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말을 고르는 사람

by 꿈담은나현


나는 결말을 고르는 사람이다. 예전에는 그 말이 낯설었다. 나는 늘 흐름을 따르는 쪽이었고, 끝은 언제나 상황이 대신 정해준다고 믿었다. 튀지 않고 무난하게 살아가면 틀리지는 않을 것 같았다. 안전한 선택이 곧 옳은 선택이라고 여기며, 나는 자신을 선택하지 않는 데 익숙해졌다.


퇴근길 버스 창가에 앉으면 유리창에 노을이 번졌다. 붉은빛이 얼굴을 스치고, 정류장마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일정한 박자처럼 이어졌다. 사람들은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움직였지만, 나는 자주 창밖만 바라보았다. 차창에 겹친 내 얼굴은 또렷하지 않았다. 이 길이 정말 내가 고른 길인지, 그 질문은 돌아오는 정류장처럼 반복되었다. 버스가 멈출 때마다 마음도 잠시 멈추는 기분이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조용한 아이였다. 시험지를 받으면 가장 먼저 기침 소리와 연필 긁히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정답을 잘 고르는 아이가 되어 가고 있었지만, 나를 고르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틀리지 않는 대신, 원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 쪽을 택하는 아이가 되어 갔다.


회사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회의실 형광등은 눈부셨고, 공기는 건조했다. 머릿속에는 또렷한 문장이 떠올랐지만, 입을 열려는 순간 목이 마르고 손끝이 식어갔다. 결국 나는 말을 삼켰고 누군가 대신 결론을 내렸다. 사람들의 고개가 동시에 끄덕여질 때마다, 나는 한 발짝씩 배경으로 밀려났다. 눈에 띄지 않는 선택이 편하다고 믿으며, 그렇게 자신을 조금씩 지워갔다.


퇴사를 결심한 날, 비가 가늘게 내렸다. 우산 끝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현관 바닥에 작은 점을 남겼다. 부모님은 뉴스를 보고 있었고, 침묵이 더 크게 느껴졌다. “괜찮겠어?”라는 한마디가 공기를 스쳤다. 나는 괜찮다고 답했지만, 그 말은 내 안에서 오래 머물지 못했다. 괜찮아야 한다는 다짐이 오히려 더 크게 흔들렸다.


그만둔 뒤의 첫 월요일, 알람이 울리지 않았는데도 일찍 눈이 떠졌다. 방 안은 지나치게 고요했고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만 또렷했다. 습관처럼 통장 잔액을 확인했다. 숫자는 생각보다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계산기를 두드리다 멈추고 다시 세어보았다. 불안은 소리 없이 가슴을 조였다. 괜찮다던 내가 가장 먼저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카톡에서 지인의 승진 소식이 화면에 떴을 때, 나는 잠시 휴대폰을 뒤집어 놓았다.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보내고도 마음 한쪽이 저렸다. 나는 잘 가고 있는 걸까, 뒤처진 건 아닐까. 비교는 조용한 방식으로 사람을 흔든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나만 제자리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웃으며 축하를 건넨 뒤 돌아선 방 안은 유난히 넓고 조용했다.


며칠 뒤 동네 카페에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커피 향이 퍼지고 낮은 대화가 배경처럼 흐렸다. 화면 위 커서는 묵묵히 깜박였다. 키보드 위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나는 떨림을 외면하지 않기로 했다. 두려워서 멈춘다면 또다시 남이 정해준 결말로 돌아갈 것만 같았다. 잘 쓰지 못해도 괜찮다고, 서툴러도 괜찮다고 몇 번이나 자신을 토닥였다.


밤이 깊어 방 안이 고요해지자, 다시 모니터 앞에 앉았다. 문장을 적다 지우기를 반복하며 천천히 써 내려갔다. 힘들었던 기억을 꺼내다 마지막 줄에서 멈췄다. 분노로 닫을 수도, 체념으로 끝낼 수도 있었다. 나는 그저 다른 결말을 고르고 싶었다.


“그래도 나는 나를 포기하지 않겠다.”


그 문장을 적는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 단단히 내려앉았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이 처음으로 진심처럼 느껴졌다. 상황이 아니라 방향을 선택했다는 감각이 또렷했다. 결말은 남이 아닌 내가 정할 수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글을 발행하기 전, 마우스를 쥔 손이 잠시 멈췄다. ‘발행’ 버튼은 작았지만 두려움은 컸다. 아무도 읽지 않으면 어쩌지, 후회하게 되면 어쩌지. 심장이 크게 뛰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천천히 버튼을 눌렀다. 손끝은 떨렸지만, 이번만큼은 물러서지 않았다.


며칠 뒤 도착한 메시지 한 줄이 나를 붙잡았다.


“당신 글을 읽고 오늘을 버텼습니다.”


짧은 문장이었지만 분명한 온도가 담겨 있었다. 나는 문장을 여러 번 읽었다. 내가 고른 마지막 줄이 누군가의 하루에 작은 숨구멍이 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날 이후 나는 글을 쓸 때마다 한 사람의 하루를 떠올리게 되었다. 나를 살리기 위해 적은 문장이 또 다른 누군가를 붙잡을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


이제 나는 안다. 삶은 여전히 흔들리고 정류장마다 멈출 것이다. 불안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겠지만, 마침표는 내가 찍을 수 있다. 나는 더 이상 흐름에 나를 맡기지 않는다.


아침에 눈을 뜨면 잠깐은 불안이 먼저 찾아온다. 그러나 이제는 감정을 밀어내지 않는다. 창문을 열어 새로운 공기를 들이고 따뜻한 물을 마신 뒤 책상 앞에 앉는다. 거창한 다짐 대신 한 줄을 적는다. 작고 느린 문장이라도 괜찮다. 어제와 다른 방향을 택했다는 사실이면 충분하다.


예전의 나는 정답을 찾는 사람이었다면, 지금의 나는 의미를 고르는 사람이 되었다. 빠르지 않아도 괜찮고 남들보다 늦어도 상관없다. 내가 이해하고 받아들인 선택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결말은 거창한 성공이 아니라, 자신을 배신하지 않는 방향이라는 것을 이제야 배웠다. 오늘의 나는 어제보다 덜 흔들리고 조금 더 단단해졌다.


가끔은 여전히 흔들린다. 선택이 틀렸던 건 아닐지, 돌아가는 길이 더 안전하지 않았을지 생각이 고개를 든다. 그럴 때마다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지금의 나는 어제보다 솔직한가. 남의 기대가 아니라 나의 마음을 따라가고 있는가. 완벽한 답을 내놓지 못해도 괜찮다. 적어도 도망치지 않고 서 있으려는 나를, 이제는 내가 먼저 인정해 주기로 했다.


나는 오늘도, 내 이름으로 결말을 고르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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