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자꾸 쓰게 되었을까

by 꿈담은나현


불을 끄고 누운 밤마다, 아무도 부르지 않았는데도 문장이 먼저 깨어났다. 눈은 감겼지만 잠은 아직 오지 않은 상태에서 생각은 늘 그사이를 배회했다. 방 안은 고요했지만, 머릿속 어딘가에서는 잔물결 같은 움직임이 일어났다. 하루 동안 몸에 남아 있던 소음이 하나둘씩 빠져나가고 나면, 비로소 나 자신만 남는 시간이 찾아왔다. 그제야 말이 되기 전의 장면들, 아직 이름 붙지 않은 이야기들이 어둠 속에서 천천히 떠올랐다가 이내 가라앉았다.


이불 속에 가만히 누워 있으면 감각은 유난히 예민해졌다. 시계 초침 소리는 벽을 타고 흐르는 것처럼 느껴졌고, 멀리서 지나가는 차 소리는 물속에서 울리는 소리처럼 둔하게 번졌다. 눈을 뜨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오히려 어둠 덕분에 머릿속 풍경은 더 또렷해졌다. 붙잡지 않으면 사라질 걸 알면서도, 그 순간만큼은 굳이 손을 뻗지 않고 생각이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가 보았다. 잠들기 전의 이 시간은 늘 가장 솔직한 나를 마주하게 하는 시간이었다.


낮에는 걷다가 그런 틈을 만났다. 나무 사이로 스치는 바람과 바닥에 내려앉았다가 흔들리는 빛을 바라볼 때, 생각은 자연스럽게 옆길로 샜다. 하나의 장면이 끝나기도 전에 다음 장면이 이어지고, 또 다른 장면이 그 뒤를 따랐다.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어느새 그 안으로 깊이 들어가 있었고,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흘러갔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나만의 틈 같아서 그 시간이 좋았다.


버스를 탈 때면 감각은 더 선명해졌다. 창가에 앉아 유리창 너머를 바라보면, 버스 창은 액자처럼 세상을 잘라냈다. 덜컹거리는 진동과 정류장 안내 방송 사이로 회색 보도블록 위를 걷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스쳤다. 노란 신호등 아래에서 잠시 멈춘 사람들, 속도가 바뀔 때마다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거리의 색들 속에서 나는 자주 생각을 놓쳤다. 버스는 앞으로 가는데, 생각은 자꾸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하루 동안 흘려보낸 생각들은 다시 밤에 되돌아왔다. 불을 끄고 누운 자리에서 낮에 지나쳤던 장면들이 하나둘 되살아났다. 그중에는 미처 붙잡지 못한 감정도 있었고, 괜히 마음에 남아 있던 얼굴도 있었다. 몇 번의 밤은, 쓰지 않으면 도저히 잠들 수 없었다. 화면 밝기를 가장 낮춘 채 핸드폰을 켜고, 문장 몇 줄을 급히 적어 내려가야만 했다.


처음에는 종이에 적곤 했다. 급히 꺼낸 메모지 위에 남긴 단어 몇 개는 오래 머물지 않았다. 하루만 지나도 온기가 식었고, 서랍이나 가방 어딘가에 넣어두면 기억과 함께 사라지곤 했다. 다시 펼쳐 보려 했을 때는 이미 그때의 마음이 아니었다. 그렇게 많은 이야기가 말없이 흘러갔다.


어느 순간부터 손에 쥔 핸드폰이 역할을 대신했다. 종이 메모지는 멀어지고, 대신 화면 속 작은 공간이 삶에 들어왔다. 잠들기 직전에도, 버스 안에서도, 길을 걷다가도 기록할 수 있었다. 가끔은 실수로 문장이 사라지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견딜 수 있었다. 적어도 순간의 생각을 그냥 흘려보내지는 않았다는 사실이 남았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글을 밖에 내놓았을 때를 아직도 기억한다. 아무도 보지 않을 거라 믿었고, 그래서 더 솔직해질 수 있었다. 공개 버튼 앞에서 한참을 망설였지만, 결국 지우지는 않았다. 반응이 없어도 괜찮았다. 읽히지 않아도, 기록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그때의 글은 누군가를 향한 것이 아니라, 나를 향한 것이었으니까.


어느 밤에는 예전에 써둔 문장을 다시 읽어보았다.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 훨씬 서툴렀고, 문장은 투박했으며, 감정은 숨김없이 드러나 있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부끄럽지 않았다. 오히려 그 문장 덕분에 그 시절의 내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글은 그렇게, 잊히지 않으려고 애썼던 나의 흔적이 되어 있었다.


물론 쓰지 않으려 했던 시간도 있었다. 메모가 쌓이지 않던 시기, 문장을 적어도 마음이 따라오지 않던 날들이 있었다. 글이 아무 의미 없어 보이던 순간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괜히 핸드폰을 내려놓고, 아무것도 적지 않겠다고 다짐하곤 했다. 그런데도 완전히 멀어지지는 못했다. 아주 사소한 문장 하나가, 다시 나를 붙잡았다.


돌아보면, 나는 글을 특별하게 대하지 않았다. 다만 놓치고 싶지 않았다. 머릿속에 스쳐 가는 이야기들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사라지는 것이 아쉬웠다. 그래서 기록했다. 손이 닿는 곳에, 가장 빠른 방법으로. 그렇게 남겨둔 문장들이 조용히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다.


지금도 밤이 되면 같은 질문을 한다. 왜 나는 아직도 쓰고 있을까. 예전처럼 많은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는 날에도, 바쁜 하루의 끝에서도, 여전히 문장을 붙잡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쓰는 동안만큼은 내가 어디쯤 서 있는지 잊지 않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글은 나를 앞당기지도, 단번에 바꿔놓지도 않았지만, 흔들릴 때마다 제자리를 확인하게 해주었다.


이 글은 흘러갈 뻔한 생각들을 붙잡아온 시간에 대한 기록이다. 글은 나를 확신 있게 해주지는 않았다. 대신 무너질 때마다 잠시 앉아 숨을 고를 수 있는 자리를 내주었다. 상상이 일렁이는 순간을 그냥 지나치지 않게 해주었고, 사소한 틈을 나만의 시간으로 바꿔주었다. 오늘도 나는 쓴다. 특별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라는 이유만으로도 이 선택은 지금까지 충분히 이어져 왔다.


사라질 뻔한 생각들을 붙잡아온 시간이, 결국 나를 지금의 나로 만들었다.


이전 18화각자의 도착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