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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민서 Jun 05. 2020

조그맣고 하얀 알약 하나

나를 미치게 하는 십자가 하나



 혹시 그대는 식욕억제제를 처방받아 본 적이 있는가. 나는 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이 약은 비어있는 위가 음식물을 달라며 ‘배고프다’라는 신호를 보낼 때, 이 신호를 받아들이는 신경을 마비시켜서 배고픔을 느끼지 못하게 한다더라. 이 구역질 나는 약을 어떻게든 목구멍으로 넘기기만 한다면 굳이 삼시 세끼를 챙겨 먹지 않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른 것을 내어줘야만 하는 법. 이 코딱지만 한 알약의 부작용은 메스꺼움이나 울렁거림, 두통, 어지러움 및 불면증으로 꽤 다양한 편이다. 나는 재수 없게도 이 부작용들을 모두 경험했고, 지금도 경험하고 있다.






 식욕억제제를 처음 복용했던 날이 떠오른다. 그날 아침, 나는 잠자리에서 일어남과 동시에 쓰러졌다. 도저히 제대로 일어설 수가 없었다. A-teen의 Upsidedown처럼 위아래가 돌아가고,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심각한 빈혈 증세에 시달리는 것 마냥 무언가에 지탱해야만 일어날 수 있었다. 그때 든 생각은 ‘마약을 투약하면 이런 느낌일까’‘이러다가 골로 가겠다’였다. 이 아주 조그만 원형의 알약이 사람을 얼마나 미치게 만드는지…. 이 약은 순수한 백색에 정갈한 십자가 무늬가 박혀있는데, 정말 인간을 본연의 순수함으로 돌아가게 하려는 듯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가더라. 어쩌면 저 약의 십자가 무늬는 예수가 못에 박힌 그 십자가를 의미하는지도 모르겠다.




 


 내 키는 정확하게 154.5cm다. 이 정도면 깔끔하게 반올림 가능한 수치니 155cm라고 쳐주자. 내 키의 권장 체중은 44.5~57.7kg. 옷 태가 예쁜 체중은 44.5kg, 그냥 사람답게 잘 먹고 잘 사는 체중은 56.8kg란다. 그러니까 권장 체중 중 가장 낮은 게 미의 기준, 가장 높은 게 사람의 기준이 되는 셈이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저 권장 체중 범위에 진입해 본 적이 없다. 최고 수치가 아마 스무 살 때쯤 기록한 83kg일 테다. 애인의 말에 따르면 그때의 나는 걸어 다닐 때마다 볼살이 흔들렸다던데, 그게 그렇게 귀여웠다더라. 8년째 만나고 있지만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구석이 있다니까. 아, 이건 자랑 맞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살을 빼야겠다’라고 먼저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애인은 내가 어떤 모습이든 변함없이 날 사랑했고, 지방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 낸 부들거리는 촉감도 나쁘지 않았으며 실제로 삶을 영위하는 데 큰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가끔 책상에 앉아 있을 때 뱃살이 허벅지살 위에 얹히는 그 둔탁한 느낌이 불쾌하게 느껴지거나, 원하는 스타일의 옷을 자유롭게 입을 용기가 없어 서글픈 감정을 느낀 적은 있었다만 나는 내 모습에 만족했다. 만족했다기보다는 실망하지 않았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다. 단순히 ‘내가 많이 먹고 안 움직여서 살이 더 쪘나 보네’ 정도의 생각만 했을 뿐 ‘이걸 없애야지’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이랬던 내가 식욕억제제를 복용하게 된 계기는 다름 아닌 ‘시선’ 때문이었다.  그 시선들을 잊을 수 없다. 권장 체중 범위 내에 있었을 때, 심지어 꽤 높은 쪽에 위치했음에도 불구하고 추파를 던지던 이성과 동경 혹은 질투가 담긴 동성의 시선들을. 다른 시선들 또한 기억한다. 권장 체중 범위 외에 있었을 때, 무관심 혹은 불쾌감이 담긴 이성과 동정 혹은 묘한 승리감이 서린 동성의 시선들을. 이 시선들의 극명한 온도 차는 나를 옥죄었다.


 더군다나 이 시선들은 가족, 친척, 지인 등 나와 어떠한 관계가 존재하는 가까운 타인에게서도 느낄 수 있었다. 이들 중 누군가는 나를 측은하게 바라봤고, 누군가는 만날 때마다 살 좀 빼라 말했고, 누군가는 그러니까 옷도 예쁘게 못 입는다고 말했고, 누군가는 만나는 남자가 불쌍하다고 말했고, 누군가는 병원을 추천해주었으며 누군가는 동의 없이 날 병원에 데려가기도 했다. 이들은 나와 정으로 묶여있는, 그래서 ‘네게 관심이 있어서 그래’, ‘네가 잘되었으면 좋겠으니까 그렇지’라는 자기 합리화가 가능한 자들이었다. 그놈의 빌어먹을 한국인들의 정이란. 묘한 감정들이 뒤섞인 시선들을 받는 것이나, 직감했던 것들을 결정타처럼 말로 전해 듣는 것 모두 고역이었다.


 점점 더 누군가를 마주하는 게 두렵고 무서워졌다. 굳이 모두에게 사랑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도,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도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나는 이 시선들 속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나는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권장 체중 범위 내로 진입해야만 했다. 그래야 겨우 숨을 쉴 수 있을 테니까. 이 사실을 깨달은 이후로 안 해본 다이어트가 없다. 덴마크, 황제, 할리우드, 각종 연예인 다이어트…. 하다 하다 음식을 먹고 죄다 토해버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나쁜 습관은 고치지 못했고, 결국 정석적인 다이어트를 해야겠다며 빡센 식단관리와 1~2시간의 운동을 매일 진행했다. 그래서 한 달에 3kg 뺐었나, 뿌듯함이나 성취감보다는 분노가 더 컸다. 살찌는 건 쉬운데 빼는 건 왜 어려운 건지. 지인의 추천으로 방문한 병원에서는 식욕억제제와 함께 노폐물을 배출하고 심장 박동수를 높여 운동 효과를 내준다는 약을 처방해줬다. 그 약을 이틀 동안 복용한 후 순수 지방만 3kg가 빠졌다. 그 순간 밀려오던 자괴감과 허탈함이란. 그 작고 하얀 알약 하나가 내가 여태껏 쌓아왔던 것들을 하찮게 여기며 비웃는 것만 같았다.






 참 역설적이지만, 난 너무나도 행복했다. 지속적인 두통과 메스꺼움, 급작스럽게 찾아오는 어지러움과 불면증이 날 괴롭혀도 괜찮았다. 점점 누적된 피로가 무게감으로 느껴지고 깨어있지만 깨어있지 않은 것 같은 상태가 되었지만 상관없었다. 운동 시간도 줄여주고 불면증으로 잠도 못 자니, 안 그래도 부족했던 작업 시간을 채울 수 있어서 오히려 좋아했다. 이 약은 앞으로 최소 한 달간은 나와 함께할 테다. 아직 나는 권장 체중 범위 안에 속하지 못했으니까. 가끔은 스스로 만든 감옥에 갇힌 내가 싫기도 하고, 이런 나를 만든 수많은 눈과 입이 원망스럽기도 하다. 오늘은 후자인 듯하다. 왜 평온했던 내 일상에 돌을 던진 걸까, 왜 나를 이 지경에 이르게 했을까. 아직은 이 작은 십자가를 내려놓을 자신이 없어 서글프다. 문득 나도 언젠가 누군가를 이런 상황으로 몰아가지 않았을까 싶어 간담이 서늘해진다. 어쩌면 이 모든 건 내 잘못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손톱 크기만큼도 안 되는 알약 하나에 지배받는 삶을 사는 미련한 인간이 바로 나다.





* 본 글은 <다붓한 공간>에서 진행 중인 4월 연재 원고 중 한 편을 발췌한 것입니다.

* 다른 원고나 서평을 읽어보시고 싶은 분들은 다붓한 공간에 방문해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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