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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프그래퍼 Jan 19. 2024

매일이 고비였던 대학병원에서의 간병 생활

쌓여 있던 감정을 소화하기 위해 쓰는 글 (3)

뇌출혈로 입원 중인 아버지의 간병을 남동생에 이어 내가 맡게 되었다.

동생과 엄마는 걱정이 많았다. 당시 난 휴식이 필요한 시기여서 일을 쉬고 있었고, 무엇보다 남성인 아버지를 딸이 간병하는 건 너무 고될 거라는 생각에 가족들의 걱정이 컸다. 하지만 인지 기능이 안 좋은 아버지를 가족이 아닌 간병인에게 맡기는 것보다는 시간적 여유가 있는 내가 간병을 하는 것이 내 마음엔 더 나은 결정이었다.


동생과 교대를 하던 날, 병원에서 코로나19 PCR 검사를 한 후 음성 결과가 나온 것을 확인하고 병실로 올라갔다. 그리고 동생에게 짧게 인수인계를 받았다. 아버지가 이 대학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는 간병인이 할 일이 참 많았다. 일단 낙상 위험에 따른 1:1 간병 중인 데다가 아버지에게 섬망도 있어서, 간병인이 자리를 비울 땐 반드시 아버지의 양손을 각각 보호 장갑에 끼우고 침대 난간에 단단히 묶어놔야 했다. 이동 시에도 동행은 필수였다. 아버지가 화장실에 갈 때는 칸 안에도 같이 들어가야 했다. 병실 벽에 붙여둔 종이에 물 섭취량과 대소변량 및 색깔/특징 등을 꼼꼼하게 기록해야 했고, 4시간 간격으로 폐렴 치료를 위한 네뷸라이저 기계를 가져와서 작동시켜야 했다. 아버지에게 열이 있을 땐 얼음팩을 가져와 양쪽 겨드랑이와 목뒤에 끼워서 체온을 낮춰야 하고, 얼음팩이 녹으면 비워서 다시 얼음을 채워 와야 했다. 아버지의 인지가 안 좋아서 대소변을 구분하지 못하니 화장실에서는 무조건 변기에 앉도록 시키라고도 했다. 그밖에도 세세하게 신경쓸 것들이 많았다.


동생은 특히 아버지 손을 묶어두는 것을 강조했다. 너무 살살 묶으면 풀리기 쉽고, 너무 바짝 묶으면 아버지의 팔이 불편하다는 것이었다. 적당한 길이를 두면서도 절대 아버지가 풀지 못하게 거듭해서 꽉 묶어야 했다. 그러면서도 내 손으로는 잘 풀 수 있어야 했다. 동생은 떠나기 전에 나에게 몇 번이고 장갑 끈 묶고 푸는 연습을 시켰다.


숙제도 있었다. 아버지가 검은 변을 보시길래 동생이 간호사에게 말씀드렸더니 혈변인 것 같다며 사진으로 찍어서 보여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마지막까지 여러 신신당부를 하며 동생은 딱 일주일 간의 간병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나의 간병 첫날이 시작되었다. 동생이 알려준 인수인계 내용들을 하나하나 챙기며, 변을 찍어서 간호사에게 보여주는 숙제도 했다. 그런데 간호사 선생님은 나에게 더 큰 숙제를 안겨주었다. 사진으로 봤을 때 정확하게 보이지가 않으니 다음에 대변을 볼 때는 변기 위에 이동식 변기를 얹고 그 위에 기저귀를 펼쳐서 변을 보게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저귀를 통째로 가져와서 간호사에게 보여달라고 했다. 아, 이게 그렇게 어려운 숙제가 될 줄은 그때는 미처 몰랐다. 어쨌든 간병 첫날은 정신없었지만 큰 탈 없이 지나갔다. 이날 아빠는 나를 알아볼 때도 있고 못 알아볼 때도 있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둘째 날 큰 사고가 터졌다. 식사 중에 아버지의 목에 음식이 걸리더니 순식간에 얼굴이 시뻘겋게 변하면서 숨을 못 쉬었다. 심장이 철렁하고 손이 떨렸다. 내가 놀라서 간호사 호출 벨을 눌렀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음성에 나는 "아버지가 목에 음식이 걸려서 지금 숨을 못 쉬어요! 얼굴이 빨개졌어요!!" 하고 다급하게 외쳤다. 스피커 너머로 간호사들이 서로 웅성거리면서 분주하게 뛰는 소리가 들렸다. 그 사이에 바로 앞 침대의 환자를 맡고 있던 전문 간병인분이 아버지에게 다가와 등을 세게 여러 번 쳤고, '켁' 하면서 목에 걸렸던 음식물이 조금 빠지는 듯했다. 그 간병인분이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고 나자 그제야 간호사 여럿이 뛰어와서 아버지의 등을 두드렸다. 다행히 아버지는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다. 새빨개졌던 얼굴도 다시 차츰 원래의 색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아버지에게 뇌출혈 후유증으로 음식물을 식도로 삼키기 어려운 연하곤란이 왔다는 걸 그제야 알게 되었다. 이미 응급실 오기 직전 저녁 식사 때부터 음식물이 기도로 넘어가서 폐렴이 왔기 때문에, 병원에서는 처음부터 콧줄로 식사하는 것을 권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간병인이던 내 동생이 봤을 때 아버지가 밥을 엄청 잘 드시는 것 같았기 때문에 병원 측에 아버지 식사 잘 하시니까 콧줄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래서 병원에서는 '식사 중에 사레가 한 번이라도 들리면 반드시 알려줘야 한다'라는 당부를 하고 아버지에게 일반식을 주었다. 그 뒤로 내 동생은 아버지가 식사 중에 자주 잔기침을 하는 게 바로 사레였다는 걸 모른 채 일주일을 보낸 것이었다. 이 사건 이후로 아버지의 식사는 연하곤란 환자를 위한 죽 형태의 식사로 바뀌었고, 물을 포함한 모든 액체류에는 연하제(점도 증진제)를 타야만 했다.


아찔했던 둘째 날이 지나고 셋째 날 나에게 감정적으로 가장 큰 고비가 찾아왔다. 대변을 받아 간호사에게 보여줘야 하는 그 숙제가 시작이었다. 아버지는 인지가 안 좋아서 '화장실에 가야겠다'라는 생각은 하지만, 소변을 보러 가는 건지 대변을 보러 가는 건지 전혀 구분을 못하는 상태였다. 숙제를 받고 나서 초반에는 아버지에게 "소변이야, 대변이야?" 이렇게 물어본 다음에 소변이라고 하면 준비물을 안 챙기고 빈손으로 따라갔다. 그런데 아버지가 대소변을 구분을 못하니까 "소변이야"라고 말하면서도 대변을 보았고, 그래서 그다음부터는 아버지가 화장실에 갈 때마다 매번 이동식 변기와 기저귀를 함께 가져갔다. 그러면 소변만 볼 때는 매번 소변에 잔뜩 적셔진 기저귀를 돌돌 말아서 버리고 뒤처리를 해야 해서 불편함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렇게 별 소득 없이 둘째 날이 지나고 셋째 날이 되었다. 이날은 아버지의 재활치료가 예약되어 있었다. 재활치료 시간 전에 미리 아버지를 데리고 화장실에 갔다. 변기 위에 이동식 변기를 놓고 그 위에 기저귀를 깔던 중에 아버지가 그새를 못 참고 그 위에 앉아버렸다. 자리를 잡지 못한 소변 줄기가 그대로 아버지의 바지 앞쪽 약간과 신발 앞코를 적셨다. 그리고 그대로 화장실 바닥으로 줄줄 흘렀다. 바로 재활치료에 가야 해서 샤워를 하거나 옷을 갈아입을 시간이 없었다. 무척 당황한 상태로 화장실 문을 열었을 때 마침 청소부 분이 계셔서 정말 죄송하다며 고개 숙여 사과를 하고 화장실 바닥 청소를 부탁드렸다. 그리고 휴지로 아버지의 바지와 신발의 젖은 부분을 대충 닦아내고 재활치료실로 내려갔다. 아버지를 재활치료실에 인계한 뒤 한숨 돌리고 병원 지하의 편의점에 가서 연하제를 사고 있을 때 갑자기 남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아버지가 재활치료 중 소변을 보셔서 재활치료를 못하니 병실로 데리고 올라가라고 연락이 왔다는 거였다. 아버지를 재활치료실에 인계하고 나온 지 10분이 채 안된 때였다. 나는 손에 든 물건을 빠르게 결제하고 재활치료실로 달려갔다.


아버지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얼굴로 휠체어에 앉아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기저귀를 착용하고 있었는데도 재활치료를 못 한다고 연락이 온 걸 보면, 누운 자세로 재활치료 동작을 하다가 그대로 인지를 못하고 소변을 보는 바람에 등허리 쪽으로 샜던 모양이었다. 휠체어를 밀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 눈물이 속절없이 흘러나왔다. 아버지에게 티를 내지 못하고 휠체어 뒤에서 숨죽여 울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 막막한 기분이었다. 병실이 있는 층에 도착하고 나서도 눈물이 멈추지 않아 병동 입구로 들어가지 못하고 구석에서 마저 소리 없이 울었다. 아버지의 휠체어는 내 앞에 세워둔 채였다.


아, 이날은 정말 감정을 주체하기가 힘들었다. 간병하던 기간 중에 가장 감정적으로 힘들었던 날을 꼽으라면 바로 이날이다. 아버지가 뇌출혈이어서 인지가 안 좋다는 건 동생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들어서 아는 것과 직접 마주 보는 건 확연히 달랐다. 뇌출혈 전 마지막으로 봤을 때가 가족들이 다 같이 공주로 집들이를 왔을 때였는데, 그때만 해도 정말 멀쩡하게 같이 공주 여행을 했던 아빠가 이제는 대소변도 못 가리고, 바닥에 줄줄 흘리고, 방금 소변을 봤는데도 치료 중에 인지도 못한 채 또 소변을 봤다는 게, 그 정도로 안 좋아졌다는 게 상당히 충격이었다. '앞으로 나아질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니 불안과 걱정에 눈앞이 캄캄해지고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렀다.


이날의 고비는 이게 끝이 아니었다. 겨우 눈물을 닦아내고 아버지를 데리고 병동 입구로 들어가면서 간호사실에 새 환자복을 요청했다. 그리고 샤워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이미 엉망인 상태였기 때문에 병실로 들어가기 전에 샤워를 시켜야 했다. 그런데 아빠가 그 인지가 없는 와중에도 딸 앞에서 샤워하기는 싫었는지 거부를 하기 시작했다. 이미 볼일 볼 때는 화장실 칸에 항상 동행하고 있는데, 샤워만큼은 혼자 하고 싶다는 게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혼자 있으면 낙상 위험이 있어서 반드시 간병인이 동행해야 하는 환자였다. 아빠는 나보고 샤워실 밖으로 나가라고, 본인이 혼자 샤워하겠다고 성질을 냈지만 그건 너무 위험했다. 큰 소리가 오가고 아빠가 힘으로 나를 밀어내려고 해서 호출 벨을 눌러 환자가 너무 말을 안 들으니 제발 한마디만 해달라고 도움을 요청했다.


간호사 선생님이 말을 보태도 절대 나를 샤워실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으려는 아빠를 말릴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아버지의 샤워를 포기하고 그대로 휠체어에 다시 태워서 병실로 들어왔다. 그리고 침대에 수건을 깔고 그 위에 아버지를 앉혔다. 아버지는 그대로 눕더니 고단했는지 금세 잠들었다. 나는 아버지의 바지를 벗기고 나서 낑낑대며 무거운 아버지의 몸을 들어 올려 겨우 기저귀를 갈아입혔다. 그리고 다리 등을 물티슈로라도 닦아낸 뒤 새 환자복을 입혔다. 아버지는 내가 바지를 새로 입히던 도중에 눈을 떴는데, 바지를 입으라고 하니 직전의 기억은 잊은 것처럼 말을 잘 들으며 바지를 입었다.


감정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진이 다 빠졌다.

그 대학병원에서는 하루에 두 번 정도 기도문과 성가가 방송으로 흘러나왔다. 그날 저녁 기도문과 성가가 흘러나오는데 나도 모르게 또 눈물이 흘렀다. 이번에는 슬픔이라기보다는 위안 받는 느낌에서 흐른 눈물이었다. 차분한 목소리와 선율이 나를 위로해 주는 듯했다. 나는 종교가 없지만 왜 사람들이 힘들 때 종교를 찾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조용한 병실에 가만히 앉아 성가를 들으며 조금 마음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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