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도착 시간

by 꿈담은나현


나는 한동안, 인생에도 정해진 도착 시간이 있는 줄 알았다. 한국 사회에는 보이지 않는 인생의 도로가 있고, 그 위에는 흰 선처럼 또렷한 차선이 그어져 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 취업과 결혼, 그리고 아이 이야기까지 이어지는 순서는 선택처럼 보이지만 어느새 기준이 된다. 사회는 변했다고 말하지만, 도로에서 벗어난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만큼은 쉽게 달라지지 않는다. 말없이 등을 밀어 제자리로 돌려놓으려는 힘은 지금도 조용히 작동한다.


명절이 되면 그 힘은 더 선명해진다. 밥상 위에 국이 식기도 전에 질문이 먼저 오른다. “이제 뭐 해?”라는 말은 가볍게 던져지지만, 그 말이 공기처럼 퍼지는 순간 나는 숨을 고르게 된다. 누군가는 웃으며 대답하고, 누군가는 이미 다음 질문을 준비한다. 대답을 망설이는 사이, 자리는 서서히 불편해지고 웃음 뒤에 남은 침묵이 유난히 길게 느껴진다.


길을 무리 없이 따라가면 질문은 줄어든다. 이유를 설명하지 않아도 되고, 속도를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차선에서 조금만 비켜나도 상황은 달라진다. 걱정이라는 이름으로 던져지는 말들 속에는 판단이 섞여 있고, 그 말들은 낮은 소리로 오래 귓가에 남는다. 도와주기보다는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먼저 묻는 사회에서, 사람은 점점 말수가 줄어든다.


나 역시 소리 한가운데에 오래 서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발걸음이 규칙적인 박자로 멀어질 때, 나는 고장 난 신호등 앞에 남겨진 사람처럼 제자리에 멈춰 있었다. 초록빛은 늘 남들의 쪽에서만 켜졌고, 내 앞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정지 신호가 반복되었다. 카페 창가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나만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손끝에서 힘이 빠지고, 심장은 조용히 가라앉았다.


어느 날은 지인의 결혼 소식을 휴대폰 화면으로 오래 바라본 적이 있다. 축하한다는 말을 적어 내려가다 몇 번이나 지웠다. 진심으로 기뻐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 한쪽에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올라왔다. 부러움과 초조함, 그리고 그런 마음을 품은 나에 대한 미안함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날 나는 메시지를 보내고도 한참 동안 휴대폰을 내려놓지 못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연락도 줄었다. 다들 바쁜 나이가 되었고, 바쁘다는 말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이유가 되었다. 축하할 일은 늘었지만, 안부를 묻는 목소리는 점점 줄어들었다. 아무도 나를 밀어내지 않았지만, 아무도 잡아주지도 않았다. 애매한 공백 속에서, 나는 자주 스스로에게 물었다. 정말 내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걸까.


처음에는 나 또한 나를 향해 가장 엄격한 판단을 내렸다. 늦어진 건 내 책임 같았고, 멈춘 건 내 선택 같았다. 그렇게 자신을 몰아붙이다 보면 마음 안에서는 마찰음이 났다. 조용한 밤에도 자신을 긁어대는 소리가 들렸고, 그 소리에 쉽게 잠들지 않았다. 옳고 그름을 가늠하기도 전에, 이미 마음은 많이 닳아 있었다.


그러다 아주 사소한 계기로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어느 날, 아무 약속도 없는 오후에 혼자 걷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멈춰 있었다는 사실과 길을 잃었다는 사실은 다르지 않을까. 빨리 가는 대신 넘어지지 않는 쪽을 택해도 되지 않을까. 그날의 해는 유난히 낮게 걸려 있었고, 도로 위에는 붉은빛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 이후로 나는 아주 느리게 다시 걷기 시작했다. 남들처럼 크게 결심하지도 않았고, 대단한 목표를 세우지도 않았다. 다만 오늘 할 수 있는 만큼만 해보자는 마음으로 하루를 보냈다. 속도는 여전히 느렸지만, 방향은 이전보다 분명해졌다. 무엇보다 나를 재촉하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하루를 마치고 불을 끈 방에 누우면, 이제는 누군가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먼저 찾아온다. 오늘도 멀리 가지는 못했지만, 완전히 멈추지는 않았다는 사실이 남는다. 창밖에서 들려오는 차 소리와 멀리서 끊기는 신호등 소리를 들으며,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그 질문은 하루를 조용히 정리하는 마침표처럼 마음에 내려앉는다.


지금의 나는 여전히 빠르지 않다. 질문은 여전히 따라오고, 비교는 그림자처럼 발밑에 남아 있다. 하지만 예전처럼 그림자를 지우려 애쓰지는 않는다. 빛이 있는 곳에 그림자가 생긴다는 사실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그림자를 피해 달리느라 숨이 차던 시절보다, 지금의 호흡이 더 오래 간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어쩌면 비슷한 자리에 서 있을지 모른다. 남들이 정해둔 시간표에서 조금 벗어났다는 이유로 혼자 남겨진 것 같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억해 줬으면 한다. 조용하다고 해서 그 길이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느린 길에도 분명히 닿는 곳은 있다.


우리는 모두 같은 시간에 도착해야 한다는 믿음 속에서 자신을 너무 오래 재촉해왔다. 나는 조금 늦었지만 다시 길을 찾았고, 지금도 그 길을 걷고 있다. 모두의 속도는 틀리지 않았고, 이미 길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이다. 삶은 정해진 순서보다, 끝까지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걸어온 사람의 시간을 더 오래 기억한다는 걸 기억했으면 한다.


이전 17화생각이 흩어지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