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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프그래퍼 Jan 30. 2024

"아버님은 지금 두 다리로 서 있는 게 기적이에요"

쌓여 있던 감정을 소화하기 위해 쓰는 글 (4)

외상성 뇌출혈로 대학병원에 입원했던 아버지는 2주 만에 퇴원했다.

완전히 다 나아서는 아니고, 위급한 시기는 넘겼다는 이유에서였다. 퇴원하는 날에도 아버지는 나를 본인의 조카라고 착각해서 "이따가 삼촌 집으로 올 거야?"라고 말하기도 했다. 인지가 다 돌아오지 않아서 친가, 외가 식구들의 이름을 적어보라고 하면 제대로 적지 못했다. "아빠, 내 이름이 뭐야?"라고 물으면 "김천민"이라고 할 때도 있고, "은비가... 이름이 뭐지?"라고 하기도 했다. 그리고 대학병원에서 지냈던 2주간의 일들은 통째로 기억하지 못했다.


대학병원에서 퇴원하게 된 아버지를 처음엔 집으로 모시는 쪽으로 고민했지만 퇴원 직전까지 고열로 수액을 맞고, 혈액 수치가 낮아서 수혈을 하는 모습을 보고 아무래도 의료 전문 인력이 상주하는 병원행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알아보니 보건복지부에서 지정하는 '회복기 재활병원'이라는 게 있었다. 뇌질환 환자의 경우 발병 후 3개월 이내에 입원해서 6개월까지 입원할 수 있고, 하루에 4시간씩 1:1 재활치료를 받을 수 있다. 나의 친정이 있는 지역에는 마침 회복기 재활병원이 단 하나 있었다. 그곳에 전화 문의를 하니 자리가 없어서 바로 입원하지는 못하고 약 5일가량 대기해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며칠간 집에서 지내게 되어 온 가족이 허둥지둥 아버지를 살폈다. 부랴부랴 화장실 바닥에 미끄럼 방지 매트를 깔았고, 엄마는 연하곤란인 아빠의 모든 끼니를 다 갈아서 준비했다. 잘 때는 부모님의 손을 한쪽씩 모아 보호 장갑으로 묶었다. 낙상 위험 때문에 새벽에 화장실 갈 때 혼자 일어나면 안 됐기 때문에 아빠가 일어나면 엄마가 같이 잠에서 깰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그리고 5일 뒤 아버지는 회복기 재활병원에 입원했다. 원래는 최대한 재활치료를 많이 받기 위해 6개월 기간을 꽉 채우는 쪽으로 생각했었지만, 두 달 만에 퇴원하게 되었다. 완치하여 퇴원한 것이라면 좋았겠지만 그건 아니었다. 여러 사람이 함께 쓰는 병실에서 지내는 환경에 아버지가 적응을 못하고 극도로 스트레스를 받아서 이상 증세를 보였기 때문이었다. 대학병원 신경외과 외래진료 때 아버지의 상태를 말씀드렸더니, 그 경우에는 퇴원하고 집으로 오는 게 낫겠다고 권유받았다. 아버지는 인지 문제로 에스컬레이터를 거꾸로 역행하여 뛰어올라가거나, 주차장에서 느리게 움직이고 있는 차의 조수석 문을 벌컥 여는 등 위험한 상황이 잦았다. 당시 1:1 간병을 하고 있던 나는 2023년까지만 간병을 하고, 그 후에는 남편이 있는 공주의 집으로 돌아가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재활병원에 계속 입원한다면 2024년에는 간호간병통합병동으로 옮기는 쪽으로 재활병원 의사 선생님과 이야기를 해둔 상태였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퇴원해서 집으로 오게 되면, 엄마와 동생이 출근하는 낮 시간에는 종일 아버지 혼자 집에 계셔야 해서 걱정이 많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재활병원에서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고 있고, 병원의 모든 걸 다 불신하고 의심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가족들이 보기에도 아버지가 재활병원 생활을 더 이어가기는 어려워 보였다.


재활병원에서 퇴원하고 며칠 뒤 대학병원 재활의학과 외래진료 일정이 있었다. 재활의학과 교수님은 "아버님은 지금 두 다리로 서 있는 게 기적이에요"라고 했다. 아버지가 많이 다쳤었기 때문에 자칫하면 식물인간 상태로 산소마스크 쓰고 누워있어야 했을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처음에 비하면 많이 회복된 상태였기 때문에 꺼낼 수 있는 얘기인 것 같았다. 재활병원에서 보낸 두 달 동안 매일 4시간씩 재활치료를 받으며 아버지의 상태는 눈에 띄게 좋아져 있었다. 그래서 더 재활치료를 받지 못하고 집으로 온 것에 아쉬움이 느껴지긴 했지만, 그래도 '기적'이라는 교수님의 말씀에 위안을 받으며 우리 가족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방심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그로부터 이틀 뒤 아버지는 내 눈앞에서 뒤로 넘어지면서 머리를 부딪히고 응급실에 갔다. 집에 홈캠을 설치해두었기 때문에 아버지가 쓰러지는 모습과 나의 비명 소리, 119에 신고하는 전화 내용, 울음소리가 그대로 영상으로 남았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순간이었다. 구조 대원들이 와서 아버지를 데리고 내려갈 때까지 통곡 같은 울음이 멈추지 않았다. 나는 짐승처럼 울었다. 겨우 진정해서 가족들에게 소식을 알리고, 아버지와 함께 구급차에 탑승하여 응급실로 갔다. 정말 다행히 뇌에 추가 출혈은 없었다. 대신 머리에 골절이 있고 공기가 들어갔다고 했다. 재활병원에서 퇴원할 때, 집에 가서도 매일 운동을 꼬박꼬박 해야 한다는 권고를 들었지만 이제는 운동보다 안정이 더 중요한 상황이 되었다.


시간이 흘러서 나는 아버지의 간병에서 손을 떼고 공주의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낮에 집에 혼자 있고, 동생이 틈틈이 홈캠을 통해 아버지의 상황을 체크한다. 아버지가 최근에 한 인지검사의 결과는 좋게 나온 편이었으나 여전히 판단력이 떨어진다. 내가 공주에서 지내다가 몇주 만에 잠깐 친정에 방문했을 때, 건강과 위생 관리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아서 폐인 같아진 아버지의 몰골을 보고 충격을 받았었다. 그때는 재활병원 입원 당시보다 확연히 안 좋아진 아버지의 상태를 보고, 지난 고된 간병 생활이 의미 없었던 것처럼 느껴져서 감정적으로 크게 동요했었다. 인지는 많이 좋아졌다는데 스스로 본인의 건강과 위생을 챙기지 않는 아버지에게 화가 났다. 하지만 곧 그게 뇌출혈로 인한 판단력 저하 때문이라는 것을, 그리고 알코올로 인한 말초신경손상과 자율신경계 문제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아버지를 향한 화는 조금 누그러들었다.


기적처럼 두 다리로 걸을 수 있게 되었지만 아버지는 아직 환자다.

아버지의 치료는 현재 진행형이다. 전에는 '언젠가 나도 부모님의 보호자가 되겠지'하고 막연히 생각했었는데, 나와 동생은 예상치 못하게 조금 일찍 아버지의 보호자가 되었다. 그리고 보호자로서의 역할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앞으로 아버지가 살아갈 많은 날들이 남았다.


나는 아버지에게 살가운 딸이 아니었다. 아버지를 향한 나의 감정은 그저 연민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버지를 간병하면서 내가 아버지를 살리길 간절히 바란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게 사랑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문득 아버지가 술에 취할 때마다 나와 가족들에게 숱하게 사랑한다고 말했던 것에 반해, 나는 머리가 큰 이후로 한 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되돌려준 적이 없다는 게 떠올라 후회스러웠다. 그래서 재활병원에 있는 동안에는 매일 매 재활치료 시간마다 휠체어 탄 아버지를 배웅하며 귀에 "아빠 잘 다녀와, 사랑해"라고 의무처럼 말했다. 솔직히 나를 위해서였다. 내가 나중에 더 후회하지 않도록. 또 하나 후회하는 일이 있다. 내 요리 실력이 워낙 형편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직접 만든 음식을 대접하는 게 민망하지만, 그래도 시댁 식구들에게는 생신 때 미역국을 한 번쯤은 끓여드렸었다. 그런데 정작 나의 부모님에게는 한 번도 내가 만든 요리를 맛 보여드린 적이 없다는 게 후회스러웠다. 그래서 앞으로 내게 아버지의 생신을 챙길 기회가 온다면 한 번쯤은 기쁘게 미역국을 끓여드리고, 그리고 또 다른 기회에 다른 음식들도 종종 해드리고 싶은 마음이다.


아버지가 꾸준히 치료를 잘 받고 개인 건강과 위생도 잘 챙겨서 더 나아지시길, 올해 엄마의 환갑 때 가기로 약속했던 가족여행을 다 함께 갈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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