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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우리 가족 그리고 나.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항암치료에 대한 슬픈 경험을 기록

by 김헤수스

의사: 표적 항암치료가 전혀 들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나요?

의사: 다음 치료 방법인 복용하는 항암 약을 처방해 드릴테니, 그걸 드시면서 경과를 살펴봅시다.

어머니: 그럼 지금까지 한 치료는 정말 아무런 효과가 없었던 건가요?

의사: 지금 상태를 봐서는 오히려 더 나빠진 상황이라서 말씀 드릴 수 있는 건 쉽게 말해서 종양에는 3가지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항암약을 맞아서 줄어드는 암세포. 두번째는, 항암약을 맞아서 크지도 줄어들지도 않고 그대로 있는 암세포. 세번째는 항암약을 맞아서 오히려 더 성장하는 악성 세포. 아무래도 환자분께서는 세번째 질이 나쁜 암세포를 가지고 계시다고 밖엔 말씀드릴 수가 없네요.

어머니: 그러면, 그걸 더 빠르게 확인하고 어떻게든 방법을 바꿔볼 수가 없을까요?

의사: 지금 방식대로 잘 진행을 하시면서 계속 CT와 MRI를 촬영하면서 상태를 체크해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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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첫째주 아버지의 항암치료가 시작되었다. 서울 S 병원의 간암센터장인 교수의 치료 진단과 혈액종양내과 - 혈액종양내과에서는 항암 치료를 위한 방법을 암 센터와 긴밀하게 협업하는 곳이라고 한다. - 의 교수가 1주일 간의 시간을 갖고 번갈아 외래 진료를 통해서 어떤 치료가 적합한지 어떻게 치료를 해야 하는 것인지 안내해 주었다. 간암센터장인 교수의 설명은 솔직히 우리에게 사형선고와 다름이 없었고, 자세한 설명도 없었기에 그저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써야할 지 고민하는 가족들의 번뇌와 고통만 깊어졌었다. 하지만 혈액종양내과의 교수는 긍정적인 이야기들을 해주기도 했고 예를 들면 표적 항암치료 주사를 통해 긍정적으로 완화가 된 환자의 비율이라든지 최신 항암치료의 우수성이라든지를. 설명해주었고, 아버지가 항암치료를 받기 위해 굳은 마음을 먹을 수 있도록 설명해주었다.


항암치료는 약 3주에 한 차례씩 진행되었다. 그렇게 4회를 맞으면 약 3개월이 흐르게 되는데 이때 다시 MRI와 CT 등을 촬영해서 아버지의 상태를 체크하자고 하였다. 아버지는 진료를 시작한 지 한 주만에 항암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너무나도 빠르게 진행될 수 있었던 항암치료라고 생각하며 - 여러 상급병원에 전화하여 외래진료를 잡으려고 했었지만 1주일 만에 외래진료를 받을 수 있던 곳은 서울 S 병원 뿐이었다. - 아버지가 살아날 수 있는 긍정적 지표라고 생각했다. 그러기를 바랄 수 밖에 없었으니까.


아버지는 항암치료를 받는 시간 속에서도 입맛을 잃지는 않으셨다. 얼굴이 노랗게 되지도, 않으셨고 아버지 당신이 가진 생명력 자체가 금방이라도 꺼질 사람 같이 보이지 않았다. 어느 날엔 통증이 심해서 펜타닐과 복용하는 진통제를 드셔도 잠을 설치거나 끙끙 앓는 밤도 있으셨지만, 그래도 아버지는 자녀인 누나와 나에게 '못 하겠다' 거나 '그냥 안 아프고 편해지고 싶다'는 말씀은 단 한 번도 없으셨다. 아버지는 끝까지 잘 이겨내서 우리와 함께 하던 등산을 갈 것이라고 이야기 하셨고, 간성혼수에서도 정신이 조금 돌아오셨을 때는 어머니에게 내가 사드렸던 여름 샌달을 잘 챙기라고, 아들이 사준 비싼 샌들 잘 챙겨서 집에가서 신을거라는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자녀인 우리는 갓 마흔을 넘긴 딸과 곧 마흔이 되는 아들이 자라면서 각자의 생활이 모두 생겨버려서. 독립하여 각자의 삶을 유지하고 있다 보니 특히 최근에 나는 집에 부재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았다. 나가서 어떻게든 자리를 잡고자 부단히도 노력하고 부단히도 힘든 노력을 통해서 드디어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상황이 조금씩 만들어지고 있었다. 여담으로 누나와 나는 박사를 받기 위해서 약 10년의 세월을 수학을 했다. 누나는 시인으로서 문예창작으로, 동생인 나는 경영학 박사를 받기 위해 10년이라는 세월을 보내서야 간신히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었고, 우리는 모두 특정한 학교에서 나름대로 '교수'라는 직함으로 학생들에게 강의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누나와 나의 이러한 사정만 아는 모든 주변인들은 그래도 부모님에게 효도했다는 말들을 했는데, 해드리지 못한 부분만 계속 생각나고 뭐가 그리 바빠서 더 자주 같이 시간을 보내지 못했는지 그런 생각들만 난다. 진심으로 없어지기 전까지는 모르는 것이다.


3번째 항암치료를 할 때 쯤이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자꾸 간이 붓는 것 같다는 말씀을 하셨고, 나는 간이 어떻게 붓는지 모르기 때문에 간이 붓는다는 말씀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 같다. 아버지는 계속 옆구리의 통증을 호소하셨고, 같이 병원에 진료를 보러가서 이야기해보자는 말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이 때가 4월 말 5월 초쯤이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계속되는 통증에 진료를 받으러 가서 통증이 심해서 잠을 잘 수가 없고 진통제도 안듣는 다는 말을 하셨다. 의사는 혹시 모를 전이에 대해서 검사를 위해 MRI와 CT 촬영을 권장하였고 아버지는 대략 3번째인가 4번째인가 하는 촬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의사: 척추 뼈쪽에 암세포가 전이된 게 확인이 됩니다.

아버지: 지난 번에는 뼈 전이가 없었다고 하셨어요.

의사: 뼈 쪽에도 전이 같은 형태가 보였었는데, 지금 상황으로는 조금 더 커져서 척수를 압박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요. 이렇게 암세포가 더 커져서 척수를 계속 압박하다보면 척수가 제 기능을 할 수가 없어서 하반신 마비와 같이 심각한 상태로 진행될 수 있습니다.

아버지: 그럼 어떻게 해야되요?

의사: 뼈에 있는 암세포의 성장을 억제하기 위해 방사선 치료를 해야합니다. 방사선 치료는 무조건적으로 암세포의 성장을 멈추게 하는 치료이지 낫게 하는 치료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방사선 치료가 갖는 위험성에 대해서는 환자들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나와 우리 가족은 의사가 아니라서 잘 모르는 게 많다. 당연하다. 처음 찍었을 때 암세포가 뼈에는 전이되지 않았다는 말을 들으면서, 우리는 그래도 말기암 환자이지만 뼈 전이가 없으니까 어떻게든 치료를 통해서 조금이라도 더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었는데. 표적 항암치료를 하면서 척추쪽에 전이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그 희망마저도 사그러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아빠의 방사선 치료가 병행되었다. 암 진단을 받은지 약 2달이 채 안되는 시간이었다.


방사선 치료는 보통 많은 양을 한 번에 맞거나, 이걸 쪼개서 여러차례 맞거나 한다고 알려주었고 아버지의 경우는 5회로 나눠서 매일 같이 방사선 치료를 하기로 했다. 목요일 저녁 11시 50분에 시작해서 아버지는 그 다음주 수요일에서야 방사선 치료를 끝낼 수 있었다. 처음 방사선 치료를 하신 날, 내가 평택 본가에서 서울 S 병원까지 모시고 오고가고 했는데 아버지는 방사선 치료 후 너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거기다가 통증까지 많이 줄어들었다며 마치 다 나은 것처럼 괜찮아 하셨다. 하지만 나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방사선치료가 가져온 영향이 너무나도 힘들었고, 이 때부터가 진짜 암치료의 시작이라는 듯한 걱정들을 너무 많이 들었기에 아버지의 상태가 너무나도 걱정되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나의 걱정은 기우에 그쳤고, 아버지는 방사선 치료를 정말이지 아무렇지 않게 견디셨던 것 같다.


방사선 치료는 정말이지 금방 끝났다. 정해진 시간에 방사선과로 가서 대기하다 보면 아버지를 불렀고, 아버지는 금방 들어갔다가 10분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 다시 나오셨는데, 방사선을 몸에다가 쏘는지도 모를만큼 짧은 시간이었고 빛이나 아무것도 느낌이 없는데 특정한 동작으로 누워서 가만히 있다보면 시작했고, 끝이 났다고 말씀 하셨다. 방사선 치료를 받기 위한 전후 과정. 그러니까, 어디에 어떻게 방사선을 쏘아야 할 지에 대한 준비과정과 방사선 치료를 매일 같이 받으러 오는 과정이 제일 힘들었던 것 같다.


나의 아버지는 우리 가족 중 유일하게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에 대해서 유독 비중이 큰 분이셨다. 엄마는 지금까지도 본인이 뭐가 맛있다고 하시지 못할 만큼 음식에 대해서는 먹는것도 만드는 것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으신다. 그런 아버지는 건강을 생각하는 식사를 챙기는 것에 가장 어려움이 있으셨는데, 모든 암의 관리가 그렇겠지만 먹는 것을 건강식으로 잘 챙겨야지만 된다는 의사와 여러가지 매체 자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누나와 나랑 함께하는 식사에서는 그렇게 외식을 하고 싶어하셨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도 우리는 아버지가 우리모르게 어머니에게만 말씀을 하셨다고 하는데

"자식들보면 어떻게든 잘 치료받아서 7년 정도만 딱 더 살고싶어. 딱 7년만"


우리는 왜 7년인지 아직 잘 모르겠는데, 아버지의 결심을 비웃듯이 아버지의 암세포는 열심히 받은 치료에 반응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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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중에 암 환자가 있는 경우 대부분 암 치료에 대해서 그 치료 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누구보다 암에 대한 전문가들이 되는 것 같다. 네이버를 비롯해서 암치료와 관련된 실제 환자 가족들 그리고 환자 본인들이 자신들의 사례와 정보를 공유하는 커뮤니티들이 굉장히 크게 활성화 되어 있다. 우리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러한 커뮤니티에서 다양한 정보들을 검색하고 아버지의 컨디션을 물어보거나 치료 방식에 대해서 맞는지 등을 사람들에게 물어보곤 했는데, 의사의 적극성과 치료에 대한 더욱 몰두할 수 있는. 그런 어떤것도 아니지만 환자 가족들에 대한 위로와 격려를 받고, 이 치료 방법이 어떤 것인지 등에 대한 정보를 가장 잘 파악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특히 아버지의 치료 방식은 표적항암치료로서 항암주사를 4회 정도 맞고 MRI 촬영을 통해 약이 잘 안듣는 것 같아서 2회정도 더 진행한 후 입으로 복용하는 항암제인 '렌비마'를 처방 받았는데 모든 사람들이 그게 하나의 프로토콜같은 거라고 말을 해주었다. 최근 진행하는 항암 치료의 가장 최신화된 방식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최신이든 최고이든 우리 아버지에게는 듣지 않았던 것이 가장 큰 불행이었다.


혹시라도 항암치료를 하는 가족들이있다면, 우리처럼 의사가 하라는 대로 잘 따라하고 다양한 정보들을 찾아봄에도 불구하고 그 끝은 정말 어떻게 손 써볼 도리가 없이 허망하게 가족을 떠나보낼 일에 대해서 상상하고 싶지 않아도 할 수 밖에 없음을. 잔인하지만 병이 그렇게 나쁜 병이라는 것을 이야기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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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와 있다. 시차때문에 현지 시간의 아침부터 눈을 떠서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써내려가면서 계속 울다가 그쳤다가를 반복하면서 아버지를 떠올리고 있다.

나는 정말 솔직하게 아버지가 항암치료를 하는 순간부터 어떻게든 연명치료라는 마음으로 최소한 1년을 생각했었는데, 정말 순식간도 같은 3개월밖에 버티지 못했던 그 시간 속에서. 종강을 하고 여름이 되면 먼 곳으로 여행을 가자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미리 예약해뒀던 이곳에 와 있다. 일정을 완벽하게 함께 잡을 수가 없어서 하루 먼저 도착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특정한 목적지 없이 걷고 또 걷고를 반복하며 아무도 나를 알아볼 수 없는 이 곳에서 나는 계속 우리가 손을 쓸 수 없었던 큰 상실감을 어떻게든 마주하고자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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