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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창호 Mar 15. 2024

피와 땀으로 써 내려온 예술과 전통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한 우현 고유섭의 미술사 연구

 오늘날을 문화예술의 시대라고 한다. 세계화 시대에 민족과 문화의 경계는 날로 모호한 면이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문화의 경계는 존재하고 서로 다른 문화끼리 경쟁하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민족과 문화에 우열은 없으나 큰 영향을 주는 문화예술은 있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문화예술의 시대에 한국의 미는 무엇일까. 우리에게 세계에 드러낼 만한 K-예술이 있을까.     

  한국의 현대사는 서구화와 근대화를 목표로 하였다. 그 과정은 서양의 문명을 받아들이는 과정이었다. 문화예술 역시 서양 것을 배우기에 바빴다. 이 결과 우리의 지배적인 문화는 서양의 문화예술이 아닌 것이 거의 없다. 서구화의 결과 아무런 문제가 없으면 다행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 문화의 정체성(아이덴티티)가 빠져 있어 정체(停滯)되어 있다. 이 점에서 우리가 소홀히 해 왔던 우리 문화의 아이덴티티를 찾아야 할 때가 되었다.      

 문화는 서로 교류하기에 동서양의 문화가 만나는 것은 역사의 필연이다. 문제는 서양문화의 이원론적이고 분석적인 문화가 여전히 유효한지 점검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서양은 이미 자기 문화의 한계를 인식하고 포스트모더니즘을 거쳐 새로운 세계에로 나아가고 있지 않는가. 서양은 자기의 부족한 점을 동양에서 찾고 이를 보완해 나가고 있는데 우리는 여전히 서양 것만을 신주처럼 모시고 이에서 벋어나질 못하고 있다. 한번 성찰해 볼 일이다. 이 점에서 필자는 한국의 미(美)가 무엇인지 그 길을 처음 개척한 우현 고유섭(1905~1944)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우현의 대학 졸업논문은 예술활동의 본질을 묻는 미학 논문이었다. 때는 1930년이고 그의 나이 25세였다. 한국미술사 연구를 하기 전에 그는 자기만의 미학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이성과 감성, 인간과 자연, 전통과 창조를 대립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이를 하나로 융합하는 미학적인 관점이었다. 예술과 삶 역시 분리되지 않고 하나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서로 달라 보이는 모순적인 것조차 대립으로 보지 않고 서로 상보적인 관계로 보는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남과 여는 서로 달라 보이나 상보적인 관계 아닌가. 또한 인간의 삶은 이성과 합리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삶은 다양하고 다채롭다. 그러므로 지성과 감성 등 인간의 모든 삶이 녹아 있는 것이 예술이므로 인간의 삶을 둘러싼 생활감정의 이해작용이 예술이라는 관점이다. 이것이 우현의 초기 생각이었다.      

 우현은 어렸을 때부터 예술에 대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어 학창시절에 우리의 미술사를 연구하는 것을 자기의 소명으로 삼았다. 한국의 미가 무엇인가에 마음이 끌려 이것을 찾는 것을 자기 생의 목적으로 삼았다. 그 결과 당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미학 미술사를 전공하게 되었다. 자기가 절실하게 생각하면 몰입하게 마련이고, 몰입에서 독창성이 터져 나온다.      

 우현이 25세때 쓴 학부 졸업논문에 ‘전통’에 대한 말이 있다. 전통이 법고창신(法古創新)을 하지 못하고 ‘양식’으로만 계승하면 그 틀에 갇혀 버리고 질식하게 된다. 결국 예술의 본질을 잃게 되어 전통의 타락이 일어난다. 전통은 위대하나 그것을 신격화하면 우상이 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예술의 본질을 유지하면서 시대에 따라 변용해야 한다. 이것이 우현의 생각이었다. 전통에 대한 우현의 생각은 계속 천착되어 10년 후에 한국미술사의 ‘전통’에 대한 인식으로 나타난다.      

 우현은 예술이 무엇이고 우리의 미술과 전통이 무엇인지를 계속 질문하였다. 우현에게 있어 예술은 유희(遊戲)가 아니다. 유희라는 말에는 삶이 풍요로워 여가시간에 취미를 즐기는 ‘고상한 유희’가 예술이라는 생각이 들어 있다. 우현은 이를 거부한다. 예술을 유희라고 하는 것은 예술에 대한 모욕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의 예술관을 들어 보자.     

 “조선의 미술은 수천년간 가난과 싸우고 온 끈기있는 생활의 가장 충실한 표현이요, 창조요, 생산이다. 절대 여유에서 나온 생활의 잉여잔재(유희)가 아니다. 한 개의 예술을 낳기 위해 쇄신각골(碎身刻骨)하고 발분망식(發憤忘食)하여 나온 것이다.”(아포리스멘) 그에게 있어 예술은 고난이든 기쁨이든 삶 자체다. 삶에서 우러난 생활감정의 이해 작용이 예술이라는 기본적 시각을 유지하고 우리의 미술은 민중의 삶 자체가 예술이라는 발언이다. 민중의 생활과 예술은 분리되지 않고 하나이다. 한국의 미술은 우리의 삶과 생활을 표현해 온 유구한 전통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현에게 우리의 고미술(古美術)은 우리 역사의 피와 땀이 어린 악전고투의 산물이다. 그의 말을 들어 보자. “전통이란 공놀이를 하는 것처럼 손에서 손으로 손쉽게 넘어가는 것이 아니다. 전통은 오히려 ‘피로서’ ‘피를 씻는’ 악전고투를 치러 ‘피로서’ 얻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얻으려하는 사람이 고심참담(苦心慘憺), 쇄신분골(碎身粉骨)하여 죽음으로써, 피로써, 생명으로써, 얻으려 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요, 주고 싶다하여 간단히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조선미술문화의 몇낱 성격)      

 우현은 예술의 본질을 묻는 글을 쓴 이후 15년간 피로서 글을 썼다. 그리고 해방을 1년 앞두고 39세에 졸(卒)했다. 피로 쓴 그의 글은 여전히 혼이 있고 정신이 살아 있다. 피로서 썼기 때문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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