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먼저 도착한 꿈

by 꿈담은나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평범한 아침, 마음 한쪽이 조용히 깨어나는 듯한 기척이 찾아왔다. 햇살은 식탁 위를 은빛으로 적시며 머그잔 가장자리를 따라 부드럽게 흘렀다. 그 빛이 오래된 소망을 건드리는 순간, 가슴속에서 작은 파문이 일었다. 묻어두었던 꿈 하나가 먼지결 사이에서 천천히 떠올랐고, 누군가 내 이름이 적힌 책의 첫 장을 넘기는 장면이 스쳤다. 그 상상만으로 마음 깊은 곳에 고요한 빛이 내려앉았다.


퇴근길 버스 안은 노을빛에 잠겨 하루의 흐름을 천천히 식히고 있었다. 창문에 비친 모습은 변함없었지만, 그 안의 감정은 물결처럼 흔들렸다. 이어폰을 타고 바람이 스쳐 지나가자, 마음속에 또 하나의 장면이 맺혔다. 따스한 조명 아래에서 나는 작은 리모컨을 쥔 채 사람들 앞에 서 있었고, 말들이 공기를 건너 흐를 때 그들의 눈빛이 아주 느리게 바뀌었다. 그 순간의 나는 오래전 꿈꾸던 ‘마음을 기울이는 사람’과 가까웠다.


집으로 돌아온 밤, 거실에 켜놓은 작은 스탠드 불빛이 벽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하루의 소음이 모두 가라앉은 뒤라서인지 마음이 유난히 맑게 느껴졌다. 따끈한 물을 한 잔 끓이며 오늘 쓴 문장을 다시 떠올렸다. 아주 작은 문장 하나에도 마음이 기지개를 켜는 순간이 있었고, 그것을 발견할 때마다 꿈은 조금 더 또렷해졌다. 조용한 집 안에서 나는 마치 미래의 내가 보내온 편지를 읽는 사람 같았다.


회사 책상 한쪽에는 버킷리스트 노트가 펼쳐져 있었고, 맨 윗줄에는 오래전 나에게 건 약속이 자리하고 있었다. 누군가의 하루를 밝혀주는 글을 쓰고 싶다는 문장이 가장 먼저 적혀 있었다. 그 아래에는 사람들의 걸음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해주겠다는 소망이 이어져 있었다. 마지막 장엔 즐겁게 일하며 내 삶을 단단히 세우겠다는 다짐이 별빛처럼 놓여 있었다. 문장들 사이에는 세상과 나 자신을 향한 조용한 성찰이 잔잔히 배어 있었다.


목록을 적은 뒤로 일상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 출근길 커피 향만 맡아도 떠오르는 문장을 적게 되었고, 퇴근 후 노트북 불빛이 작은 등불처럼 마음을 밝혀주었다. 주말 산책길에서는 바람 온도와 길 위의 그림자까지 또렷하게 느껴졌다. 그 사이에서 문장들이 조용히 피어났고, 글을 다듬을 때마다 누군가의 하루에 고요히 닿기를 바라는 마음이 일었다. 마음이 먼저 걸어가고, 내가 그 뒤를 따르는 듯한 흐름이 생겼다.


어느 저녁, 비가 그친 뒤의 공기가 방 안에 잦아들고 있었다. 스탠드 불빛은 노란 호수처럼 번져 책상을 감싸고 있었고, 그때 마음속에 하나의 이미지가 선명해졌다. 출판 계약서 위에 적힌 내 이름이 작은 불씨처럼 빛나고 있었다. 카페 테이블 위 케이크 초는 오래 걸어온 길을 축복하듯 은은하게 흔들렸다. 상상이었지만 그 온기에는 현실 같은 온도가 있었다. 멀게만 보였던 시간이 어느새 내 앞까지 다가온 듯했다.


며칠 뒤, 나는 오래 닫아두었던 서랍을 열었다. 쓰다 만 원고들, 흘려 적힌 문장들, 덮어둔 파일들이 고요히 쌓여 있었다. 한 장을 넘길 때마다 마음 깊은 곳에서 미세한 울림이 번졌다.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 얼마나 오래전부터 나를 뒤따라왔는지, 그 흔적이 구겨진 종이와 마른 잉크 자국에서 고스란히 느껴졌다. 잠시 멈춰 서서 종이를 어루만지다 보니, 어린 시절 책꽂이 앞에 앉아 조용히 글을 쓰던 나 자신이 떠올랐다. 그때는 이유를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이미 그 시절의 나는 지금의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던 것 같다.


어느 새벽, 어둠이 완전히 걷히기 전의 시간에 문득 눈이 떠졌다. 창문 너머의 희미한 빛이 바닥을 길게 적시고 있었고, 집 안에는 숨결 같은 고요가 내려앉아 있었다. 그때 마음 한구석에서 조용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너는 이미 가고 있는 길이야.’ 그 말은 내면 깊은 곳을 스치며 작은 떨림을 남겼다. 나는 잠시 그대로 앉아 마음에 담긴 생각들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며칠 뒤 작은 서점에서 마주한 문장은 그 생각을 더욱 단단하게 해주었다. “먼저 도착하는 것은 늘 마음이다.” 오래 기다린 인사처럼 시선에 걸려 왔다. 나는 책등을 천천히 쓸어내리며 생각했다. 어쩌면 나는 이미 이 길을 걷고 있었고, 마음이 먼저 건너간 자리를 따라가고 있었던 것이라고. 깨달음은 물결처럼 조용하게 번져갔다.


그날 이후, 하루의 끝마다 작은 버릇이 생겼다. 그날 적어둔 문장을 다시 읽는 일이다. 어떤 날은 두려움이 피어오르고, 어떤 날은 잔잔한 확신이 번져 있었다. 읽을수록 알게 되었다. 내가 원하는 삶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 쪽으로 천천히 걸어오고 있다는 사실을. 마음이 먼저 내디딘 걸음 위에 현재의 내가 발을 올려놓는 느낌이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는 지켜야 할 중심과 흔들릴 수밖에 없는 감정이 나란히 놓여 있다. 그 둘 사이에서 생겨나는 미세한 울림이 결국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기쁨과 두려움, 기다림과 갈망이 겹치며 하루의 선택을 조금씩 밀어주고, 움직임이 쌓여 한 사람의 길을 서서히 비춰주는 등불이 된다. 그렇게 걸어온 시간은 어느새 나를 지탱하는 바닥이 되어 조용히 힘을 건네주었다.


오늘 나는 노트 한 켠에 조용히 문장 하나를 덧붙였다.


“시작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이미 꿈의 반을 이룬 것이다.”


그 문장은 이 글을 요약하듯 마음 깊은 곳에 닿았다.


꿈이라는 씨앗은 적는 순간부터 이미 빛을 향해 몸을 틀기 시작한다.


언젠가, 꿈은 지금의 나를 닮은 모습으로 조용하고 분명하게 세상 앞에 도착하리라 나는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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