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달이 차오른다

by 꿈담은나현

가끔은 멈춰버린 꿈이 나를 바라보며 조용히 꾸짖는 것 같았다. 빛나야 한다는 압박과, 아무리 해도 달라지지 않는 현실 사이에서 나는 천천히 바래졌다. 그럴 때마다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완전히 차지도, 완전히 사라지지도 않은 달이 거기 있었다. 불완전했지만, 그 모습이 이상하게 위로되었다.


어릴 적의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더 선명하게 느꼈다. 교실 창문을 타고 들어온 햇살보다 책 속의 문장이 더 따뜻했고, 문장 안의 인물들이 내 손을 잡아주었다. 친구들이 운동장에서 뛰어놀 때, 나는 마법을 배우고 비밀을 풀며 아직 모르는 나를 찾아다녔다. 아무도 모르게 내 안에서 자라나는 온기가 있었다. 그것은 세상이 알려주지 않은, 나만의 빛이었다.


책장은 나에게 또 하나의 창이었다. 그 너머에는 정의가 있었고, 따뜻함이 있었고, 누군가를 구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현실이 차가워질수록 나는 그 세계에 더 깊이 숨었다. 상상의 세계는 내가 지키고 싶은 도리이자, 숨 쉴 수 있는 틈이었다. 그곳에서는 누구도 아프지 않았고, 마음이 무너져도 다시 세워졌다.


스무 살이 되자 세상은 얼굴을 바꾸었다. 정해진 길 위에 수많은 발자국이 찍혀 있었고, 나도 그 위를 따라 걸었다. 그러나 그 길의 끝은 언제나 누군가의 이름으로 막혀 있었다. 형광등의 냉빛 아래에서 나는 낯선 세상의 냉기를 배웠고, 그 속에서 점점 작아졌다. 사적인 질문들이 공기의 결을 흐트러뜨렸고, 그때마다 마음 한켠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세상을 탓하지 않았다. 오히려 불편한 온도를 견디며 사람의 민낯을 배웠다. 제과제빵의 달콤한 향, 회계 교재의 잿빛 숫자들 속에서도 나는 여전히 길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손끝에 남는 건 언제나 ‘내가 아닌 무엇’이었다. 노력은 산처럼 쌓였는데, 내 안의 불씨는 점점 작아졌다.


어느 날 문득 시계를 봤다. 바늘은 움직이고 있었지만 내 시간은 멈춘 듯했다. 친구들은 결혼하고, 누군가는 이직하며 새로운 계단을 자신만의 속도로 오르고 있었다. 나는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커피잔 위로 피어오르던 김이 사라지는 속도조차 부러울 만큼, 내 일상은 느리게 흘렀다. 그때의 나는 시간을 따라가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버티는 사람이었다.


잠들지 못한 밤이 이어지고, 불 꺼진 방 안에서 스스로에게 자꾸 물었다. “나는 정말 잘하고 있는 걸까?” 물음은 처음엔 작은 바늘 같았지만, 점점 커다란 구멍이 되었다. 모든 것이 멈춘 듯한 공기 속에서 내 안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나는 왜 이렇게까지 살아야 할까.’ 그때는 몰랐다. 달이 완전히 차오르기 전에는 반드시 어둠이 필요하다는걸.


달이 기울 때마다 어둠은 나를 새로 빚고 있었다. 무너지는 동안에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빛은 자라나고 있었다. 어둠은 나를 고요하게 만들었고, 고요는 생각을 낳았다. 그 생각 속에서 나는 조금씩 방향을 찾아갔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건 실패가 아니라 준비였다.


서른의 어느 밤, 퇴근길에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사이로 은빛이 스며들며 나오고 있었다. 완전히 둥글지도, 그렇다고 사라지지도 않은 달이었다. 그 빛은 차가운 듯 따뜻했고, 멀지만 이상하게 가까웠다. 나는 달이 내 마음 같다고 생각했다.


달빛이 내 얼굴에 닿았다. 빛은 조용했지만 단단했다. 나는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말했다. “괜찮아, 이제 조금 늦어도 돼.” 바람이 머리카락을 스쳤고,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그 눈물은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오래된 얼음이 녹듯, 마음이 천천히 따뜻해졌다.


그 순간, 나는 아직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한때 상상의 세계 속에 머물던 내가 이제는 자신만의 문장을 만들고 있었다. 잉크의 향이 공기 속에 번지고, 키보드가 눌릴 때마다 마음의 깊은 곳에서 파문이 일었다. 새벽 두 시의 방은 고요했지만, 고요 속엔 희미한 생명이 있었다. 모니터의 불빛이 잿빛 마음을 비치며 달빛처럼 은은히 번져갔다.


글을 쓴다는 건 내 안의 어둠을 바라보는 일과 닮아 있었다. 문장을 쓸 때마다 마음의 가장 깊은 부분이 드러났다. 그곳에는 두려움과 욕망, 부끄러움과 희망이 함께 눌러앉아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감정들을 꺼내놓을수록 마음이 가벼워졌다. 상처를 가리던 손을 천천히 내려놓을 때, 나는 비로소 나를 용서할 수 있었다.


포기하고 싶은 밤이 찾아올 때마다 창문을 열어 하늘을 본다. 구름에 가려져도 달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빛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어둠이 빛을 더 선명하게 만든다는 걸 이제는 안다. 내가 넘어진 자리마다 작은 별빛이 자라났고, 빛들이 길을 만들었다.


달은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차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결국 내가 다시 나로 돌아오는 과정이었다. 완전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 부족함이 내 안의 인간다움을 증명하고 있었다. 어둠을 통과한 달빛은 더 깊고 부드러웠다. 오늘의 나도, 내일의 나도, 그렇게 조금씩 빛을 배워가고 있다.


창문 밖 달빛은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방 안의 공기가 잔잔히 떨렸고, 새벽의 냉기가 손끝에 닿았다. 나는 천천히 커피잔을 들어 남은 온기를 느꼈다. 마치 아직 식지 않은 마음처럼, 내 안의 작은 불씨도 그렇게 미세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언젠가 이 불빛이 다시 세상을 비출 날이 오겠지. 나는 믿음을 품고, 오늘도 조용히 한 줄의 문장을 이어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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