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가까이 왔다. 며칠간 계속 음식을 먹지 못하고 있다. 먹으면 계속 토하고 설사는 몇달째 진행되고 있다. 전쟁같은 생애를 보내고 이제 죽음의 문턱에 와 있다. 짐승이나 새도 죽을 때가 되면 자기가 태어난 고향으로 가 죽음을 맞이하는데 왜 나는 늙은 몸으로 전쟁터를 누비고 있는가. 왜 고향으로 갈 수 없는가. 상부의 명령도 거추장스럽고 장군이란 명예도 쓸 데 없다. 칼을 찬 유학자라는 별명도 듣기 싫다. 나는 소원은 오직 하나, 내가 태어난 고향 땅에 돌아가 죽고 싶을 뿐이다. 나는 늙고 병들어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다. 쉰일곱살이다. 전쟁터에서 죽는다. 먹지 못하는 자에게는 죽음이 있을 뿐이다. 생명은 생명을 죽여 입에 넣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죽임으로서만 살 수 있음은 비극이다.
두타산을 지나며 하룻밤을 보냈다. 진리를 깨달은 자는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며 다시 진리의 구도행을 해야 한다. 이를 두타행이라 한다. 세상속에서 그리고 실천속에서 진리가 검증되어야 한다. 어딜가나 두타산은 널려 있다. 내 고향의 산 역시 두타산이다. 나는 피를 토하고 설사를 하느라 잠을 들 수 없었다. 거의 뜬 눈으로 보내다 새벽녘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이런 고통의 생활이 얼마나 지속되었는지 이제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사람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정신이 번쩍 들어 온다고 한다. 이를 일러 회광반조라고 한다. 나는 잠속에서 내 인생의 전부를 파노라마처럼 생생하게 보았다. 다음의 장면이 나의 꿈속 장면인지 또는 죽기 전에 잠깐 정신이 돌아온 것인지는 모르나 너무 생생한 장면이라 마지막 얘기를 네게 들려 준다.
지금 이 글은 과거와 현재가 오락가락 섞여 있다. 정신이 오락가락하여 꿈인지도 모르겠다. 난 그냥 본대로 들려 줄 뿐이다. 내 말이 두서가 없어 왔다 갔다 하더라도 잘 헤아려 듣기를 바란다. 그리고 내가 이곳 두타산에서 죽거들랑 정든 고향땅 소흥으로 날 꼭 데려가다오.
*
내가 삼십대 중반 나락으로 떨어진 적이 있었다. 나는 입신양명을 위해 살았다. 나의 입신양명은 남들의 출세지향적인 입신양명과 달랐다. 나는 사대부로 천하를 위해 바른 정치를 하고 싶었다. 천하위공(天下爲公-사사로운 이익을 구하지 않고 천하의 공을 위한다.)의 정치가 나의 이상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내가 먼저 이상적인 인간이 되어야 했ㅎ다. 그것은 성인(聖人)이었다.
그런데 그때 이렇게 나락으로 떨어질 줄 몰랐다. 나를 이렇게 한 놈은 교활하기 짝이 없는 유근이란 놈이었다. 유근은 환관의 우두머리로 태감이라 불렀다. 사례태감은 우리 역사에서 원흉이자 비극의 뿌리이다. 없는 죄도 날조하고 조작하여 의인을 역적이라 해 죽인다.
주후조가 15살에 새 왕으로 등극했다. 그는 놀기만 좋아하는 망나니였다. 새 왕의 어릴 적 친구는 환관인 유근이었다. 자고로 남자는 술과 여자를 조심해야 한다. 유근은 남자의 욕망을 이용할 줄 아는 교활한 자로 태자를 향락과 황음에 빠뜨려 헤어나올 수 없게 만들었다. 그리고 허수아비 왕 대신에 자기가 권세를 장악했다. 자연히 간신배들이 득세해 세상을 속이고 여론을 왜곡하고 조작해 자기들의 배를 불렸다.
그런 사악한 세상에 나는 무엇을 해야 했을까. 그냥 내버려 둘 순 없었다. 나는 용기를 내서 유근이란 놈을 비판하는 상소를 조목조목 올리고 내 이름 석자를 적었다. 왕에게 올린 상소는 어인 일인지 유근의 손에 먼저 들어갔다. 그가 먼저 읽은 것은 그가 비서실장인 태감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왕이 어리석으면 태감이 모든 권세를 휘두르는게 가능하다. 정말 어리석은 제도가 이 나라의 환관제도이다. 환관은 일자무식이 아니라 지식인이다. 글과 문장을 잘 짓는다. 그들이 국정을 농단한다. 황제의 권력이 클수록 비서실이 전횡을 일삼는다. 그 놈은 나를 황제의 위엄에 해를 끼치고 황제의 명예를 우습게 여긴다고 누명을 씌웠다. 국가 반역죄로 말이다. 나는 하우라침에 반역죄인으로 전락했다.
그때 나를 지지해 주는 사대부는 없었다. 썩어 빠진 관료들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에 급급했다. 그들의 학문이 고작 그 정도였다. 나는 볼기 40대를 맞고 사지로 쫓겨 났다.
내가 귀양가는 유배지는 야만적이고 원시적인 땅이라 하였다. 그곳은 살아 돌아오기 어려운 곳으로 소문난 머나먼 귀주의 용장이란 곳이었다.
나는 유배지로 가면 죽게 되어 고향으로 다시 돌아와 부모님을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죽는다는 것보다 불효자가 된다는 생각에 눈물이 앞을 가렸다. 내 평생의 목적은 성인이 되기 위한 것인데 성인이 되기는 커녕 내 한몸을 보전하지 못하고 모함을 받아 곧 죽게 되었으니 통탄할 일이었다. 과연 천도(天道)가 있는가 없는가. 천도가 없다면 이 세상은 짐승의 세상이 아닌가. 천도가 있음에도 인도(人道)를 몰라 내가 어리석은 짓을 한 것인가. 온갖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이렇게 죽을 몸이 되다니 말이다. 그 때 내 나이 35세였다.
나는 27세에 과거에 급제해 진사가 되어 8년간 열심히 천하위공의 자세로 살아 왔는데 이제 유배지로 가는 가련한 신세가 되었다. 어려서부터 성인이 되는 공부에 뜻을 두고 20년간을 애써 왔는데 이제 나락으로 떨어졌으니 아무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세상은 불의로 가득하고 나는 이제 폐인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남들도 그렇게 생각했고 나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나에겐 희망이라곤 한 톨도 없는 절망스런 나날이었다. 모든 인간관계가 끊어졌다. 나 홀로였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태로운 순간이었다. 이런 장면이 비몽사몽간에 흘러갔다.
*
유배지로 가는 길은 머나먼 길이다. 수도에서 저 멀리 남쪽 까지는 육개월이 걸리는 먼 길이다. 그런데 나를 죽이려 암살자가 두 명 쫓아 오고 있다. 유근이란 놈이 자객을 고용해 나를 죽이려 한다. 암살자를 피해 나는 무사히 유배지에 도착할 수 있을까. 정말 걱정이다. 두렵기만 하다. 앞날을 전혀 예측할 수 없으니 불안하기만 하다.
암살자는 금의위 자객들이다. 그들은 기회가 되면 날 죽일 것이다. 그들은 천하제일의 살수로 유명하다. 나를 쥐도 새도 모르게 암살한 후 내가 재수없게 우연히 사고사를 당했다고 소문을 퍼뜨릴 것이다. 이 세상은 선과 악이 뒤섞인 혼돈의 세상이고 사람들은 눈이 어두워 시비와 선악을 가릴 줄 모른다. 백성들은 먹고 살기 바쁘고 자기 살길만 생각한다. 학문을 한다 하는 자들 역시 과거합격과 출세에 눈이 먼 자들이다. 죽음으로서 의를 이루려는 자는 없다.
하늘은 어이해 이런 시련과 고난을 내게 주는지 모를 일이다. 교활하고 잔인한 악인이 득세해 의인을 죽이는 역사가 왜 반복되고 있는지 정녕 모를 일이다. 과연 이 세상에 천도가 있는가 말이다.
유배지로 떠난지 한 달이 지난 어느날 나는 강가의 절벽에 올랐다. 절벽 아래는 깊은 강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절명시 한 수를 적어 돌로 눌러 놓았다. 그리고 옷과 신발을 벗어두고 강물에 뛰어들었다. 수직으로 낙하하는 공포심보다는 희망이 없다는 절망감이 더 컸기 때문이다. 절망이야말로 죽음에 이르는 소리없는 사망 선고였다. 누누이 말하지만 내게 희망이라곤 없었다. 한 달간 계속 생각했다. 암살자의 칼에 찔려 죽느니 내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싶었다. 살아계신 부모님께 불효한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었으나 이왕 죽을 몸이라면 짐승의 시체가 되기 보다는 이소(離騷)를 지은 굴원처럼 멱라수의 물고기 밥이 되고 싶었다. 그렇다. 그 때 나는 죽고 사는 것을 하늘에 맡기고 천길 절벽 위 허공의 백척간두에 몸을 던졌다.
나는 정말 독하게 마음 먹고 맨발로 대지의 흙을 마지막으로 느끼고 푸른 하늘에 몸을 맡겼다. 손으로 흙을 퍼 냄새를 마셔도 별다른 냄새가 없었다. 눈을 감고 하늘을 우러른 후 나는 뒤로 몸을 누였다. 수직에서 수평으로 말이다. 그 순간 공포는 없었다. 공포를 절망이 삼키었다. 하늘이 빙 돌았다. 곧이어 갑자기 시퍼런 강물이 나를 집어 삼켰다. 아무 생각도 어떤 감각도 없었다. 환한 대낮에 어둠만을 보았을 뿐이다. 완전한 무의 세계였다.
나는 죽었다고 생각했다. 내가 강에 뛰어 들은 것은 자객을 따돌리고자 꾀를 낸 것이었다. 뒤따르던 암살자들이 자살로 생각해 상부에 보고할 것이고 그러면 미행은 그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깨어나 보니 배안이었다. 강물에 떠내려가는 나를 장사꾼 배가 발견해 건져 올렸다고 한다. 나는 살아 났다. 하늘의 도움이었는지 우연이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살아난 것은 분명했다.
나는 내가 살아난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죽고자 몸을 강에 던졌는데 누군가의 도움으로 살아난 것이다. 이것은 우연인가 운명인가. 이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날 밤 곰곰이 생각했다. 죽고 사는 것은 나에게 달린 것이 아니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내 맘대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듯이 내 의지로 이 생을 끝내서는 안된다고 하는 마음이 일었다.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것은 그냥 놔 두는 것 아닌가 하는 마음 말이다.
*
나는 다시 한 달을 걸어갔다. 나는 어느날 무이산에 올라 어느 폐사가 된 절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그날은 너무 피로가 쌓여 먹지도 못하고 주변을 둘러보지도 못하고 바로 그냥 쓰러졌다. 너무 피곤해 잠에 떨어졌을 때 호랑이 꿈을 꾸었다. 그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 꿈에서 호랑이를 만났다. 조마조마하게 산길을 걸어갈 때 무서운 느낌이 들었다. 무언가 나올 것 같았다. 그 순간 호랑이가 내게 달려 들었다.
나는 너무도 피로해 기진맥진해서 도망칠 수도 없었다. 소리칠 수도 없었고 저항할 힘도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두려움은 없었다. 그저 호랑이의 눈만 보고 내 눈을 부릅떠 물러서지 않고 대들 뿐이었다. 호랑이 눈에서는 불이 확 타올라 나를 불태우듯이 거센 불길이 몰려들었다. 나 역시 그 사나운 불에 맞불을 놓을 수 밖에 없었다.
불과 불의 격투가 벌어졌다. 죽느냐 사느냐. 나는 전력을 다해 내 안광을 호랑이의 눈에 대고 끝끝내 물러서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생과 사의 결투였다. 그리고 아무 기억이 없다. 내가 기절한 것인지 졸도한 것인지, 꿈인지 생시인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아무것도 모르겠다. 아침이 되자 어느 스님이 찾아와 나를 어느 절로 데려갔다.
“어제 잠을 잔 폐사는 밤마다 호랑이가 들어가 잠을 자는 곳이요. 사람이 잠을 자고 있을 경우 호랑이 밥이 되기 십상이지요. 그런데 당신이 살아 있다니 참 영문을 모르겠소.”
“아 어제 밤 호랑이 울음소리인지 무언지가 들리대요. 눈부신 불덩이가 대들기에 나 역시 눈에 불을 켜고 맞불로 대들었소. 그러다 그만 기절해 버린 듯하오. 너무 피곤해 일어날 기운도 없었어요. 잡아 먹든 뭘하든 내버려 두고 그냥 잠만 잤어요. 근데 그게 호랑이였소?”
스님은 내 몸이 온전한지를 거듭 물었다. 나는 개운하다고 말했다.
“노스님께서 당신을 뵙자고 해요. 이리 오시지요.”
나는 스님의 안내를 받아 노스님을 뵈러 갔다. 그곳엔 흰수염을 곱게 기른 늙은 노인이 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는 스님이 아니라 도사였다. 놀랍게도 내가 20년전에 남창 철주궁에서 만나 그날 밤 밤새도록 대화를 나눈 적이 있던 도사였다. 이때 만난 도사 이야기는 뒤에 다시 말하자구나. 나는 20년 동안 나의 살아온 얘기를 그 도사에게 말해 주었다.
“이제 어찌할 생각이요?”
“세상사가 부질 없으니 산에 은둔해 도나 닦으며 조용히 살고 싶습니다.”
“그런 맘이면 도는 커녕 아무것도 깨치지 못한다네. 자네가 은둔해 버리면 자네 가족을 유근이란 놈이 그냥 놔두겠는가. 자네 부친의 벼슬도 위험할 뿐더러 가문의 멸문지화를 면치 못한다네. 악인의 심술을 그리 모를까? 그건 군자의 길이 아니지.”
“그럼 어찌하란 말입니까? 유배가다 죽거나 유배지에서 죽어야 합니까?”
“왜 죽을 것을 미리 염려하나. 멀쩡한 사람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게 삶이라네. 한 치 앞을 모르는게 인생 아닌가.”
나는 늙은 도사의 눈을 바라보고 나서 찻잔의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네 알겠습니다. 제가 욕을 당하는 게 낫지요. 부모님을 욕되게 할 순 없어요.”
도사와의 대화를 통해 죽고 사는 것은 내 맘대로 할 수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뒤늦게 깨우쳤다. 내 의지로 할 수 없는 것은 하늘에 맡기라는게 늙은 도사의 무언의 말이었다. 그순간 어쩌면 미래에 대해 아무 염려할 필요 없겠다는 마음이 살짝 들기도 하였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은 그저 하늘에 맡기고 살 뿐인 것 아닌가. 도사는 때가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해 주었다. 그런데 그 때가 언제올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에 답답한 것 아닌가. 조바심을 가질 필요도 없고 집착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때는 절박하게 당장 무언가를 해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다 내려 놓는 수 밖에 없었다.
*
이제 귀주의 용장이란 유배지에 도착했다. 이곳은 문명의 땅이 아니라 원시의 땅이다. 남들 눈에는 야만스런 정글의 땅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내눈에는 자연의 땅이었다. 그곳은 정말 사람이 살기 힘든 척박한 곳이었다. 마을 주위에는 온갖 사나운 짐승과 독충과 독사가 바글댔다. 그런데 내겐 몸을 보호할 움막조차 없었다.
집을 짓기 전까지는 당분간 짐승처럼 살아야 했다. 기가 막혔다. 이런 곳에서 살아야 한다니 말이다. 이런 곳에 과연 지식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곳은 책 한권은 커녕 먹고 살 한 톨의 양식 조차 없다. 산속을 다니며 나물과 고사리라도 꺾어야 겨우 생존할 수 있다.
나는 그곳에서 내가 배운 지식과 관념을 버렸다. 비우고 또 비웠다. 오직 내 마음을 보고자 하였다. 날 도와 주러 온 하인 세 명은 그만 풍토병에 걸려 오히려 내가 그들을 보살펴야 했다. 주인과 종의 처지가 바뀌어 버렸다. 그 하인들은 자신들이 원해서 온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강제로 내게 딸려 보냈으니 그들은 무슨 핑계라도 대어 여기서 빨리 돌아가고 싶어 했다. 향수병에 걸려 매사에 의욕이 없는 하인들을 다그쳐 보았자 도망갈 듯하여 그냥 내버려 두었다.
나는 하인과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았다. 내가 하인이라도 주인이 사납게 굴면 도망치고 싶었으리라. 그래서 나는 매일 그들을 위해 고향의 노래를 불러주고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며 위로해 주었다. 그들에게 살아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주고 싶었다.
이곳 사람들은 야성적이다. 이들은 묘족이다. 한족과는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다. 처음에는 말이 통하지 않아 어려웠다. 그들은 엄혹한 환경에서 살아남아야 했기에 식량을 마련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곳 사람들은 그리 풍족하지는 않지만 굶어 죽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신기한 일이다. 생은 신비이다.
이곳 부족민들은 정직하고 진솔하다. 위선적이고 사악한 도시인들보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더 소박하고 정직하다. 원시적인 환경에 사는 사람들이, 자연과 함께 사는 사람들이 문명화된 도시인들보다 더 인간의 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동고동락했다. 때론 다툼이 있었으나 화해했다. 그래야 생존할 수 있었다. 고립되면 그건 죽음이었다.
나는 그들과 어울리며 그들의 마음씨야말로 성인에 가까운 마음임을 알게 되었다. 지식인들은 경전을 공부해야 성인이 된다고 하는데 그것은 헛소리에 불과하다. 머리로 공부하는 관념의 지식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과 자신을 구분해 우월감이나 교만심을 줄 뿐 결코 성인의 마음을 품게 할 수 없다. 그것은 개소리에 불과하다. 그것은 독이다. 자신을 죽이고 사회를 오염시킨다. 자신의 더러운 행실이 개선되지 않아 욕심과 본능 앞에 무릎을 꿇고 죄만 짓는다. 양심이 더러워지고 회복될 길이 없다. 성신(聖神)이 자리 잡을 수 없으니 죄를 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공부를 많이 하나 적게 하나 그런 것은 성인이 되는 것과는 전혀 관련 없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성인의 마음대로 살면 누구나 성인에 가깝다는 것이 내 주장이다. 더럽고 음란한 마음이 일어날 때 바로 뿌리를 뽑아내면 누구나 성신이 자리잡아 성인으로 살 수 있다. 내가 거기서 살아 보니 그렇다. 나는 책에서 배운 것을 다 똥으로 여겼다. 책을 버리고 경전의 문자를 버렸다. 문자를 버리자 비로소 문자를 적은 성인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 활연관통이었다.
성인은 완성이 아니고 그것에로의 과정이다. 죽기까지 성인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살아 갈 뿐이다.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는다. 그 자체가 만족이고 도(道) 아닌가. 죽은 후에 내세의 복을 받기 위해서도 아니다. 인간으로서의 마땅한 길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도(人道)이다. 댓가를 바란다면 그건 욕심이다. 욕심을 부리는 것은 도가 아니다. 그건 미신이다. 세상에 기적이나 횡재는 없다. 뿌린 대로 거둔다.
*
이왕 말이 나온 김에 네게 말해 줄게 있다. 너는 20년간 나를 따라 전장의 전쟁터를 누볐다. 네 나이 14살에 넌 고아가 되었다. 너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용장에 유배되어 있을 당시 너는 네 어머님과 둘이 살고 있었다. 내가 그 마을에 들어간지 석 달 정도 되었을 때 네 어미는 죽었다. 너는 갈 곳이 없었다. 그런 너를 내가 거두어 들였다.
나는 당시 자식이 없었기에 고아인 널 내집으로 데려왔다. 당시 너는 한창 기운이 왕성한 때라 사고뭉치였다. 마을 사람들에게 무슨 원한이 있는지 자주 다투어 너에 대한 소문이 안 좋았다. 네 편을 들어 주는 사람들이 없었던 듯 너의 눈빛은 살기가 등등해 큰 사고를 칠게 분명했다. 네 어머님 장례를 내가 치루어 준 그날 밤 나는 너를 불렀다.
“네가 여기를 떠나고 싶더라도 3년만 내게 있어라. 3년 후에 네가 떠나고 싶다면 여비와 재원을 마련해 주마. 넌 혼자 몸이다. 네 스스로 심신을 단련해야 한다. 지금 떠나면 너는 거지가 되던가 도둑이 되던가 아니면 개죽음 당하고 말거다. 그러니 나와 함께 있으면서 뭔가 배워라. 자립할 수 있을 때에 떠나라. 그땐 말리지 않으마. 세상에서 살아갈 뭔가를 마련해야 하지 않겠니.”
너는 내 말을 따랐다. 나 역시 유배 생활에 너를 첫 제자로 여겨 네게 무언가를 가르치고 싶었다. 무엇을 가르칠까 고민하였다. 난 내가 아는 것과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가르칠 수 밖에 없었다. 그건 묻고 배우는 학문이었다.
나는 누구를 막론하고 내게 찾아와 학문을 논한다면 누구든 기꺼이 맞이해 밤새 그와 더불어 토론을 하였음을 네가 잘 알 것이다. 나는 널 위해 교재를 새로 지었다. 똥으로 여겼던 경전의 문구를 다시 기억해 내 나름으로 문장을 지었다. 나는 네게 소학과 몽구, 사기열전을 가르쳤고 틈나는 대로 서예를 배우게 했다.
마을 사람들은 우리 둘을 보고 미쳤다고 여겼는지 수군수군댔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삼개월이 지나면서는 아이들을 보내었다. 그렇게 일년이 지났다. 나는 네가 약간 문리가 트이자 대학과 맹자를 조금 가르치고 외우게 했다. 그때 너는 자주 물었다.
“선생님, 맹자는 배우지 않더라도 누구나 양지와 양능을 갖고 있다고 했습니다. 인간다운 인간이 대장부라고 했지요. 인간으로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아는게 양지이고, 도덕을 행할 수 있는 게 양능이라면 배움이 무슨 필요가 있는지요? 선천적으로 타고 난다면서요?”
너는 의문나는 것이 있으면 그때마다 주저없이 물었다.
“그렇다. 양지와 양능은 태어날 때 하늘이 부여해 준 것이니 그 본성을 따르기만 하면 성인이 될 수 있지. 그런데 사람은 욕심과 미혹에 빠진다. 그래서 학문을 익혀 그 잃어버린 마음을 회복해야 한단다. 학문을 하더라도 수양을 하지 않으면 금새 다시 어두워지는게 인간의 마음이다.”
“그런데 선생님, 성의(誠意)니 정심(正心)이니 마음과 뜻에 정성을 기울이고 마음을 바르게 한다는 것은 말만 다르지 사실 하나가 아닌지요? 선생님께서 이치를 강조하지만 제 마음에 이치를 알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때는 이치가 마음에 와 닿지만, 어느 때는 마음이 떠나버려 아무리 설명해 주어도 이치가 마음에 와 닿지를 않습니다. 마음에 떠나 버린 경우에는 이치가 있어봤자 저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요.”
너의 솔직한 말을 듣고 나는 다시 이치와 마음에 대해 며칠 동안 묵상했다. 그 옛날 대나무숲에서 깨닫고자 한 치기어린 젊은 시절을 회상해 보았다. 그 한가지만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어느날 밤 잠이 든 후에 새벽에 일찍 일어나 묵상에 잠겼다. 나는 십대부터 새벽 네시에 일어나 늘 가부좌를 틀고 묵상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었다. 그날도 새벽에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생각하니 마음이 울적하여 부모님의 안녕과 건강하심을 하늘에 빌었다. 그리고 한가지 생각에 몰입했다.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어느 순간 시간이 정지한 듯 적막하고 고요하기만 하였다. 내가 없어져 버렸다. 나란 의식이 사라졌다.
무언가 멀리서 밝게 빛나는 것이 점차 커져 순식간에 나를 덮쳤다.
그 순간 내 머리에 벼락이 쳤다. 벼락인지 전기인지 모르겠으나 뜨거운 기운이 위로 솟아 올랐다. 머리에 무언가 감전이 된 듯 했다. 섬광처럼 밝은 빛이 내 마음과 머리에 번개처럼 쏟아져 내렸다.
‘효도의 이치가 먼저인가. 효도의 마음이 먼저인가. 효도의 이치는 부모라는 대상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나라는 주체의 마음에 있는 것인가. 효도하고자 하는 본성이 사람에게 있다면 이치 또한 그 마음속에 저절로 내재되어 하나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이치가 따로 있고 마음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효도의 이치는 나의 마음속에 내재되어 있으니 마음의 양심을 따라 효도를 하면 저절로 이치가 드러나지 않겠는가. 부모가 이치를 배워서 자식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키우지 않는가. 이게 바른 이치이자 도가 아닌가. 이론과 지식이 먼저가 아니라 마음이 먼저이구나. 이치는 내 마음에 있는 것이지 대상에게 따로 있는 게 아니구나. 내 마음을 바르게 한다면 이것이 바로 성인이 되는 마음이구나.’
그날 새벽 나는 활연관통의 벅찬 희열을 느꼈다. 책을 버리고 지식을 버린게 오히려 잘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마당을 거닐며 풀과 꽃을 보니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고 밝아오는 새벽기운이 나를 구름위로 붕 띄어 이리저리 실어 나르는 듯 하였다. 장재의 서명(西銘) 구절을 반복해 외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어제의 세상과 오늘의 세상은 전혀 달랐다.
서명(西銘)은 물아일체의 경지를 읊은 것이다. 이제 내 몸은 성신이 자리 잡은 신령한 몸이 되었다. 지난날의 더러운 마음의 죄가 씻겨 나갔다. 마음속으로 품었던 은밀한 죄의식이 눈녹듯 사라져 버렸다.
그날 이후 분별심과 차별심이 나를 떠났다. 나와 너를 구별하거나 차별하지 않고 만물을 하나로 여기었다. 사람뿐만 아니라 인간과 자연을 구별하지 않는다. 모두가 나의 형제이고 동포이다. 나는 이제 세상사람이 원하는 것, 예를 들면 부귀공명이나 식색의 욕망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었다. 이 부분은 뒤에 다시 말하마. 내가 가는 곳이 새로운 길이 된다.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 마음의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나는 그 날 이후 다른 사람의 아픔이 나의 아픔으로 여겨졌고 다른 사람의 눈물이 나의 눈물로 여겨졌다. 나라의 우환이 나의 우환으로 여겨졌고 백성의 고통이 나의 고통으로 여겨졌다. 내가 사람들을 만나고 어려운 사건을 만나 처리하는 방법이 완전히 달라졌다. 어떤 사건을 만나도 사건의 시종을 면밀히 따져 중화(中和)를 지켜 낼 수 있었고, 어떤 인물을 만나도 그의 흉중을 꿰뚫어 알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네게 학문과 함께 무술과 병법도 가르쳤다. 너 혼자 세상에 나가 살아 남으려면 강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네게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전수해 주었다. 도학 뿐만 아니라 잡기와 양생술도 가르쳤고 불교의 선도 가르쳤다. 그것은 내가 십대부터 평생동안 몸소 몸에 익혀 왔던 것이라 요체를 전수해 줄 수 있었다. 시와 문장을 짓는 법도 가르치고 서예와 음악까지 매일 가르쳤다.
내가 평생 배운 것을 넌 속성으로 배웠다. 너는 나를 떠나지 않았다. 너는 총명할 뿐더러 밑바닥 인생을 겪어서 그런지 참을성이 대단했다. 내가 가르치는 훈련을 연단으로 알고 인내로서 견디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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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3년의 유배생활을 끝내고 여릉의 지현으로 승진하여 복귀했을 때에 너는 나를 따라 왔다. 나를 떠나 독립하지 않은 것이다. 네가 떠나 갔다면 나는 너를 말리지 않았을 것이다. 네 인생은 네게 달린 것이니 네 선택을 존중해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너는 내게 더 배울게 있는지 아니면 세상에 나가 봐도 별 뾰족한 수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내 곁을 떠나지 않고 나의 임지를 늘 따라 다녔다.
나는 너를 자식처럼 여겼다. 나는 자식이 없었다. 내가 전쟁터를 누비면서 생과 사를 넘나들 때 한결같이 내 옆에 있어 준 참모는 너였다. 나의 장군으로서의 불멸의 명성은 사실 너의 공헌이다. 네게 고마움을 표한다. 너는 밤새 적진의 강약을 분석하고 아군의 전세를 분석해 백전불퇴의 전략을 짜냈다. 너는 나의 분신으로 젊은 날의 나였던 것이다.
나는 전쟁터에서도 늘 나를 찾아 오는 학자들과 격물치지가 무엇인지를 토론하고 논쟁하였다. 내 막료들은 학자이자 전장의 전사였고 물론 너도 그러하였다. 그러므로 나의 학설은 이론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사느냐 죽느냐는 절박하고 절실한 전쟁터에서 나온 것임을 너는 잘 알 것이다. 삶은 전쟁이다. 전쟁에 패배한 자에게 세상은 지옥이다. 그러나 지옥에서도 연꽃 한 송이를 피워 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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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에 의한 지식은 한계가 있다. 머리속의 지식으로 과연 성인이 될 수 있는가 말이다. 공부한다고 성인의 마음이 될 수 있는가. 사물과 대상에 대한 연구를 하면 저절로 마음이 성인의 경지에 연결되는가. 지식 공부가 인격의 도야로 연결되는가 말이다. 아니다. 마음가짐이 지식 탐구보다 선행되어야 하지 않는가. 내 마음이 성인의 마음을 품고 있어야 이치와 성신(聖神)이 내 마음에서 작동하지 않는가. 이치가 먼저가 아니라 마음과 성신이 먼저이다. 마음과 이치는 하나이지 둘이 아니다. 그렇다고 지식 공부가 필요없다는 게 아니다. 지식은 필요하다.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말이다. 지식을 쌓되 그것을 허물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아무리 큰 사건이 일어나도 내가 알지 못하거나 내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나와는 무관한 것이다. 어디서 누가 죽더라도 내 마음에 들어 오지 않는다면 나에겐 더 이상 물(物)이 아니다. 어느 산에 아름다운 꽃이 피어 있더라도 내가 모른다면 물(物)이 아니다. 물론 내가 보지 못하는 곳에 물(物)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내 마음에 들어온 것만이 내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지금 이순간에 수많은 사건과 사고가 있지만 내 마음에 접촉된 것만이 나의 우주이고 세계이다. 그러므로 사람마다 자기의 우주가 다르고 세계가 다르다.
매일이 생과 사의 전쟁터요 순간순간이 양심과 욕심의 한판 승부처이다. 그러므로 사건이 내 마음과 부딪혔을 때 마음을 바르게 해야 한다. 양지(良知)는 전지하다. 양지에 입각해 바로 처리하면 하늘의 도에 합치한다. 양능(良能)은 전능하다. 양능에 입각해 처리하면 바로 실제 효과가 나타난다. 전지전능한 존재는 인간의 양심이다. 양심이 하늘이고 천명을 받는 곳이 양심이다. 양심이야말로 지성소이다.
누구나 마음을 바르게 하면 성인이 될 수 있다. 성인이 되는 데에는 지식이 필요 없다. 타고난 마음을 바르게 하면 된다. 황제 뿐만이 아니라 누구나 하늘의 아들이다. 나도 너도 하늘의 아들이다. 하늘은 모든 인간에게 신성(神性)을 깨달을 수 있는 성품을 부여해 주었으니 그 양심의 뜻대로 사는 것이 하늘의 도이자 인간의 도이다. 진리가 만일 존재한다면 단순한 것이다. 일상속에 평정심으로 사는 게 진리이지 별다른 도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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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은 두서가 없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숨이 가쁘고 붓은 떨린다. 반복되는 말이 있더라도 끝까지 읽어 주길 바란다. 나는 태어나 6살때까지 말을 못했고 20대에 두번의 과거를 모두 실패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세번째 응시해서 합격을 했다. 그 때 나의 나이 27세였다. 목적이 있다면 결코 포기하지 말라. 나는 앞에서 말했듯이 35세에 장형 40대를 맞아 사경을 헤매었고 유배지로 가며 암살자의 위험을 받았다. 유배지에서도 생사의 위험을 겪었다. 늘 암살자들의 위협속에 생과 사를 넘나 들었다. 그리고 너를 가르치는 어느날 새벽 드디어 깨달음의 순간이 왔다.
10대에 나의 목표는 성인이 되는 것이었다. 나는 12살에 어머니를 여의었고 16살에 결혼을 하였다. 결혼식날 도관을 지나다가 무언가에 홀려 신부에게 못 돌아갔다. 그날 도사를 만나 양생술이 무언지를 물으며 도사와 함께 밤새 깊은 명상에 잠겨 첫날밤을 보냈다. 여자보다는 명상이 좋았다.
신부 집에서는 날 보고 정신이 나간 미친 놈이라고 하였다. 십년후에 나는 용장으로 유배를 갈 때 어느 산속에서 옛날의 도사를 만났다. 그 도사는 내가 결혼식날 밤새 양생술로 토론을 한 그 도사였다. 이처럼 생은 신비이고 인연 또한 신비이다.
사람의 운명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나는 17세에 누량이란 학자를 방문했다. 누량은 성인을 위한 학문에로 나를 이끌어 주었던 기인이었다. 나는 성정이 자유롭고 호기로와 모든 학문과 종교를 섭렵해 보았다. 나는 유학을 공부하는 이외에 도교와 불교를 닥치는 대로 공부하고 실천해 보았다. 그러나 32살부터는 오로지 인의예지의 유학에 전념하였다. 학문은 마음을 기르는 것이외에 아무것도 없다. 배운다면 다 잊어 먹길 바란다. 나는 마음을 바르게 하기 위해 서예에 몰입했던 적도 있다. 유학 이외에 불도나 도가를 공부한 것은 성인이 되기 위한 방편으로 한 것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다. 인의예지의 유학이야말로 만고의 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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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과 사가 종이 한장 차이에 달려 있다. 나는 유배지에서 스스로 작은 움막을 지었다. 손수 먹을 양식을 구해야 생존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런 상황에서 성인에 도달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공포가 나를 감쌌다. 나는 커다란 돌을 구해 일주일간 돌을 다듬고 쪼아 석관을 만들었다. 석관 안에서 잠을 자기도 하고 석관 옆에서 명상을 하기도 하였다. 도대체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음의 위험에서 차라리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석관을 만들어 놓고 그 안에서 잠을 자기를 수개월 하였다. 그러다 보니 신기하게도 죽음이 하나도 두렵지 않게 되었다. 나는 이미 죽은 몸이요 지금 살아 있는 것은 덤이라 여겼다.
석관속에서 나는 죽은 시체이다 라고 생각하고 지내다 보니 너무 편안했다. 그동안 세상이 주었던 두려움이나 정반대의 쾌락이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되었다. 맘먹고 대결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부와 권력과 명예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추구하고 살기에 이런 것을 잃을까 두려워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헛된 욕망이고 죽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그것은 세상의 미신일 뿐이다. 지금의 학문이 이런 것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우상일 뿐이다.
나 역시 한때 그러한 것을 추구하였던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성인이 되고자 하는 마음 역시 이것과 관련이 없다고 감히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세속적 성공을 바라는 풍조는 누가 만든 것이냐. 인간이 산다는 것은 사실 죽음에로 달려 가는 삶 아니더냐.
세속적 성공은 내가 아닌 나로 살아가는 것이었다. 나는 나대로 살아가겠다고 생각했다. 나의 본래성을 회복해 살아가는 것, 그것이 구원이다. 죽음 앞에 서면 세상의 가치는 무의미해진다. 돈이 많아도 베풀지 못하고 인색하다면 그의 부는 복이 아니라 저주이다. 높은 지위와 명예 역시 어려운 백성을 도와 주지 못하면 출세가 오히려 독이 되어 돌아온다.
도덕적인 양심 이전에 더 본래적이고 순수한 것을 일러 양지라고 한다. 그렇다. 맹자가 말한 양지가 이것이다. 양심이라 해도 무방하다. 인간은 영원히 살 것처럼 착각하고 살아가며 죽음을 대면하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은 삶을 죽음과 반대되거나 모순으로 되는 것으로 알지만 그렇지 않다. 사는 것은 죽어 가는 과정이니 삶과 죽음이야말로 아이러니이다.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살아 가는 것은 죽어 가는 것일 뿐이다.
매 순간이 삶이자 죽음이다. 나는 삶과 죽음이 순간에 결판나는 전쟁터에서 수많은 밤을 보냈다. 나는 군인이자 학자이다. 그게 나의 생이었다. 생과 사는 종이 한장의 차이도 나지 않는다. 나의 깨달음은 생과 사의 전쟁터에서 얻어진 것이다. 진리는 각자 삶의 자리에서 떠오르는 양심의 목소리이다. 미혹당하지 말라. 관념의 행복을 추구하다가 현실의 행복을 포기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라.
나는 그날 새벽 오도(悟道)의 체험을 하고 나니 먹지 않아도 배 고프지 않고 식색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머리가 점점 맑아져 어느 경전을 읽더라도 글쓴이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깨달음을 입증하고자 오경(五經)을 다시 검토해 보았다. 양심의 광명한 빛으로 경전을 읽으니 송이꿀처럼 달디 달았다. 나의 오도 체험은 경전을 통해 증명되었다.
성인은 외부 환경에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니 타인의 권세와 학문에 주눅들 필요가 없다. 네 자신의 호연지기만을 함양해라. 성인은 성인이 되려는 마음조차 없으니 걱정할 게 없다. 양지로서 떳떳히 살 뿐이다. 본성은 그 자체로 자기충족적이므로 자기의 마음을 보고 알아채야 한다. 그리고 나쁜 마음이 일어나걸랑 그 자리에서 바로 싹을 제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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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물은 몸과 마음으로 저절로 되는 것이다.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믿으면 성인의 길을 걸을 수 있다. 성인은 다른 것이 아니라 참된 인간성을 갖춘 사람이 되는 것이다. 격물은 성인이 되는 과정에 늘 마음을 바르게 하는 내면적인 것이다. 외부의 사물에 대한 지식을 쌓는 것과 관련이 없다. 그런 지식은 오만으로 이어져 오히려 독이다.
성인의 말은 경전에 있고 경전의 말은 내가 몸소 체험해 봐야 한다. 그럼 나의 체험과 성인의 체험은 동일한 것이 되는 것이다. 나와 성인은 같아지는 것이다.
성인도 인간이고 너도 인간이다. 인간에겐 누구나 본성(本性)이라 하든 신성(神性)이라 하든 조물주가 부여한 천부적인 성품이 있다. 이 성품은 바로 선한 양심이다. 인간은 마음으로 느끼고 감동하고 울고 비통해하고 아파한다. 이것이 양심으로 양지이고 양능이다. 순간순간 가장 적절하게 지선(至善)의 길을 선택하는 길은 양지를 따르는 길이다. 구원은 자기에게 달려 있지 남이 주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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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란 무엇인가. 물론 마음에는 선한 마음도 있고 악한 마음이 있다. 음란한 마음은 죽기 전까지 널 괴롭힐 것이다. 산속의 도적은 소탕하기 쉬워도 흉중의 도적은 없애기 어렵다. 선과 악의 충돌할 때 선을 택하면 어려움이 없을 것이나 선과 선이 충돌할 때 너는 어쩔 것이냐. 아비로서의 선과 자식으로서의 선이 충돌할 때 어쩔 것이냐 말이다. 참으로 그 절박한 순간에 너는 어떻게 선택할 것이냐.
한 순간의 마음에서 승패가 가려진다. 찰나가 영원으로 연결된다. 십년 공부 도로아미타불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도(道)가 높을수록 마(魔) 또한 강해진다. 너는 더럽고 추한 생각이 올라올 때마다 뿌리를 뽑아내야 한다. 이를 발본색원이라 한다. 남을 죽이고자 하는 미움이 일어나면 이미 살인한 것이다.
거룩한 장소는 다른 곳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다. 남들이 보기에 야만적으로 보이는 네 고향 용장이 바로 성인이 사는 곳이다. 네 고향 사람들의 마음이야말로 욕심의 때가 묻지 않은 거룩한 마음이다.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해 땀흘리며 사는 그곳이야말로 성인이 사는 동네이다.
그렇다. 어디든 성인의 마음대로 사는 곳은 어디나 성인의 동네이다. 네 마음 자체가 성인이지 다른 곳에서 찾을 필요가 없다. 인간의 정과 사랑이 넘쳐 나는 곳이 가장 성스러운 곳이다. 세상에서 미천하게 보이는 사람들이 오히려 순수하고 소박하게 이웃과 더불어 잘 살고 있다. 그들과 희노애락을 함께 누린 용장의 삼년이 가장 행복한 나날이었다. 그들은 헛된 탐욕을 부리지 않고 오직 하늘에 감사하며 하루 하루를 욕심없이 살 뿐이다. 인간의 마음이 성전이고 인간의 순수한 마음이 성인의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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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했듯이 나는 6살이 되었는데도 입을 열어 말을 하지 못했다. 어느날 스님이 와서 말했다.
“아이의 태몽이 구름을 타고 온 것이라서 구름운(雲) 자를 이름에 썼으니 말을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천기를 누설하는 이름이 구름운(雲) 자(字)이다. 이름을 고쳐야 한다.”
왕운이라는 내 이름을 왕수인으로 고치자 입을 열어 말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인(仁)을 지키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는 뜻에서 이름을 수인(守仁)으로 하였다고 한다. 내가 이 말을 몇번 말한 듯 한데 두서가 없구나.
나의 도는 하루 아침에 터득한 것이 아니라 25년간의 학문과 수양, 실천과 성찰의 산물이었다. 32살 이후로는 오직 인의예지의 유학 공부에 전념하였다. 그 결실은 37살에 용장오도(龍場悟道)로 나타났다. 오랜 시간이 걸리는 씨앗이 뿌려진 후 나온 결실이었다. 용장오도 이후 나는 20년을 살아 오늘에 이르러 이 순간 죽음의 목전에 와 있다.
격물치지를 아무리 해 봤자 심뽀가 바뀌지 않는한 아무리 공부해봤자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내 마음과 의식이 바뀌지 않으면 세상이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누군가가 세상을 바꾸어 주길 빌어 봐야 결코 바뀌지 않는다. 이 세상은 조물주라도 못 바꾼다.
먼저 내 마음과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 그러므로 삶은 이 순간에 내가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내가 어떻게 하고 있는가. 현재 뿌린 대로 앞날에 거두어진다. 이 순간에 성인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라. 남들의 시선이나 타인의 인정은 신경 쓸 필요가 전혀 없다. 하늘 아래 떳떳하게 양심대로 살 뿐이다. 이것이 죽고 사는 것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나의 말이다. 생과 사는 인간이 통제할 수 없다. 당연히 죽고 사는 것을 내 뜻대로 할 수 없다. 그런 것은 하늘에 맡겨 버려라. 너는 이 순간 성인의 마음대로 살 뿐이다. 순간순간 선한 양심의 명령에 따라 살라.
네 마음이 천리(天理)이고 천도(天道)이며 도심(道心)이다. 부모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을 그대로 실천하고 살면 성인의 길이다. 부디 그 마음으로 살라. 나보다 무지하고 가난하고 별볼일 없게 보여도 그들이 사랑스럽게 보이고 더 나아가 그런 분별심도 없어진다면 이미 성인의 마음이다. 부디 그 마음과 믿음으로 걸어가라. 성인이라는 마음조차 잊고 살아라. 지식을 쌓는 공부를 하지 않더라도 성인의 마음을 소유할 수 있다. 배우지 않더라도 성인이 될 수 있다. 그러니 배운 것은 다 잊어 먹어라. 배우되 그걸 버리라. 그럼 네 안에 쌓여진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 깨어라. 네 우주를 바꾸어라. 그건 네 생각과 마음을 바꾸는 것이다. 부디 내말을 명심해라.
이제 네 나이가 내가 널 처음 만났을 때의 나이가 되었구나. 행복하게 잘 살라. 인생은 짧구나. 순간순간을 즐겁고 기쁘게 살면 얼마나 좋을까.
마지막으로 며칠전 태어난 네 아들에게 이름을 준다. 운(雲)이라는 이름이다. 어제 구름을 타고 다니는 꿈을 꾸었다. 구름은 상서로운 일들이 일어날 조짐을 알려 준다고 한다. 상서로운 일이 늘 너와 네 가족에게 임하길 빈다. 이만 줄인다.
죽음을 앞두며 생과 사의 경계에서 양명이 쓰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