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작

정말 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일까(망설임 끝, 1번 신청자)

by seon


휴대폰을 손에 쥔 채 멍하니 앉아 있다.

35년을 쉼 없이 달려온 내게, 이 고요함이 낯설다.

새벽 5시 30분이면 어김없이 떠지는 눈.

별을 보며 시작하던 하루, 어둠이 채 가시기 전 집을 나서던 발걸음.

몸은 여전히 그 시간을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다.

바쁘게 살 땐 ‘언젠가 쉬고 싶다’고 했으면서,

막상 시간이 생기니 ‘이렇게 시간을 죽여도 되나’ 싶은 죄책감이 밀려온다.


어느 날, 습관처럼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가 도서관 앱을 열었다.

그리고 발견했다. 영어 원서 읽기 프로그램.

가슴이 뛰었다.

퇴직 후에도 여전히 영어가 좋았고, 잘하고 싶었고, 계속하고 싶었다.

이거다 싶었다.

그런데.

“내가 잘할 수 있을까?”

“다른 사람들한테 피해 주는 건 아닐까?”

“중도에 포기하면 어쩌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망설이고, 망설이고, 또 망설였다.

그러다 ‘그래도 한 번 해볼까?’ 하고 신청 버튼을 찾았을때,

이미 마감.

허탈했다. 아까웠다.

또 하나의 기회를 내 손으로 날려버렸다.


두 번째 기회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로부터 며칠 후, 같은 도서관에서 같은 프로그램 신청이 떴다.

이번엔 달랐다.

생각할 시간도 주지 않고 바로 눌렀다.

신청 완료. 1번.


첫 모임에서 만난 사람들은 이미 몇 권의 책을 함께 읽어온 동지들이었다.

모두의 눈빛에 열정이 있었고, 꾸준함이 있었다.

‘아, 이거 제대로 한번 해보자.’


새해 계획이 뭐냐고 물으면 이제 나는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혼자가 아닌 여럿이서, 영어 책을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간을 갖는 거요.”

35년을 바쁘게 달려온 내가 이제는 나를 위해 무언가를 선택하고 있다.


망설임의 대가를 치른 후에야 깨달았다.

기회는 망설이는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1번으로 신청하는 용기가, 새로운 시작의 첫걸음이라는 것을.


시간을 죽이는 것에서 시간을 살리는 것으로 나의 2026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작가의 이전글7년만에 다시, 물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