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환 패션과 데이터 주권을 위한 한국 패션·섬유 산업 DPP 인프라 구축
나는 스무 살이 되기 전, 서른 살까지의 10년 계획을 세웠다. 그 계획 중 하나는 서른 살이 되면 에세이 책을 출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서른 살이 된 지금, CARE ID의 첫 번째 백서(white paper) 집필에 참여하게 되었다.
예상했던 형태의 글은 아니었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나의 개인적인 여정이 담겨 있다. 순환 패션과 디지털 제품 여권(DPP)을 통해 한국의 패션 시스템이 어떻게 지속가능한 구조로 변화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담아, 그 방향을 함께 모색해보고자 했다.
나는 산업에서 풀지 못한 패션 산업의 문제에 대한 해결을 찾기 위해 학계로 돌아갔었다. 석사 연구를 이어 영국에서 박사 과정을 진행할 기회를 얻었지만, 박사 논문 준비 과정에서 한국의 디지털 제품 여권(Digital Product Passport, DPP)을 제공하는 기업 윤회(주)의 CARE ID를 만났다.
DPP는 EU의 에코디자인 규정(ESPR)에서 출발해 현재 전 세계적으로 형성되어 가는 개념이다. 유럽과 달리 내수 중심이거나 중국, 미국 수출 비중이 높은 한국에서는 이 새로운 흐름을 실제 산업에 적용하려는 시도가 많지 않고, 참고할 만한 사례도 거의 없는 상황이다.
DPP는 유럽에서 시작된 개념이지만, 그 영향은 유럽에만 머물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흔히 이야기되는 ‘브뤼셀 효과(Brussels Effect)’처럼, EU에서 만들어진 규제는 글로벌 기준으로 확장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단순히 대응하는 것을 넘어, 각자의 산업 환경에 맞는 방식으로 해석하고 준비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빠르게 완성될 수도 없고, 완벽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알기에, 지금 시점에서 내가 더 필요해 보이는 곳은 한국 산업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작년 여름, 영국 생활을 마치고 한국의 패션 브랜드, 제조사, 정책 관계자들과 함께 이 변화를 고민하는 일을 시작했다.
디지털 제품 여권을 목표로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의 출발점은 어떻게 하면 옷에 새로운 생명을 줄 수 있을까? 였다.
나는 패션 산업에서 약 10년 동안 일하면서 선형적(Linear)인 생산 구조가 만들어내는 많은 비효율과 환경적 문제를 가까이에서 보았다. 패스트패션이 성행하면서 너무 많은 옷들이 만들어지고, 또 너무 쉽게 버려지는 모습을 보며 이 시스템 자체가 정말 지속가능한 것인지 고민했다. 자연스럽게 관심은 폐기물을 줄이는 것에서 나아가, 버려지는 것들을 어떻게 다시 자원으로 바라볼 수 있을지로 이어졌다. 이러한 고민은 중고 의류를 업사이클링하여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보는 예비 창업과 소비 전(pre-consumer) 섬유 폐기물을 활용한 온디맨드 패션 시스템을 연구한 석사 논문으로 이어졌다.
CARE ID 역시 비슷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중고 의류와 빈티지 큐레이션, 기존 의류의 가치를 다시 바라보는 작업에서 시작하여 처음에는 이미 만들어진 제품의 수명을 조금 더 연장하는 방식에 집중해 왔다.
하지만 패션 산업의 구조적인 문제는 제품의 마지막 단계만 다루는 것으로는 해결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제품의 시작 단계인 디자인과 생산, 그리고 데이터를 포함한 구조 자체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리고 나는 바로 그 시점에 CARE ID에 합류했다.
CARE ID는 단순히 하나의 기술 솔루션을 만드는 회사를 넘어, 한국 패션 산업 구조의 변화와 지속가능성을 함께 고민한다.
우리의 문제의식은 규제가 등장하기 이전부터 존재했고 단순히 규정을 충족하기 위한 접근과는 조금 다른 방향에 놓여 있다. 우리는 DPP를 기술적 요구사항이 아니라 시스템을 다시 설계해 볼 수 있는 하나의 계기로 바라본다. 데이터가 어떻게 생성되고, 공유되며, 신뢰될 수 있는지를 함께 고민하고 있다.
화려한 이미지와 달리 패션 산업의 많은 이해관계자들, 특히 독립 브랜드와 제조사는 대부분 작은 규모의 기업이다. 이미 제한된 자원과 복잡한 공급망 속에서 운영되고 있는 이들에게 DPP는 또 하나의 규제 요건이나 추가적인 업무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부담을 충분히 이해하기에, 이번 백서는 하나의 이상적인 해답을 제시하기보다 현실적인 질문을 던지고자 했다.
어떻게 하면 DPP를 또 하나의 부담이 아니라,
실제로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도입할 수 있을까?
우리는 신뢰할 수 있는 구조로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함께 사용할 수 있고, 국제 기준과 연결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고 있다.
물론 이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스타트업에서 일한다는 것은 여러 프로젝트를 동시에 수행하며 끊임없이 방향을 점검하고 수정해 나가는 반복의 과정이다. 특히 EU ESPR 규정 하에서도 아직 텍스타일 산업에 대한 위임법(delegated act)이 구체적으로 제정되지 않은 상황으로 기준이 명확히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준비를 하기에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다. 시간이 날 때마다 JRC의 사전 준비 연구(preparatory study)와 CIRPASS-2 프로젝트 자료를 참고하며 방법론과 커뮤니케이션 방식, 기술적 구조를 계속해서 검토하고 다듬어 나갔다. 때로는 잠시 멈춰 생각할 여유조차 부족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우리가 만들고 있는 일이 단기적인 결과를 위한 것이 아니라 보다 장기적인 변화를 준비하기 위한 기반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었고, 그 생각이 계속 나아갈 수 있었다.
지금까지 축적해 온 실무적 경험과 인사이트를 하나의 글로 정리해야겠다고 느낀 것도 바로 이 시점이었다.
여러 프로젝트와 회의 속에서 흩어질 수 있는 생각들을 정리해 두는 일이 앞으로 이 변화를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작은 참고점이 될 수 있기를 바랐다. 특히 실제 산업 현장에서 얻은 경험과 검증된 관점을 함께 담아두는 것이 의미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백서를 실제로 만들어가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회사 차원에서 백서를 작성하겠다고 했을 때, 처음부터 모두가 그 필요성에 공감했던 것은 아니었다. 빠르게 실행하고 결과를 만들어야 하는 스타트업 환경에서 연구 기반 문서를 준비하는 일은 당장 우선순위가 높은 업무로 보이지 않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작업이 왜 필요한지 차근차근 설명했고, 그 과정을 거쳐 감사하게도 노힘찬 대표님은 그 의미를 이해하고 믿어주었다.
그 믿음에 보답하고자 여러 프로젝트를 병행하는 상황 속에서도 몇 달에 걸쳐 연구와 집필을 이어갔다. 다만 이번 작업은 개인 연구가 아니라 회사의 이름으로 발간되는 문서였기 때문에 공개 가능한 정보의 범위를 어디까지 설정해야 할지 신중하게 판단해야 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지식과 경험이 공유될 때 더 좋은 결과가 만들어진다고 믿는다. 다양한 관점이 모일수록 더 나은 방향을 찾을 수 있고, 산업 전체의 발전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기업의 입장에서는 준비 중인 아이디어나 내부 전략이 충분히 보호되지 않은 상태에서 외부에 공개되는 것에 대한 우려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특히 CARE ID 역시 DPP 서비스를 초기 단계에서 준비하던 시기에 협업을 제안받았던 과정에서 아이디어가 충분히 보호되지 못한 채 유사한 방식으로 활용되는 경험을 겪은 적이 있었기에, 이 부분에 더욱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이해했다. 최근에는 AI 기술의 발전으로 공개된 정보가 예상보다 빠르게 재가공되고 확산될 수 있다는 점 역시 함께 고려해야 했다.
그래서 처음 작성했던 원문의 구조를 유지하면서도 회사의 기밀을 보호할 수 있는 방향으로 표현을 조정하고 내용을 정제하는 과정을 거쳤다. 그 과정에서 아쉬움이 남는 부분도 있었지만, 동시에 개인의 연구와 산업 안에서의 실천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시간이기도 했다. 지식을 공유하는 것과 보호하는 것 사이에서 어디까지 공개할 것인지 고민하는 과정 역시 현실 속에서 변화를 만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단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평소 연구를 영어로 진행해 온 데다 대부분의 참고 자료 역시 영어로 작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원고를 먼저 영어로 작성한 뒤 다시 한국어로 옮겨 이중언어 형태로 구성했다. 여기에 출판을 위한 인쇄 디자인 과정에서도 여러 차례의 검토와 수정이 이어지면서 예상보다 더 많은 시간과 집중이 필요했다. 돌이켜보면 결코 간단한 작업은 아니었지만 그만큼 의미 있는 과정이었다.
지난 4개월 동안 학술 연구와 현장의 경험, 그리고 산업과 정책 영역에서의 논의를 함께 정리하여 하나의 백서로 완성할 수 있었다. 한국의 환경부, 한국패션협회, 시험기관 연구자, 제조사, 브랜드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들과의 대화를 통해 CARE ID의 방향성을 담는 동시에 순환 패션 시스템으로의 전환을 위한 고민과 제안을 함께 담고자 했다.
이 글을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순환 경제의 전환은
어느 한 주체만으로 만들어질 수 없다는 점이다.
진정한 순환 시스템은 정부, 브랜드, 제조사, 기술 기업, 그리고 소비자가 함께 움직일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DPP 역시 단순히 규정을 충족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우리가 제품을 만들고 사용하는 방식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여전히 배우고 있고, 여전히 만들어가는 과정에 있다. 충분한 협력과 준비가 함께한다면 DPP와 이러한 변화는 부담이 아니라 장기적인 경쟁력과 의미 있는 전환의 기회가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작업에 함께해 준 모든 분들께 다시 한번 깊이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언어의 결을 함께 다듬어 준 동료 수민, 복잡한 내용을 보다 이해하기 쉬운 형태로 시각화해 준 CARE ID 디자인 팀에도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무엇보다 이 백서가 세상에 나올 수 있도록 믿고 지지해 준 노힘찬 대표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더불어 피어 리뷰를 통해 귀중한 의견을 나누어 준 CIRPASS-2 커뮤니티와 Carolynn에게도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CARE ID 백서 다운로드 링크: https://careid.center/publication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