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 남성은 왜 본인을 식충이라 여기는가
엊그제 오랜만에 부친과 저녁을 함께 했다. 고깃집에서 알바를 하다 고깃집에 앉아 식사를 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건강상의 이유로 술을 멀리하고 있던 부친은 오랜만에 빨간 병 하나를 주문했다. 이런저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나누며 고기를 구웠다. 어느덧 빨간 병이 바닥을 보일 때쯤, 부친은 갑자기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가 최근에 동기 모임에 나갔어. 예전에는 각기 다른 분야에서 다 잘 나가던 인간들이 이제 30%, 아니 20%만 빼고는 다 잘렸어. 퇴직을 한 건지 당한 건지는 모르지만. 그런데, 그 퇴직당한 사람들의 60%가 백수야 백수. 다른 일을 못 찾았단 말이지. 그래서 집에서 삼시 세끼 밥만 먹는 식충이가 되어버린 거야, 식충이가…. 그렇게나 마누라 눈치가 보인다더라. 아무튼 그중 한 명이 회식을 아주 싸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며 알려주겠다고 하더라고. 무한리필 삼겹살이나 갈빗집 뭐 이런 곳도 아니고 김밥천국에 가면 30,000원으로 배부르게 회식할 수 있다면서 웃는 거야. 그 후에는 다른 사람한테 선물할 일이 있으면 다이소를 애용하라면서 20,000원이면 모든 걸 다 살 수 있다고 하더구나. 예전에는 그렇게 배포 넘치던 놈들이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나이가 들고 직장을 잃으니 자신도 모르게 쪼잔해진 거지. 씁쓸하더라, 씁쓸해. 그런데 말이다, 난 예전에 다이소라는 곳도 잘 몰랐어. 생각해보니 요즘은 꽤 많이 들리게 되더라. 합리적이고 유용한 물건이 많구나 싶기도 하고. 아직 김밥천국은 그렇게 안 느껴져서 다행인 건지.”
부친은 이 얘기를 하면서 웃었다. 너털거리는 그 웃음은 분명 웃음의 일종이었지만, 어딘가 한이 서려 있는 씁쓸한 웃음이었다. 나는 분명 그 웃음이 담고 있는 모든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내 부친은 대기업 임원 출신이다. 남들보다 일찍 승진하고 남들보다 일찍 퇴직하셨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되던 해, 부친이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나는 그때 부친의 붉어진 눈가를 처음 보았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못 봤던 것 같은데. 그 순간 나까지 울면 안 될 것만 같아 괜찮다고, 너무 고생하셨으니 쉬어야 할 때라는 시답잖은 위로를 건넨 후 이불을 뒤집어쓰고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난다. 아직까지 내게 그 붉은 눈가보다 서럽게 다가오는 존재는 없다.
퇴직한 후, 부친은 하루 이틀 정도 집에 계셨다. 그러더니 다음 날 집 근처 독서실 정기권을 끊고 한 달 동안 독서실에 나가셨다. 그 후에는 집에서 멀리 떨어진 조그만 사무실 하나를 구해 평소에 출근하시던 시간에 나가 퇴근하시던 시간에 돌아오셨다. 어느 날은 평소 퇴근 시간보다 늦게 오셨고, 어느 날에는 주말에도 사무실에 나가셨다. 모친과 딸들이 그렇게 쉬라고 말렸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매일같이 출근 도장을 찍으셨다. 볕도 들어오지 않는다는 부친의 사무실이 너무 공허할 것 같아 화분이라도 놓아드리려 했는데 모친이 그러지 말라고 말렸다. 그때는 왜 말리는지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는데, 지금은 아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부친이 다시 자리를 잡고 사업을 시작하기까지는 약 2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때의 부친도 자신을 식충이라 여겼을까. 자신이 한심하다고 생각했을까. 부친은 우리 가족을 혹은 자신을 위해 한평생을 일해왔는데…. 마음이 미어 오다 못해 아프다. 너무 쓰라리게 아프다.
부친의 동기였다면 대기업에 몸담고 있었거나 전문직에 종사했던 사람일 가능성이 농후할 터. 한 기업의 중역 중 한 명이던 이들의 퇴직은 빠르게 치고 올라오는 짱짱한 신입들과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자리에 치이고 치이다가 내려왔을 뿐, 누구의 잘못도 아닌 자연스러운 과정 중 하나였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자신을 식충이라 여긴단다. 평생 처자식 먹일 밥을 구해왔던 사람들이 집에서 몇 년 쉬며 밥을 먹는다고 식충이라 생각한단다. 이 얼마나 참담하면서도 역설적인가.
퇴근길 부친 손에 들려있는 통닭 한 마리에 서려 있던 그의 노고를, 함께 갔던 여행지나 놀이공원에서 온 힘을 다해 놀아주고 숙소에서 뻗어버리던 그의 사랑을, 요란할 정도로 시끄러웠던 코골이가 실은 그만큼의 피로와 피곤함을 증명했음을, 술에 잔뜩 취해 돌아온 날에는 분명 그만큼의 속상한 일이 있었음을 어린 시절의 나는 절대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통닭을 반기고 놀이공원이 즐거웠고 부친의 코골이와 술 냄새가 싫었다. 그때 한 번이라도 말해볼걸. 오늘도 힘드셨죠, 밥은 잘 챙겨 드셨나요, 별일 없었나요, 피곤하셨죠, 얼른 쉬세요…. 백 번 천 번이라도 말해드릴걸.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세상에 이런 불효녀가 또 있을 수 없다.
사랑하는 내 부친, 사랑하는 제 아버지. 당신의 고귀한 희생을 평가절하하지 않으시길, 이미 충분한 귀감이 되었으니 더 이상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길, 어디서 무엇을 하든 제게는 언제나 든든한 안식처라는 걸 기억해주시길. 사랑한다는 단어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사랑합니다.
* 본 글은 <다붓한 공간>에서 진행 중인 3월 연재 원고 중 한 편을 발췌한 것입니다.
* 다른 원고나 서평을 읽어보시고 싶은 분들은 다붓한 공간 에 방문해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