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디 짧은 항암치료 끝에 우리 곁을 떠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25년 6월 25일 저녁 8시쯤, 아버지의 심장이 급격하게 멈추기 시작했고 당황한 우리는 다급하게 간호사를 불러서 아직 옆에 없는 가족. - 그러니까 우리 가족 아버지, 어머니, 누나 그리고 나로 돌아가는 균형 속 우리 가족. - 누나가 오고 있다는 말을 했더니, 심장을 더 뛸 수 있도록 주사를 꽂아 넣고 숨을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게 손으로 공기를 불어넣는 도구를 써서 아버지의 숨을 잠깐이라도 유지할 수 있게 해주었다.
아버지의 심장이 뛰고 있는 게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목에 있는 동맥이며 너무나도 살이 빠져 뼈만 간신히 두르고 있는 살가죽위로 쿵쾅거리는 심장이 아직도 열심히 제 기능을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심장이 곧 멈출 것이기 때문에 오지 못한 직계 가족들을 빨리 부르라고 한다. 엄마와 나는 병동이 떠나가라 아버지를 불렀고 동네의 종합병원 수준의 병동에서 너무나도 큰 울음소리와 부르짖는 소리를 들은 병동 사람들이 조금씩 무슨 일인지 보기위해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서울 S 병원에서 더 이상 손을 쓸 수 있는 게 없으니 마지막으로 가시는 길 편안할 수 있도록 호스피스 혹은 고통이 없는 형태의 처치만 가능하다는 말을 했고 우리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온라인 속 인터넷 블로그, 게시판, 커뮤니티 등을 뒤적이며 다 포기해도 받아준 병원을 찾아보고. 심지어 텔레그램에 가입해서 '헬리콥터' 판매한다는 사람을 찾아보기도 했는데. 아무런 것도 우리는 할 수 없었고. 그렇게 서울 S 병원에서 고통 완화 치료를 결정하고 아버지가 평생 사셨던 경기도 평택의 모 병원으로 이송되셨다.
이송 후 딱 이틀이 지났던 것 같다. 사실 도착했을 때부터 병원에서 간암을 전문으로 하는 의사는 사실상 언제 돌아가셔도 이상하지 않을 컨디션이라고 말했고, 그렇게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이야기를 거듭해서 해주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다니, 죽는다니, 곧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라니' 그런 현실적인 부분에 대해서 믿음이 가지 않았고 믿을 수도 없었다. 우리 가족은 아버지와 너무 많은 애증의 관계로서 지금까지 살아왔다. 관계가 나쁠 때는 한없이 나빴고 애정이 넘칠 때는 채울 수 없을 만큼 넘쳤다. 그래서인지 애증이 가져 온 반향과 같은 그 애정은 단언하건대 다른 가정들에서는 우리의 가족을 이상하게 바라볼 정도였으니까.
아버지는 이송 후 첫 날 아주 큰 고비를 넘기듯이 심박수와 산소포화도 - 아버지는 이미 서울에서 간성혼수로 인해 혼수상태에 가까운 컨디션이셨고, 긴급 입원을 했을 때부터 심박수와 산소포화도를 집중적으로 체크하였다. - 가 정상에 가까운 범주에서 크게 떨어지거나 문제없이 하루를 버텨내셨다.
그렇게 하루 이틀이 되던 날 이틀째에 어머니의 언니인 작은 이모 - 어머니에게는 언니가 둘이 있으셨다. 그래서 우리는 편의상 첫째 언니를 큰이모, 둘째 언니를 작은 이모로 부르고 있었다. - 께서 작은 이모부 그리고 조카동생까지 병문안을 와주셔서 아침부터 저녁이 되는 시간까지 아버지가 조금이라도 낫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머리를 쓰다듬는 일부터 발끝을 주물러서 혈액순환을 돕는 일까지 정말이지 정성을 가득 담아서 하루 종일을 그렇게 해주셨다. 덕분에 나는 아버지가 하시던 개인사업 일을 정리하러 갈 수 있는 시간까지 벌 수 있었다.
우리는 이렇게 정상 범주에 있는 아버지의 몇 몇 지표들을 보면서 몇 날이고, 몇 일이고 수십일 아니 수백일이 되어도 우리 곁에만 있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혈압과 산소가 정상이라고 생각해서 잠시 집에 일을 보러 갔었다. 그래서 누나가 아버지의 심장이 멈추기 시작한 순간에 같이 있지 못했고, 아버지 마지막으로 가시는 길을 가족 모두가 지키길 바라며 급하게 전화를 해서 누나를 불렀다. 울음소리가 섞인 다급한 목소리에 누나도 패닉상태가 되어서 약 30분 정도 걸리는 거리를 간신히 달려와 아버지의 숨이 점점 사라지는 것을 함께 지켜줄 수 있었다.
누나가 온 지 딱 10여분이 흘렀을 때 아버지의 심박수와 산소포화도가 점점 떨어지기 시작했다. 심장 박동이 떨어지는게 천천히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이제 멈춤으로 달려가기 위해 한 계단, 두 계단을 건너 뛰는 것처럼 급격하게 낮아져서 우리는 너무나도 큰 슬픔에 아빠의 손, 머리, 가슴을 어루만지거나 달려들어 이곳저곳 주무르며 아버지를 목놓아 불렀고 아빠에게 사랑한다고 소리치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이미 우리의 아니 나의 정신은 아득했고 약 10일간의 긴급 입원 그리고 새벽을 지새우는 병간호로 지칠대로 지쳐있던 체력과 정신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상태로. 아빠에게 소리쳤다.
"아빠 사랑해요, 아빠 고마워요. 아빠 괜찮아. 아빠. 아빠"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이 그저 옆에서 지켜볼 수 밖에 없는 무력감으로 몇 분이고 아빠가 혹시라도 조금이라도 더 계실까봐 우리의 목소리를 들으실까봐 병원이 떠나갈 듯 소리쳤지만.
아버지는 결국 8시반쯤 숨을 거두셨고, 옆에서 아버지의 손이, 발끝이 차가워지고 눈빛이 흐려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무엇부터 해야할 지,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 지 아무것도 모르겠는데 간호사들이 와서 아버지를 장례식장으로 옮겨갈 수 있게 도와준다고 옷을 갈아입히거나 팔에 꽂아져있던 주삿바늘 같은 것을 정리해주었고 넋을 잃은 가족들은 그저 옆에서 그걸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응급실을 담당하는 의사가 와서 사망신고를 읊어주었고, 사망에 따라 자례를 위해서 병원 입원 종료 수속과 여러가지 행정 절차를 하라고 사람들이 나에게 일을 주었다. 여기로 가라, 저기로 가라, 이거 하면 된다. 아무 생각 없이 사람들이 하라는 대로 하다 보니까, 병실에서 아버지는 옷을 갈아입고 장례식장으로 옮겨갈 준비가 벌써 마쳐져있었다.
아버지가, 우리 아빠가 더 이상 우리와 함께 식사할 수 없고, 우리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없고, 듣고 싶을 때 전화할 수 없고, 목소리도 들을 수 없고, 가끔은 힘들었지만 아빠와 우리의 시간을 보내면서 추억을 쌓을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파도처럼 들이닥치자 이게 현실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과 나를 포함한 모든 것들이 제 3의 존재처럼 느껴졌다. 엄마는 왜 울고 있지? 누나도 울고 있네? 왜 사람들이 울고 있지? 왜 아빠를 누운채로 어디로 데려가지? 이게 무슨 일이지?.
나의 아버지는, 우리의 아빠는 정이 정말 많은 사람이었다. 어쩌면 엄마에게는 극단적으로 좋을 때와 나쁠 때가 뒤섞여 있어서 아빠를 떠나지 않고 지켜온 엄마의 정신과 그 이해할 수 없는 애정은 지금까지도 사실 받아들이기는 어렵지만 그만큼 서로 간의 관계가 깊었던 것 같다. 정이 많던 아버지는, 우리에게도 엄마에게도 또 주변사람들에게도 많은 정을 주어서, 떠나는 마지막까지 친구들도 와서 함께 슬픔을 덜어주고, 눈물을 흘리고 가셨다.
사실 지금까지도 잘 믿기지 않는다. 집에 가면 아빠가 밝은 목소리로 나를 맞이해줄 것 같고, 밥은 드셨는지 오늘은 뭐 하셨는지 필요한 건 없으신지 금방이라도 "아들"하고 부르면서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제는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만질 수 없다는 게 정말이지 가슴이 찢어지는 듯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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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25년 2월 말, 1년 동안 몸무게가 10kg이 빠졌다면서 건강에 대한 걱정을 내비치셨다. 우리 가족들은 아버지의 생활 습관을 탓하며 - 평소 아버지는 57년생으로 태어나셔서 '향년 68세', 서른을 넘긴 이후로 특별하게 몸관리나 건강관리, 특히 운동 같은 것을 하지 않으셨다. 그럼에도 주변에 있는 동네 친구와 선후배들가의 사이가 돈독해서 한 달이면 서너번씩 새벽까지 술을 드셨고, 술을 드시면 꼭 노래방에 가서 노래를 부르셔야만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최근 한 6-7년 동안에는 보다못한 어머니가 귀가시간도 정해봤고, 시간을 넘기면 술집이나 노래방으로 찾아가셔서 기어코 어머니의 손으로 집까지 끌고오듯 데리러 온 적도 비일비재 했다. 일반적인 가정이라면 '그러고 어떻게 사느냐' 하겠지만 그것이 엄마와 아빠의 균형이었다. 물론 자녀인 누나와 나도 엄마에게 이렇게 사는 건 사는게 아니라고 그냥 둘이 헤어지라고 몇 번을 이야기했었지만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아빠를 버리는 것은 엄마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몸무게가 너무 많이 빠지는 것을 걱정해서 평택에 있는 G 종합병원에 가셔서 증상을 이야기하고 CT를 찍으셨다. CT의 결과로 의사선생님은 본인이 전공의나 전문의는 아니지만 간암 말기로 판단된다는 말을 하셨고, 마침 방학 중이었던 누나와 나는 최근 큰 상실을 경험한 누나의 여행 메이트로서 태국 치앙마이 여행을 행복하게 마치고 돌아온 지 한 2-3일 지난 후 아버지의 암 말기 판정 소식을 듣고 하늘이 무너지는 듯 했다.
암의 말기. 라는 소리를 듣고 국내 암 치료 병원 중 가장 좋은 곳들을 검색하고 수소문을 시작했다. 서울대병원, 국립 암센터, 아산 병원, 서울 삼성병원. 모든 곳을 통화한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의 평은 전반적으로 비슷한 수준에서 치료를 하고 선진화된 치료 방식으로 왠만해서는 말기 암 환자도 치료가 가능할 수 있다는 이야기들이 꽤 많았다. 그래서 우리는 연락했던 병원 중 가장 빠르게 진료를 받을 수 있는 S 병원으로 예약을 잡았고, CT 결과 이후 딱 일주일 뒤 S 병원에 외래진료로 방문할 수 있었다.
CT 사진과 검사 자료들을 들고 S 병원 내 암센터에서도 간암 센터의 센터장을 만나 아버지의 진단을 들을 수 있었는데, 그 이야기는 정말이지 처참했다.
의사: "네, 말기 암 입니다."
"(침묵)"
한 40초, 1분에 달하는 침묵 이후
의사: "이 상태라면 3개월에서 6개월밖에 볼 수가 없습니다."
마치 영화에서나 보던 장면을 내가 직접 듣고 있는데 다리가 풀려서 주저 앉을 뻔 했다. 부모님도 참담한 마음에 말을 이어나갈 수가 없었다.
나: "선생님 그러면 치료할 수 있을까요?"
의사: "치료를 안하면 3개월, 6개월 밖에 못 사니까 표적 항암치료를 하면서 경과를 지켜봐야 돼요. 지금으로선 완치를 할 수도 없고 상태가 워낙 나빠서 예후를 지켜보는 게 중요합니다. 간암 치료와 혈액종양 쪽 선생님이 항암치료를 진행해줄 것이니 그 교수 만나서 어떻게 항암치료할 지 들어보고 우리는 항암치료 시작 하고 다시 만납시다."
나: "선생님, 그럼 급격하게 나빠져서 금방 돌아가실 수도 있고 그런건가요?"
의사: "그건 환자 상태에 달렸습니다. 예측할 수 없어요. 더 확실한 검사를 위해서 오늘부터 MRI랑 CT 다시 찍고 피검사 하겠습니다."
일주일을 기다려서, 병원에서의 대기 시간 약 1-2시간을 기다렸다가 의사를 만나서 들은 이야기는 이게 전부였다. 병원에 함께 갔던 건 강의를 가야했던 누나를 빼고 아빠와 엄마 그리고 내가 같이 갔었는데 우리 모두 "3개월~6개월"이라는 이야기에 각인되어 서로 아무 말도 나눌 수가 없었다.
착잡한 마음 속에서 간호사가 잡아 주는 다음 일정을 기다리며 아버지와 어머니는 같이 앉아 계셨고, 이윽고 간호사의 호명으로 이야기를 들으러 갔다. 간호사는 표적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아버지의 혈액 샘플을 보내는 내용을 이야기 해 주었는데 비용이 약 300만원 정도들었고 시간은 3주정도 소요된다고 했다. 치료를 해서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같이 살 수 있다면, 300만원이 대수겠느냐고 우리는 흔쾌히 허락을 했고 심지어 센터장의 연구에 필요한 샘플 수집에도 단순히 동의를 하면 피를 뽑아 향후 시험적인 약물치료나 치료 방식이 맞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알아본다고 하여 이 모두 동의를 했다. - 그러나 실질적으로 아버지에게 도움이 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특히, 미국으로 갔다던 300만원짜리 결과에 대해서는 제대로 듣지도 못했던 것 같다. -
나: "그래도 치료를 안하면 3~6개월인데 치료를 시작하면 지속적으로 연명을 할 수 있는 치료가 될거야. 그러니까 아빠 엄마 지금부터 힘을 내서 치료를 받아보자"
아빠, 엄마: "(침묵)"
사형선고와 다름 없었던 진단을 듣고 우리는 더 말을 이어 나가기가 어려웠고, MRI와 몇몇 피검사 촬영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서도 우리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아버지의 짧고 짧은 3개월 항암치료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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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는 이유는 한 달이 지난 지금 무던하게 덤덤하게 어떻게든 버텨내고자 삶을 살아가면서도 계속해서 찾아오는 아버지의 치료 시간, 상실에 대한 슬픔 등을 마주하고 상실감을 견뎌내고, 또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지금처럼 생생할 때 하나라도 기록해두고 싶은 마음에. 이 글을 쓴다.
이 글을 쓰면서 타이핑을 몇 번이고 멈추면서 큰 울을음 몇 번이나,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하지만 쓰고 써서, 언젠가라도 아버지가 보고 싶을 때,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조금 연해질 때 꼭 다시 볼 수 있도록 아버지를 평생 함께하는 마음으로 기리기 위해 눈물을 흘리다가도 참아가며 이 글을 쓴다.
간혹 나오는 항암치료 이야기에서는 말기 암 환자를 둔 가족들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면서 어떤 위로나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