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바퀴 도는 세계관과 홀대받는 개미
그러니까 마블(MCU)의 과제는 뻗어가는 세계관을 관객에게 어떻게 설득할 것인지다. MCU 페이즈 4는 전작의 설정들을 정돈하고 앞으로 펼칠 이야기의 초석을 마련했다. 먼 옛날 인류의 역사를 이야기에 편입시키거나(이터널스), 기존 캐릭터성을 비틀어 새로운 국면을 만드는 식으로 말이다(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은 20년 동안 이 시리즈에 출연했던 배우들의 힘을 빌려 가장 완전한 피터 파커를 새로운 사가의 초입에 세웠다. 이처럼 페이즈 4가 MCU의 세계관을 통시적으로 설득했다면, <앤트맨과 와스프: 퀀텀매니아>(이하 앤트맨 3)는 페이즈 5의 문을 열며 양자세계나 멀티버스 같은 거대한 세계관의 외연을 확대하는 중책을 맡았다. 문제는 페이즈 4가 그렇게 잘 만든 시리즈가 아니라는 데 있다. 그곳에는 대책 없이 늘어나는 설정들과 지리멸렬한 기용술이 만연하다. 그래서일까, <앤트맨 3>는 맡은 중책이 버거운 듯 페이즈 4의 헛바퀴를 마저 돌린다.
<앤트맨 3>는 우연한 계기로 양자 세계에 떨어진 앤트맨(폴 러드)과 일행들이 그 세계의 지배자이자 멀티버스의 치명적인 위험 분자인 정복자 캉(조나단 메이저스)에 대적하는 이야기다. '멀티버스'와 '양자세계'라니, 과학적 상상력(일부 실제 사실인)의 최전방을 체감할 생각에 관객의 기대가 커지는 건 무릇 당연하다. 그런 기대 때문인지 <앤트맨 3>는 유달리 그 실패가 크게 와닿는다. <앤트맨 3>에는 <이터널스>의 아름다운 풍광도, <블랙팬서>의 최첨단 총천연색도 없다. 영화가 구현한 황량한 사막과 독특한 식생은 <스타워즈>나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같은 걸출한 레퍼런스의 기시감을 극복하지 못한다. 또한 양자 세계라는 우리가 가닿지도 못할 넓은 세계를 다루면서도, 카메라에 남는 건 운동장 정도 규모에서 벌어지는 액션이다. 그리고 마이클 베이가 뿌려놓은 듯한 폭죽의 잔광이 유달리 액션의 배경을 채운다. 이미 거대한 세계를 거울의 속성을 활용하여 기발하게 구현한 <닥터 스트레인지>를 떠올리면 이 작은 배포는 더욱 크게 와닿는다. 이 영화의 환경에는 개성이 없고, 그런 환경 속에서 서사의 생태를 기대하기란 어려운 법이다.
이전까지의 앤트맨 시리즈는 이름에서 보여주듯 개미같이 수 많은 작은 존재들의 아기자기한 합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이번 작품 역시 개미라든지 혁명군이라든지 어떤 숫자로 표현되는 캐릭터가 가득하다. 하지만 그들은(심지어 앤트맨 본인까지) '합'이 아닌 그저 숫자로서의 '양'으로 소비된다. 중반에는 무한대의 앤트맨이 이스라엘 장벽을 오르는 <월드워 Z>의 좀비들 처럼 인간 탑을 쌓는 장관을 보여주지만, 단 한명의 지구 영웅 발 밑에 남는 건 어떤 상호작용도 없는 무한대의 부스러기다. <어벤저스: 엔드 게임>의 백병전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의 마지막 대규모 전투 씬은 그 자체로 볼거리를 제공하지만, 넘치기만 하는 캐릭터들로 채워진 화면은 그저 낯설게만 느껴진다. 이 난리가 벌어졌음에도 두시간 내내 암시된 빌런의 강력함은 결국 허언으로 밝혀진다. 여기에 시종일관 바쁜 카메라로 앤트맨과 와스프(에반젤린 릴리)를 교차 편집하는 방식은 이 거대한 프렌차이즈에 대한 관객의 이해를 방해하고, 관객이 시각적 자극물 만을 수동적으로 쫓게 만든다. 스펙터클한 상상력과 시리즈를 관통하는 치밀한 논리. 돌이켜보면 <앤트맨 3>는 애초에 동시에 달성하기 어려운 이 두 가지 목표를 추구했던 셈이다. 그러나 아무리 목표가 의미 있더라도, 영화의 완성도는 별개의 문제다.
한가지 더. 나는 이 영화가 캐릭터를 대하는 방식이 윤리적이지 못하다고 본다. 양자 세계에서 살아가는 생명체의 모습은 인간이 외계인을 묘사하는 방식의 전형이다. 인간과는 다르게 생기되 지구 동물의 구조(머리와 몸통, 팔다리로 이루어진)를 벗어나지 않는다. 캐릭터의 모습이 인간과 다르다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수많은 SF 영화에서 비(非) 지구인을 그리는 방식을 보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 속의 특권은 인간의 모습을 가진 자가 독점한다. 혁명군의 리더 젠토라(케이티 오브라이언)도, 초월적인 능력(생각을 읽는)을 가진 쿼즈(윌리엄 잭슨 하퍼)도 인간의 모습이며, 빌 머레이가 연기한 크라일라는 지배 계급으로 등장한다. 그 외 소위 '인간과 다른 모습을 한' 존재들은 단순히 웃음이나 측은함 같은 즉시적이고 영양가없는 감정을 추동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심지어 제목이 앤트맨 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개미를 홀대한다. 이 시리즈가 개미의 능력을 내내 찬양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인간과 개미의 관계는 주종 관계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행크 핌(마이클 더글라스) 박사의 돌격 구호와 함께 개미들은 죽음을 향해 맹목적으로 달린다. 그리고 개미가 질주하도록 조종하는 건 핌 박사가 개발한 기계가 방출하는 전기 신호다. 이 영화는 종 간의 교감에 시간을 투자하지 않는다. 앤트맨 1편과 2편, 심지어 3편까지 언제나 위기에서 그들을 구해줬던 우리의 친구 개미들은 양자 세계에 남겨지고, 결국 스캇과 일행들은 그들에게 한정된 가족주의를 되새기며 일상으로 돌아간다. 개미들이 다른 세계에서 과학력을 쌓아 그들을 구하러 돌아왔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일종의 배반 서사다. 이 영화와 캐릭터들이 관계 맺는 방식은 비민주적이고 차별적이다.
불과 십수년 전만 해도 많은 영화들이 백인 남성을 주인공으로 두고 여성이나 비백인 캐릭터를 그럴듯한 조력자로 포장하곤 했다. 이때 응당 제기되어야 할 비판들을 작금의 우리는 어디까지 확장시키고 공감할 수 있을까? 특히 <앤트맨 1>의 빌런이었던 대런(코리 스톨)은 그렇게 기형적인 모습으로 표현돼야 할 이유가 없다. 자신이 의지가 아닌 강제되어진 신체적 특징을 값싼 유머로 호도하는 태도는 웃음이 아닌 탄식만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