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와 물리에 대해 아는 게 단 하나도 없는 자의 별 의미없는 끄적임
시간의 사전적 정의는 ‘어떤 시각에서 어떤 시각까지의 사이’이다. 보편적으로 사람들은 ‘시간’을 시간 중 특정 부분을 일컫는 ‘시각’의 개념과 혼동하여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여태껏 인간에게 시간은 신체 리듬의 반복을 수치화하여 표현해 낸 하나의 도구에 불과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나 역시 시간과 시각을 구분하지 않고 살았던 사람이다만, 계속해서 시간이 그 자리에서 정지해있는 무(無)적인 존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실제로 흘러가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에게 잡혀 그저 자리만 잡고 앉아있는 게 아닐까.
시간(時間)의 한문적 어원을 한 번 살펴보자. 시간의 시(時)는 ‘때, 볼 시’다. ‘시(時)’는 형성 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日’과 음을 나타내는 ‘口’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日’은 태양이 일정한 규칙에 의해 돌아간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는 태양을 포함하여 인간이 바라보는 것들이 규칙적으로 변하는 모습을 보일 때, 이를 기준으로 특정 구간을 설정한 후 시각으로 받아들인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니 시간은 인간이 단순히 인지의 편의성을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개념에 불과한 셈이다. 뭐, 따지고 보면 세상의 모든 것들이 그러하겠지만.
어원적인 의미를 떠나 보다 객관적으로 시간을 분석해보자. 1초, 1분, 1시간, 1일, 1주일, 1달, 1년…. 우리가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시간의 단위들은 누가 왜 어떻게 정했으며 우리의 생활 리듬과 부합하게 되었을까?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을 비롯한 각국의 과학자들은 태양이 일정한 방향에서 떠서 일정한 방향으로 저문다거나, 밤하늘의 별이 북극을 중심으로 반시계방향으로 회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런 규칙적인 변화를 기초로 하여 시간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창조해냈다. 이런 명명(命名)의 과정은 시간이 아닌 다른 개념에도 활용되지만, 시간은 인간의 감각으로 접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지각할 수 있다는 특수성을 지닌 만큼 그 인위적인 성향이 더욱 돋보인다.
인간을 포함한 지구상의 생명체들은 모두 나름의 ‘변화’의 과정을 겪는다. 애벌레가 번데기를 거쳐 나비가 되는 부화 과정이나, 인간이 유아기-청소년기-청년기-노년기를 거치는 것과 같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과정 말이다. 이 변화 과정의 구간을 시간으로 표현하는 것 역시 인간의 편의성을 높이는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궤변을 따라가다 보면 시간의 흐름에 의해 생명체 혹은 무생물의 상태가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체 혹은 무생물이 자연의 섭리에 따라 변화하는 것에 시간이라는 일종의 프레임을 부여했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그러니 시간은 절대적으로 존재하고는 있지만, 상대적으로 인식하고 명명되는, 그저 무(無)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던 셈이다.
시간이 정지된 무(無)적인 존재라면, 과연 시간은 방향성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 시간은 이론적으로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존재에 불과한 인간이 새로이 명명한 존재이니 그 흐름 역시 인간이 정의할 수밖에 없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인간 세계에서 시간은 방향성을 지닐 수밖에 없을 테다.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는 현재부터 변화하게 될 미래에 대한 시간에 관심을 두기 마련이다. 과거의 시간이 아닌 현재에서 미래의 시간에 초점을 둘 테니, 시간은 일방적인 순행적 흐름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어디선가 공간과 함께 가는 것이 시간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아마 아인슈타인이 말했겠지, 뭐. 아니라면 이 말을 했던 자에게 심심한 사과를 전한다. 현대 과학이 발견해 낸 공간은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이 작은 지구가 아니라, 물질과 함께 우주를 구성하는 실체를 의미하더라. 내 관점과 현대 과학의 관점을 적절히 섞어본다면 시간은 해당 물체의 에너지에 따라 모양을 달리한다는 공간이 생겨날 때 함께 발생하는 개념에 불과하지 않을까. 물론 이를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도 없지만 (오히려 과학적으로 보면 오류로 가득 찬 헛소리일 테다) 공간이 말 그대로 어떤 물체가 존립할 수 있는 바탕을 넘어 실체를 제공해준다면 시간은 공간이 확장됨과 함께 그 곁에 상존하고, 물체 혹은 생명체가 인지하는 순간 그 존재 의미를 부여받게 되는 슬픈 존재가 아닐까.
생각해보면 ‘과거, 현재, 미래’ 따위의 단어도 인간이 편의상 분류한 시간의 개념 중 하나다. 지금의 내가 인지하기 이전의 모든 것들은 과거에 일어난 일, 아직 오지 않은 시점은 모두 미래에 일어날 일에 속한다. 물론 상황이나 맥락, 경험으로 미래에 어떤 일이 발생하리라는 합리적 유추는 가능하지만 이를 오차 없이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말 그대로, 그저 다가올 무언가에 불과할 뿐이다. 현재는 과거나 미래에 비해 다소 정의하기 어렵다. 현재를 어디까지 정의해야 하는가에 관한 논란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인데, 정확히는 인간이 편의성을 위해 임의로 설정한 초, 분, 시간 단위 중 어떤 것을 기준으로 삼아야 할지에 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대충 현재는 본인이 인지할 수 있는 특정한 시점으로 설정하자. 자연스럽게 시간의 흐름을 과거-현재-미래로 인식하는 인간의 모습만 보더라도, 시간은 인간이 제멋대로 명명한 의미와 흐름을 지니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것이 학계의 정설일지도 모르겠지만. 아, 그럴 가능성은 물론 희박하다.
어찌 되었든 시간이 우주에 속하는 개념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우주의 무한성은 어떤 과학적 지식으로도 완벽히 설명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다. 그러니 인간을 비롯한 어떤 생명체가 우주의 존재와 그 속성을 정확히 파악하게 된다면 더 이상 우주는 우주로서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어디 자식이 부모의 모든 것을 알고 있으리라 단언하는가. 다만 이러리라 추측할 뿐이지. 이 글은 어디까지나 내 헛소리를 정리한 것일 뿐 과학적으로 검증된 자료를 바탕으로 쓴 것이 아니다. 과학적으로 검증된 자료를 분석할까 고민도 했다만, 그러다가 흥미만 잃을 것 같아 관뒀다. 인간이 인지하고 있는 ‘시간(時間)’이 형이상학적이고 인위적인 존재임을 고려할 때 이런 시선에서 바라볼 필요성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의견만 살짝 내비쳐본다.
* 본 글은 <다붓한 공간>에서 진행했던 6월 연재 원고 중 한 편을 발췌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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