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가는 길까지 한 가지 색으로 물들다니
어제는 누군가 생을 마감했다. 타살이니 자살이니, 더러운 놈이니 희생양이 되었니 말이 많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누구 하나 명확한 정황을 알 도리가 없다. 타살이라면 아는데 입 다물고 있을 테고, 자살이라면 공공연한 피해자가 존재하는 셈이겠지. 죄가 없다면 당당히 고개를 들고, 죄가 있다면 인정하고 그에 맞는 벌을 받는 게 당연한 일인데, 어떤 내막으로 인해 이런 결말을 맞이하게 된 걸까. 정말 배후에 목숨과 맞바꿀 정도로 두려운 무언가가 존재했던 것일까, 쏟아지는 질책을 본인이 감당할 수 없으리라 판단한 것일까. 정치인은, 아니 어쩌면 인간은 마지막 가는 길까지도 특정 색으로 물든다. 특정 색에게 환호받고 특정 색에게 질타받는다. 우리는 과연 어떤 색으로 물든 삶을 살아가고 있는 걸까.
작년쯤이었나, 정확한 시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지나가며 성 소수자 페스티벌을 본 적이 있다. 성 소수자의 존엄을 상징하는 무지개기(LGBT)가 여기저기 휘날리고 있었고, 볼 수 있는 온갖 색들은 전부 구경할 수 있는 자리였다. 그곳에 들어가지 않고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그것도 차 안에서 그들을 마주했지만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다들 정말 행복해 보였다. 이해받을 필요도, 의무도 없는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자신의 존엄성을 외치는 모습을 마주했을 때 드는 감정은 정말 아직도 무어라 표현할 수가 없다.
나중에 좀 더 찾아보니 깃발을 구성하는 색마다 각각 다른 의미가 담겨있었다. 지금은 6가지 색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초반에는 8가지 색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분홍색은 성 정체성, 빨간색은 생명, 주황색은 치유, 노란색은 태양, 초록색은 자연, 파란색은 예술, 남색은 조화 그리고 보라색은 영혼의 의미를 담고 있다더라. 이런 무지개기 외에도 간성을 위한 깃발이나 무성애기, 범성애기 등 그 종류도 다양하더라. 왜 누군가에게는 자신이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 여러 색깔의 깃발을 흔들어야만 하는 세상이 찾아왔을까. 대체 이런 세상은 누가 창조해 낸 것일까. 구성원들이 만들어 낸 세상일까, 세상이 만들어 낸 다양한 구성원일까.
분명 이 세상은 다양한 색들로 가득 차 있다. 단순히 무지개로 통하는 원색의 문제가 아닌, 각자의 매력과 향기를 지닌 색들이 존재한다. ‘색’ 하니까 초등학교 시절, 천연염색 공방에 갔던 기억이 난다. 그때 할머니처럼 느껴졌던 선생님이 ‘자연에서 추출할 수 있는 색은 무궁무진하고, 같은 재료를 사용하더라도 얼마만큼의 시간과 노력을 들이느냐에 따라 결과물은 늘 다르다’라고 하셨다. 실제로 고무줄로 원단의 어디를 얼마나 묶느냐에 따라 나오는 패턴도 달랐고, (천원 원료에) 얼마나 오래 담가두느냐에 따라 색의 진함이 달랐다. 그때부터였을까, 한 범주 내의 색이 꼭 같은 색으로만 보이지 않았던 것은.
파도는 저 멀리서 한없이 파랗게 보이다가도 다가올수록 옅어지고, 바위에 부딪히고 해변에 떠밀려오며 하얗게 변한다. 한 송이의 꽃을 구성하는 꽃잎들도 같은 범주의 색에 속해있을지언정 다 같은 색은 아니다. 푸르른 녹음으로만 보이는 숲도 가까이서 보면 모여있는 나무들이 다 다르고, 그 나무를 무성하게 만드는 나뭇잎 색도 모두 다르다. 얼음 위에서 눈만 뜨고 있는 고등어 한 마리의 비늘도 제각각 다른 빛을 발하고, 고양이 한 마리의 털도 모두 다른 색이다. 어떤 강아지는 어렸을 때는 하얀 솜사탕 같았다가 크면서 노르스름한 누렁이로 변하기도 한다더라. 그 어디에서도 같은 색으로만 구성된 것들을 찾아볼 수 없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자연이 그렇다.
본체가 그러한데 어찌 인간이 하나의 색으로만 표방하며 살아갈 수 있겠는가. 하나의 색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할지라도 그 농도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명도’와 ‘채도’는 괜히 생긴 단어가 아닐 테다. 우리는 어느 날에는 짙은 색으로 타오르고, 어느 날에는 옅은 색으로 스며든다. 또 다른 날에는 어두운 색으로 사그라져가며 또 다른 날에는 밝은 색으로 주변의 것들을 유인할 테지. 원색은 팬톤 컬러칩에나 존재할 뿐, 우리 곁에 머물지 않는다. 원색으로 누군가를 명확히 설명할 수 있다고 자부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또 있을까.
하물며 인간은 더욱 모호한 색을 지니기 마련이다. 분명 녹색인 것 같았던 사람이 언젠가는 초여름의 나뭇잎처럼 푸르게, 언젠가는 한겨울의 소나무처럼 짙게, 언젠가는 갓 태어난 새싹처럼 얇고 투명하게, 언젠가는 깊은 수렁의 늪처럼 변한다. 물론 이는 특정한 상황이나 성향, 성질들이 접목된 결과일 테지만 인간만큼 색을 지정하기 힘든 존재는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러니 인간들이 모여 만들어 낸 어떠한 집단의 색이 정해져 있다 한들, 그것이 정치-교육-소모임-활동-가치관 외 어떤 것이든, 소속된 인간을 ‘하나의 색으로 특정’ 짓는 것은 명확한 한계가 존재하지 않을까. 그 누가 감히 단언할 수 있겠는가.
오늘 오전 9시 22분, 2020년 처음으로 뻐꾸기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어린 시절 괘종시계에서 들었던 뻐꾸기 소리와 꽤 유사하다. 예전에는 정각만 되면 뻐꾸기 집에서 튀어나오는 그 작은 목각인형 하나를 보기 위해 몇 분이고 기다렸던 적이 있는데. 이름 모를 새소리는 많이 들어봤어도 뻐꾸기는 오랜만, 아니 처음이라 그런지 자연스럽게 일을 멈추고 그 소리에 집중하게 되었다. 누군가의 이목을 받고 있음을 눈치챘는지 머지않아 뻐꾸기는 본인의 외침을 그만두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그랬을까. 아니면 그냥 단순히 울기 귀찮아서 울음을 멈춘 것일까? 아니면 더 이상 울 필요가 없어서? 아니면 자신을 위협하는 누군가에게 지배당해서? 나는 그 이유를 끝까지 알 수 없을 것이다. 떠난 자는 언제나 말이 없으니까.
* 본 글은 <다붓한 공간>에서 2020년에 진행했던 7월 연재 원고 중 한 편을 발췌한 것입니다.
* 정확히는 7월 9일에 썼던 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다른 원고나 서평을 읽어보시고 싶은 분들은 다붓한 공간에 방문해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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