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동생 생일을 이틀 앞두고, 오랜만에 삼 모녀 만나러 가는 신나는 날.
동생에게 줄 꽃다발을 사려다가, 문득 세상에 하나뿐인 내 동생을 낳아준 엄마께 드리고 싶은 마음에, 엄마가 제일 좋아하시는 보라색 소국으로 한 다발 사서 가는 길이다.
(사실, 꽃은 받는 사람보다 꽃을 주문하고, 포장해서 가져가는 그 과정에서의 설렘이 더 가득하다.)
한참을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
한참을 동생의 이야기를 듣고,
한참을 나의 이야기를 하며,
우리는 시간을 함께 했다.
엄마는 아빠를 만나 결혼한 이야기를 해주셨다. (전에도 들은 적 있지만, 언제 들어도 새롭고 재미있다.)
당시 간호사였던 엄마는 포천 외숙모댁에서 하숙을 하고 계셨고, 아빠의 바로 위 누나였던 우리 고모는 바로 그 담 너머에 살고 계셨다.
아빠는 베트남 참전하셨는데, 그때부터 펜팔 하던 그녀가 있었고, 귀국해서는 편지로 소통하던 그녀를 막 만나기 시작했던 그즈음.
아빠의 펜팔 그녀는 평택에 살았다고.
고모 말씀으로 그녀는 광대뼈가 툭 튀어나오고, 눈매도 매섭게 생겨 고모 맘에는 드시지 않았던 것 같다.
그에 비에 스물두 살이었던 우리 엄마는 통통하고 뽀얀 피부에 쌍꺼풀 없는 부드러운 눈매가 딱 맘에 드셨으려나. 고모 눈에 올케로 더 맘에 드는 것은 우리 엄마였다. (실제로 후에 들은 이야기로 누나랑 유난히 사이가 좋았던 아빠도 누나가 소개해준 우리 엄마한테 뿅 갔다고.(엄마 말씀))
평택 여자하고 나하고 비교가 안돼. 내가 나이도 어리지, 결혼하면 아이들에게 너무 좋을 외갓집도 생길 것 같지. (지금 생각해 봐도 외갓집은 진짜 최고였다. 방죽이 있어 고동도 잡고 놀았고, 계곡이 있어 여름방학이면 해마다 사촌언니오빠들과 신나게 놀았던 추억이 가득한 우리 외갓집이었다.) 가족 분위기 좋지. 처제도 생기지.
그래서 고모는 아빠에게 엄마를 소개했고, 맞선을 보고 나서는 함께 나오셨던 고모부가 바로 엄마한테 할아버지부터 뵙자고 하셨단다. 고모부도 고모만큼 우리 엄마가 맘에 드셨었다보다.
네 번 정도 만나셨으려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 인사드리러 갔고 그렇게 일사천리로 결혼까지 골인하나 싶었는데
오빠가 넷에 다섯째였던 엄마.
네 분의 외삼촌들은 베트남 참전하고 돌아온 스물아홉 우리 아빠가 맘에 안 드셨단다. 얼굴이 까맣고 소도둑놈 같이 생겨서 순심이 주기 아깝다고. 외삼촌 네 분이 모두 반대했었다고.
밑으로 여동생이 하나 있었던 우리 엄마는 아들 넷 후에 얻은 첫 딸이어 그런지 외할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었단다.
그때 외할아버지께서, 결혼은 순심이가 하는데 왜 너희들이 난리냐며, 책임감 있는 모습이 밥은 안 굶기겠다고. 아빠를 맘에 들어하셨다고 (두 분이 인연이 되시려고 그랬던 듯). 그렇게 네 번 정도 만나시고 결혼에 골인.
아무것도 모를 꽃다운 나이 스물두 살에 시집와서, 9남매의 막내아들인데 시어머님을 모시고 살게 되었고. 당시 군인이셨던 아빠는 엄마에게 말씀하셨단다.
"(나는 군인이니 나 없어도) 밥은 따뜻할 때 먹고요"
"어머님 삼시 세 끼는 챙겨주시고요"
그 외에는 외출도 맘대로 하고 하고 싶은 것 있으면 하고 편히 지내라셨다고.
그 시절에는 그렇게 한 두 번에서 세네 번 만나고 결혼하는 게 다반사였다 하더라도 지금 생각해 보면 네 번 만나고 친정 식구들, 친구들을 떠나 아빠만 믿고 원주로 시집간 엄마가 대단하게 느껴진다. 그 엄마를 위한 아빠의 배려 또한 그 시대엔 흔치 않았으리라.
무엇보다 엄마가 행복해하셔서 너무 좋았던 시간.
엄마랑 더 자주 만나서 잊히지 않을 옛날이야기를 더 많이 들어드리고 싶다.
다시 한 달에 한번 만나기로 한 우리 삼 모녀.
해외여행 대신 그 나라 음식을 함께 먹자시며, 국내에서도 얼마든지 해외여행이 가능하다고 하신 우리 엄마.
다음 달에 또 만나요,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