이라며 르네마그리트 그림이 고품질로 인쇄되어 있는 책도 꽤 거금을 주고 한 권 샀다. 그리고 당시 한참 소중히 여기던 노트를 펼쳐 버킷리스트에 적어 내려갔다.


벨기에 르네마그리트 미술관 가기.


한 해 두 해가 흘러가고, 집 - 직장이 삶의 당연한 패턴이 되어버린 삼십 대 끝자락의 어느 여성. 번아웃과 우울증에 발버둥 치고 있는 이 여성에게 그 화가의 존재 그리고 스무 살의 자신이 적어 내려갔던 버킷리스트의 설렘은 희미해진 첫사랑의 추억처럼 기억 속에서 찬찬히 사라져 가고 있었다. 기분 전환을 할 겸 짧은 여행을 계획하던 중 머릿속에 갑자기 벨기에가 들어왔고, 벨기에가 뭐가 유명한지 생각하다 불현듯 생각이 났다. 잊고있던 그 존재.

르네마그리트.

벨기에 수도인 브뤼셀을 가려면 원래 계획한 동선에서 조금 돌아가야 했지만, 나는 브뤼셀을 꼭 가고 싶다고, 르네마그리트 미술관을 꼭 가고 싶다고 베니에게 말했다. 십분 전까지만 해도 '벨기에?' 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그곳이 갑자기 꼭 가고 싶은 곳이 되어버렸다. 자신에게 르네마그리트라는 화가를, 그의 예술 세계를 흥분하며 이야기하던 이십 대 여대생의 반짝반짝 빛나는 눈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베니는 기뻐하며 대답했다.

르네마그리트? 그럼 당연히 꼭 가야지!


르네마그리트 미술관 앞에서 베니는 이 순간을 기념으로 꼭 남겨야 한다며 사진을 찍어주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뭘 남사스럽게 유난을 떠냐며 마지못한 척 미술관 건물 앞에 서서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조금의 고민도 없이 10유로 정도를 지불하고 오디오 해설 기기를 대여하는 베니를 옆에서 보면서, 돈이 아깝지 않나 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한국어 해설도 있다는 말에 조금 기쁘기도 했지만, 거기까지였다. 베니를 따라 소지품을 사물함에 넣을 때까지도 '드디어 왔구나.' 이 정도의 감정 뿐이었다.


베니야,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본격적으로 관람을 시작하기 전 들린 화장실 거울에 비친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스무 살 여대생의 모습이 떠올랐다. 없는 어딘가에서부터, 주체할 없는 설렘이 몽글몽글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다.


아니. 이렇게 떨릴 수가.


별 것도 아닌 일에 웃고, 울고, 설레어하고, 실망하던 스무 살의 내가 돌아온 것 같았다. 

좋아하는 것을 한다는 것이 이렇게 행복한 일이었구나. 

현실, 이유 같은 것과 무관하게 '그냥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한다는 것. 그것의 존재가 마흔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스무 살 청춘처럼 미치도록 설레게 만들 수 있구나.


여행지에서 돌아온 후 상담 선생님께 말했다. 

제가 무언가에 이렇게 다시 설렐 줄 몰랐어요.

선생님은 미소 지었다. 


집으로 돌아와 노트를 펼쳤다. 이십 대 때 버킷리스트를 적은 것과 똑같은 표지의 노트. 너무 좋아해서 여러 권을 산 후, 안 쓰고 아껴두었던 그 노트. 그러다 결국 베니의 뇌종양 수술 후, 어려운 마음을 쏟아내는 창구로 쓰이게 된 그 노트. 그리고 펜을 들고 새하얀 종이 위에 적어 내려갔다. 


다시 쓰는 버킷리스트



조금씩 조금씩 마음이 몽글몽글 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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