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멈춰서는 11번홀

빛나는 순간이더라

by Even today



요즘 나는 문득문득 눈물을 찔끔찔끔 흘린다. 감수성이 유난히 풍부해진 시기인 것 같다. 갱년기도 아닌데 이제 고작 서른을 넘긴 지금, 가끔 그런다.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낯선 땅 호주에 발붙이고 살 날이 이제 얼마 안 남았다는 걸 어렴풋이 느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8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름 열심히 살아왔고, 괜찮은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함께 골프 칠 친구들도 생겼고, 놀러갈래? 하고 그냥 여기저기 물어보면 간다는 지인 15명을 데리고 캠핑도 가던 나지만 이제는 오히려 혼자있는 시간이 좋다.




마당에 나가 동화책을 읽고, 커피를 내려 햇살 받으며 오늘은 무슨 글을쓸까 하며
타자기를 두드리는 그런 시간. 사람을 싫어하는 건 아닌데, 혼자 있는 게 조금 더 편하다.

친해지면 누구보다 말이 많은 나지만, 굳이 말을 꺼내지 않으려는, 조용하지만 단단한, ‘기존쎄’ 같은 사람.

요즘은 길을 걷다 울컥하는 날이 많다. 그럴 때면 더더욱 다짐한다. 마지막까지 후회 없이, 야무지게, 잘 살고 가야겠다고.

출근길에 마주치는 숲길. 그늘진 나무들 사이로 햇빛 한 줄기가 몽환적으로 내려앉은 장면을 보면 묘하게 아름답다.


출퇴근하며 꼭 지나가는 울릉공 sea cliff bridge를 지날 때면 태평양 한가운데를 걷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 바닷속에서 내가 품에 안겨 있는 듯한 느낌에 괜히 코끝이 찡해진다.

하지만 내 일상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은 주말, 걷는 골프를 할 때 찾아온다.


특히 11번 홀에서 12번 홀로 걸어가는 길.

약 500미터 정도 되는 그 길에서 바라보는 골프장 풍경은 매번 나를 멈추게 만든다. 몽환적이고 신비롭고 아름답다.


골프장이라는 공간, 볕을 받아 반짝이는 자연, 그리고 그 속의 나. 매번 똑같은 생각이 든다.

“이 그늘진 숲에도 어딘가는 햇볕을 받아 빛나는 나무가 있다.”
그건 자연이 그에게 준 선물. 그리고 나는 문득 생각한다. 나도 저런 나무처럼, 지금 이 순간 빛나고 있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좋아하는 스포츠를 함께하고, 따뜻한 볕 아래에서, 아무 걱정 없이 걷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참 복받은 사람이다.

그날도 그랬다. 아무 말 없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함께 걷던 언니가 말했다.
“이 길 너무 아름답지 않아? 골프장도, 이 고요함도… 너무 감사해.”
같은 포인트에서 같은 감정을 느꼈다는 사실이 어쩐지 가슴을 울렸다. 사진으로는 전혀 담기지 않는 그 아름다움은 같은 곳에 선 사람만이 느낄수 있다.




이런 장면을 감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감사할 줄 알며 이 순간을 사랑하는 사람일 것이다. 감사가 있어야 비로소 눈에 보이는 것들. 햇살도, 뷰도, 나무도. 골프를 치다 보면 가끔 그런 순간이 찾아온다. 공이 어떻게 굴러갔는지는 중요하지 않은, 오직 그 장면만으로도 충분한 어떤 순간들.




나는 그때마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와… 나는 진짜 복받았다. 지금보다 더 행복할 수 있을까?”
이보다 더한 행복을 바란다면 그건 욕심 아닐까?
지금의 나는 이 햇살처럼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



요즘은 골프가 아니어도 그런 순간들이 온다. 하지만 눈앞의 공만 바라보면, 눈앞의 경제 상황이나 현실만 바라보면, 하늘을 볼 수 없고 숲도 보이지 않는다. 결국 전체적인 걸 다 놓치게 된다. 여태 그렇게 살아온 건 아닐까.

그래서 다시 다짐한다. 나에게는 아직 살아 있는 열정과 생기,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이 많다. 행복할 순간도 아주 많다. 그러니 그 자리에서 느끼는 행복과 감사함을 놓치지 말자. 너무 아름다워서 울고 싶은 건 이상한 게 아니니까 그냥 마음껏, 만끽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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