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수도원 기행 2

중세에서 르네상스까지

by 이인숙 insouk lee

3. 수비아코, 성 베네딕토의 성지를 가다


수비아코는 성 베네딕토가 은수자(세상과 떨어져 홀로 수도생활을 하는 사람) 생활을 시작한 곳이다. 우리는 그의 자취를 좇기 위해 구불구불 산길을 올라 마침내 수도원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려 가방을 끌고 방으로 가는데 보름달은 여기까지 따라와 검푸른 하늘을 밝힌다. 수도원 뒷산 꼭대기에는 작은 불빛이 홀로 반짝인다. 마치 어둠 속 바다에 떠있는 배들을 인도하는 등대의 불빛처럼 보였다. 다음날 보니 산꼭대기에 세워진 십자가였다. 십자가는 기독교인들에게는 어둠 속에서 길을 인도하는 등대라고 할 수 있으니 내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늦은 밤에 도착한 성 스콜라스티카 수도원

우리가 머물 수도원의 방은 참 단출하고 검소했다.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 있는 방, 수도원다웠다. 하얀 벽에 걸린 소박한 십자가가 이곳이 수도원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게 했다. 얼른 씻고 잠자리에 들었다. 방은 좀 추웠지만 견딜 만했다.

시차 때문인지 여행의 첫날이라 그런지 잠이 오지 않아 고생하다가 새벽 이른 시간에 일어났다. 조용히 일어나 밖으로 나오는데 1층 벽면 알림판에 여러 가지 광고와 함께 아름다운 여성의 흑백사진이 눈길을 끌었다. 수도원에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미모의 여성이었다. 그녀의 빼어난 미모에 이끌려 다가가니, 사진 하단에 ‘지나 롤로브리지다, 1927년 7월 4일 수비아코에서 태어나다’라는 설명이 붙어있었다. 그 유명한 배우 지나 롤로브리지다가 수비아코 출신이라니, 오래 전이지만 한때 세계적으로 명성을 날렸던 배우가 아닌가. 한편으론 수도원에서 유명 여배우가 이 지역 출신임을 자랑하는 게 재미있었다.


밖으로 나오니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가운데 날이 무척 찼다. 수도원 뜰의 돌담 아래를 내려다보니 깊은 골짜기에서 찬바람이 무섭게 불어온다. 사방이 다 산이었다. 날이 너무 추웠다. 손이 시릴 정도였다. 좀 더 따뜻하게 입고 나올 걸, 후회하면서 다시 들어갈까 하고 현관 앞으로 갔으나 문이 열리지 않는다. 이런 낭패가…, 누군가 밖으로 나오기를 기다리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어쩔 수 없이 수도원 뜰을 돌아보다가 뒤쪽으로 올라갔다.

수도원을 끼고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계속 걸었다. 가끔씩 머리 위로 아치형 통로 가 지나간다. 걷다보니 어느새 수도원을 벗어났는지 잡목이 아무렇게나 자란 산길이 나타났다. 여러 지명과 거리를 나타내는 이정표가 보이는 곳에서 길을 돌아섰다.

좀 춥기는 했지만, 새벽바람을 쐬며 아무도 없는 수도원 길을 혼자 걷는 것이 좋았다. 길게 심호흡을 해보았다. 차가운 공기가 목을 지나 폐까지 들어간다. 수도원의 돌담을 만져보았다. 오래 된 건물의 거칠고 차가운 돌이 은근히 내게 말을 걸어왔다. 수백 년의 세월을 견뎌온 돌이 건네는 말이 가슴 속에서 웅웅거렸다. 중세의 어느 시간에 이곳을 오가던 사람들의 말소리, 길게 끌리는 수도복 속에 감춰진 생각들… 그러나 형체는 보이지 않는다.

너무 추워서 다시 방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문을 열 수 없어 누군가 나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데, 발이 시리다. 열흘만 지나면 5월인데 손발이 시린 경험이라니…. 마침내 출입구 안쪽에 관리인이 나타났다. 얼른 다가가니 문을 열어준다. 들어서는 나를 보면서 출입구 바깥벽 높은 곳에 붙어있는 버튼을 가리킨다. 초인종이거나 현관문을 여는 버튼일 것이다. 진작 살펴봤더라면 추운 데서 떨지 않았을 텐데, 이 무슨 바보짓인가.


궁륭형 천정이 아름다운 수도원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마치고 성 베네딕토 수도원으로 올라갔다. 소박하지만 옛스러운 멋을 지닌 돌문 위로 아침햇살이 찬란하게 빛난다. 돌문을 지나 숲길을 걷는 내내 재재거리는 새소리가 들렸다. 공중에 울려 퍼지는 맑고 청아한 새소리는 어느 악기보다도 아름다운 음악이었다.


* 사크로 스페코(Sacro Speco), 성 베네딕토의 '거룩한 동굴'


마침내 숲길이 끝나고 야트막한 터널 같은 입구를 지나자 베네딕토 수도원이 나타났다. 그 순간, 우와! 하는 감탄사가 저절로 나왔다. 수직의 절벽에 직립해 붙어 있는 거대한 수도원이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수도원은 높은 산들과 깊은 골짜기에 둘러싸여 있었다. 한국에서 경관이 뛰어난 곳에 사찰이 있듯이 이탈리아에는 수도원이 있었다.

수도원 입구에 길게 난 마당이 있었다. 넓지는 않지만 평탄한 땅을 놔두고 수도원은 가파른 절벽에 붙어 있었다. 성 베네딕토가 스스로 가장 험난한 바위 절벽을 찾아 수도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2.사크라26.JPG 성 베네딕토 수도원 (사진: 이도흠)



성 베네딕토(Sanctus Benedictus de Nursia, 480-547)는 480년경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 지방의 누르치아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성장한 그는 청년 시절 유모와 함께 고향을 떠나 로마에서 수학한다. 당시 로마는 내부에서 서서히 붕괴해가던 서로마제국이 서기 476년 완전히 멸망한 후 정치체제의 혼란과 더불어 윤리적인 퇴폐와 타락이 만연하던 불안한 상황이었다. 로마의 혼란과 방종에 실망하고, 자신도 이에 물들지 않을까 두려움을 느꼈던 베네딕토는 기도와 묵상에 전념할 수 있는 고독한 장소를 찾아 로마를 떠났다. 그의 경건하고 순결한 영혼은 신에게 좀 더 가까이 가기 위해 세상과 격절된 고요한 환경이 필요했던 것이다.

베네딕토는 수비아코에서 로마노라는 이름의 수도사를 만나 그가 가르쳐준 대로 가파른 절벽에 나 있는 동굴을 찾아갔다.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운 동굴은 바로 그가 원하던 장소였다. 이곳에서 3년간 기도와 묵상, 고행의 수도생활을 하는 동안 로마노 수도사는 빵과 물이 담긴 바구니를 절벽 아래로 내려 보내주었다. 베네딕토는 그 이외의 다른 음식은 먹지 않았다고 한다. 이 동굴을 ‘사크로 스페코’(Sacro Speco) 즉, ‘거룩한 동굴’이라고 한다. 바로 이 동굴을 중심으로 지어진 것이 지금 우리가 찾은 베네딕토 수도원이다.

313년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그동안 배척과 박해를 당하던 기독교는 종교의 자유를 얻게 된다. 소수 종파였던 기독교가 대중적인 종교가 되자 열정적이고 경건한 신자들은 좀 더 금욕적이고 순수한 기독교적인 삶을 원하게 되었다. 베네딕토는 환락의 도시 로마를 떠나 수비아코의 산중에 들어가 금욕과 고행의 삶을 통해 그러한 종교적 열정을 실행하였다. 로마제국이 멸망하기 전부터 금욕적 수도생활을 시작한 사람들은 대개 귀족계급이었다. 이 때문에 수도원이 귀족화되고 부유해지는 경향이 나타났다고 한다.


수도자에게는 항상 유혹이 따른다. 그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것이 음욕인가보다. 동굴 속에서 홀로 3년을 수행하던 베네딕토는 문득 로마에서 만났던 아름다운 여인이 눈에 어른거려 산을 내려간다. 그러나 가시덤불과 장미덩굴을 만나고는 갑자기 자신이 악마의 유혹에 빠졌음을 깨닫는다. 그는 옷을 벗어버리고 가시 덩굴에 몸을 던져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가시에 찔리는 고통을 겪으면서 마침내 육욕을 이겨낸다. 이후 베네딕토는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게 되었다. 베네딕토가 온몸을 던져 날카로운 가시에 자신을 맡기던 장미꽃밭은 수직으로 깎아지른 절벽 같은 수도원의 한참 아래쪽에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수도자 한 분이 무심히 정원을 가꾸고 있다.

베네딕토가 유혹을 이겨낸 장미 정원을 보다가 문득 오래 전에 본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영국의 유명한 연극연출가이며 영화감독인 피터 브룩(Peter Brook)의 영화 <뛰어난 사람들과의 만남 Meetings with Remarkable Men>(1979)은 한 구도자가 궁극의 지혜를 찾아가는 구도 여행을 따라 가는 영화이다. 구도자는 중앙아시아의 부하라, 고비 사막 등을 다니며 다른 구도자들을 만나고, 그들의 다양한 수도의 규율과 방법을 발견한다. 영화에는 누런 흙먼지가 날리는 황량한 곳에서 한 구도자가 육욕을 아예 뿌리 뽑기 위해 극단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성기를 죽여버리는 장면이 나온다.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이만한 자기희생이 없이는 궁극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인가. 온몸이 가시에 찢기는 고행을 통해 육욕이라는 악마의 유혹을 극복한 베네딕토도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수도생활을 시작한 베네딕토는 두 번의 독살 위험을 겪는다. 510년경 비코바로의 수도사들이 베네딕토에게 원장이 되어달라고 졸라대어 베네딕토는 처음으로 수도사들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엄격한 규칙이 견디기 힘들어진 수도사들은 베네딕토의 독살을 시도한다. 그런데 베네딕토가 평상시처럼 기도를 하며 십자를 긋자 독이 든 포도주잔이 마치 돌을 맞은 것처럼 저절로 깨져버렸다. 베네딕토는 환멸을 느끼고 다시 ‘거룩한 동굴’로 돌아와 수도생활에 전념했다.

홀로 수도하기를 원했던 베네딕토의 소망과 달리 그의 수도생활에 감화를 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마침내 그는 동굴을 떠나 제자들과 함께 수비아코의 한 호숫가에 공동체를 만들어 정착한다. 그리하여 작은 수도회가 생기기 시작하면서 수도원은 13개로 늘어났다.

그는 동방정교회 수도원의 창시자인 성 삽바스(St. Sabbas the Sanctified, 439-532)의 사례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지만, 동방교회 수도공동체의 수도방식을 따르지는 않았다. 그들의 과도한 고행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베네딕토는 수도의 방편으로 자기 육체에 고통을 가하는 극단적인 고행보다 자신을 낮추는 순종과 겸손, 침묵을 강조했다.

그가 설립한 수도회는 중세 초기 암흑기에 영적 중심지로서뿐 아니라 유럽 사회의 학문과 도덕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세월과 함께 열두 개의 수도원은 차차 사라지고 지금은 우리가 어제 묵었던 성 스콜라스티카 수도원만 남아 있다.

그의 명성이 높아지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자 이를 시기한 인근의 한 사제가 독이 든 빵을 베네딕토에게 보냈다. 사제는 평소에 베네딕토를 험담하고 교회 신도들이 그를 만나는 것을 금했던 사람이다. 사제의 악의를 의심하고 있던 베네딕토는 까마귀에게 그 불길한 선물을 물고 가도록해서 다시 한 번 독살의 위험을 피한다. 그러자 이번에는 일곱 명의 이교도 여인들을 보내 베네딕토의 수도원 근처에서 벌거벗고 춤을 추도록 시켰다. 젊은 수도사들을 유혹하려 한 것이다.

사제의 끈질긴 악의에 베네딕토는 마침내 몇 사람의 수도사들과 함께 수비아코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가 막 떠나려는 순간에 끈덕지게 베네딕토를 괴롭히던 사제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원수라고 할 사제의 죽음에 베네딕토는 눈물을 흘리며 애도했지만 떠날 결심을 바꾸지는 않았다.

두 번의 살인음모는 당시에 이미 기독교가 상당히 타락했음을 보여준다. 기독교가 대중종교가 되면서 기독교의 선한 삶을 따르는 사람도 늘었지만, 세상의 타락과 음모도 수도원 안에 스며들었던 것이다. 로마 황제가 기독교인이 되자 출세를 위해 사제가 되는 사람들도 있었다.


수비아코를 떠나 몬테카시노에 자리 잡은 베네딕토는 서기 530년 아폴론 신전이 있던 자리에 수도원을 건립했다. 그가 몬테카시노 수도원에서 저술한 <수도 규칙 Regula Benedicti>은 수도생활의 이상과 목표를 제시한 것으로, 지금까지도 서방교회를 대표하는 수도 규칙이 되었다. 베네딕토 이전 4세기부터 동방교회의 여러 수도원 규칙이 서방에 소개되었으며, 서방교회의 수도원에서도 많은 규칙들이 앞 다투어 생겨났다. 베네딕토는 이들을 참고하고 또 당시에 잘 알려져 있던 ‘스승의 규칙(Regula Magisteri)‘을 바탕으로 그의 <수도 규칙>을 저술한 것이다. 베네딕토의 <수도 규칙>은 점차 유럽 여러 나라로 퍼지면서 수도원 운동이 활성화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수도원이 종교적, 문화적 중심지가 되는 데 기여했다. 또한 모든 수도원이 베네딕토의 <수도 규칙>을 따르면서 10-11세기에 이르기까지 서방의 모든 수도원은 곧 베네딕토 수도원이라는 관념이 생겼다.

베네딕토는 죽을 때까지 몬테카시노 수도원에서 수도생활을 하다가 547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후 1964년 교황 바오로 6세는 성 베네딕토를 유럽의 수호성인으로 선언한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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