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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창호 Mar 07. 2024

낙도의 어려움을 도와준 노연태

인천 연안 장봉도에서 사랑을 베풀다

 인천 역사에는 수많은 인물들의 삶의 흔적이 있다. 필자는 박물관 학예사로 일하므로 인천역사의 인물을 소개하되 가급적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지금까지 인천 역사의 대표적인 인물은 어느 정도 정리되어 여러 책자를 통해 소개되어 왔기에 똑같은 인물을 굳이 소개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번에 소개하는 인물은 인천 연안의 장봉도에 중학과정의 ‘푸른학원’을 설립한 노연태(1914~2004)란 인물이다.      

 인천 영종도와 강화도 사이에는 세 개의 섬(신도, 시도, 모도)이 연이어 있는데 삼형제섬이라 불린다. 그 서쪽에 장봉도가 있다, 장봉도 평촌마을의 해양경찰서 옆을 앞장술이라 하는데 그곳에는 1967년에 개교한 중학교 건물과 교사의 사택이 지금도 남아 있다. 바로 ‘푸른학원’이다.      

  노연태는 진남포 출생이다. 진남포는 평양의 관문으로 1897년 개항장이 들어선 근대 도시였다. 진남포에서 성장한 노연태는 평양 숭실학교에 입학해 공부했고 청년이 되어 외항선 선장으로 일했다. 인천으로 온 그는 1940년경 박정수를 통해 송두용(1904~1986)을 알게 되었다. 박정수(1898~1996)는 평남 강서 출신으로 진남포 삼승학교와 이화학당을 졸업하였다. 그녀는 1918년 덕적도의 송재붕과 결혼하였다. 송재붕은 훗날 덕적면장과 경기도의원을 지냈다. 인천의 내리교회, 창영교회에서 전도부인으로 유명했던 박정수는 신사참배를 하는 교회를 나와 정기구독하던 <성서조선>을 통해 송두용을 알게 되었다. 송두용은 김교신, 함석헌과 더불어 무교회주의자로 당시 경인 지역에서 교파의 지원도 없이 홀로 독립 전도 활동을 하고 있었다.      

  노연태는 인천 율목동 박정수의 집에서 송두용을 만나 형이라 부르며 박정수와 함께 송두용의 서울 오류동 집회에 나가게 되었다. 노연태는 해방 후 함석헌 가족과 그 일행들이 1947년 월남하자 자기의 집을 비워주고 다른 곳으로 이사할 정도로 어려운 사람을 돕는 데 앞장을 섰다.      

 송두용을 도와 경인지역에서 선교에 힘쓴 노연태는 병원과 약국이 없는 낙도를 돌며 의약품을 공급해 주었다. 그는 외항선의 선장이기에 선장으로 일하면서 자연스레 낙도민들의 고충을 잘 알고 있었다. 알고 있기에 이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인천 연안의 섬사람에게 가장 큰 고통은 아파도 약을 구할 수 없는 것과, 위급할 때 병원에 갈 수 없는 것이었다. 이에 선장인 노연태는 섬사람들에게 미국 개혁의료선교부의 의약품을 건네주고, 인천시내로 응급환자를 실어 날랐다.      

  노연태는 선장이지만 섬사람들에겐 선장보다는 약사이자 의사로 인식되었다. 사람들은 아플 때마다 노연태를 찾았다. 찾았다기보다 노연태가 먼저 찾아갔다. 노연태는 무면허 약사이자 의사(?)인 셈이었다. 환자가 있으면 찾아가서 도와 주었다. 섬에 의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환자가 나을 수 있는 길이 있으면 최선을 다해 도왔고 댓가를 받지도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의 헌신에는 개혁의료선교부 총무 오영환(1929~)과 박상진 청년의 도움이 있었다. 오영환은 경기 장단 출생으로 함석헌의 씨알 사상을 접하고 개혁의료선교부에서 평생 자선활동을 하였고, 1976~1990년에 걸쳐 오랫동안 정농회 총무를 하였다. 박상진은 노연태를 돕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목사가 되었다. 그럼 개혁의료선교부는 어떤 단체일까.     

 개혁의료선교부는 해방 후 미국인 의사 피터 보렌스(Peter Boelens) 박사를 중심으로 외딴 낙도에서 무의촌의료 봉사를 펼친 것에 기원한다. 보렌스 의사는 1962년 미국에서 한국에 들어와 무의촌 지역을 다니며 진료했다. 그는 귀국한 후 1975년 개혁의료선교부를 만들어 한국의 농어촌과 달동네를 계속 지원했다. 보렌스는 한국의 무의촌 진료를 위한 펀드 기금을 조성해 정기적으로 한국을 지원한 것으로 보인다.      

  노연태는 선장으로 인천 연안을 항해하면서 강화도, 영종도, 복도면 등 인천 연안의 섬에서 곤경한 처한 낙도민들을 돕고 있었다. 노연태가 잠시 장봉도에 머물 때 그의 집안일을 도와주던 진촌 마을의 아주머니에게 딸이 있었다. 그 소녀가 동죽을 캐던 중 소나기를 만나 대야를 머리에 쓰고 호미를 들고 귀가 중에 낙뢰를 맞아 사망하였다. 이를 본 노연태는 낙도 섬 아이들의 암담한 현실을 보고 충격을 받아 어떻게 하면 낙도의 소년 소녀들을 도울까 궁리한 끝에 결국 사재를 털어 중학과정에 해당하는 ‘푸른학원’을 만들게 된 것이다. 그 해가 1967년이다. 섬의 소년 소녀들이 푸른 꿈을 품으며 공부하기를 소망하여 학교 이름을 ‘푸른’으로 하였다.       

  노연태는 장봉도 ‘푸른학원’을 3년간 운영하다가 1969년에 학교 운영을 송두용에게 맡기고 강화도로 들어갔다. 그는 강화 화도면에서 약방, 한약방 등을 운영하여 돈을 벌어 ‘푸른학원’을 후원해 주었다. 또한 강화인삼을 사들여 서울에 가서 팔아 돈을 모아 낙도의 어린이들을 도왔다. 그는 학교뿐만 아니라 장봉도의 선착장에서 평촌마을에 이르는 5km의 도로를 닦아주어 섬사람들의 애로를 해결해 주었다. 지금도 그 도로는 장봉도를 관통하는 가장 긴 도로이다. 노연태는 90세로 강화도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사후에 <노연태신앙문집>이 출간되었다.       

 ‘푸른학원’에는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학교를 세우고 도운 사람들의 넋이 고이 잠들고 있다. 무교회주의자들은 자신이 이름이 남겨지기를 원치 않는다. 필자가 용기를 내어 일부만 기록하였다. 부디 용서해주시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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