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섬세한 알아차림'은 어떻게 기사가 되나
쓸 게 없네. 한 이틀 그랬다. 매주 금요일이면 돌아오는 기사 마감. 이번주에는 뭘 쓰나... 금요일까지 아무것도 쓸 게 없으면 어쩌나... 슬슬 불안한 마음도 든다. 이 글을 쓰기 바로 직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역시... 아이템은 일하면서 나오는 건가!
임현철 시민기자가 쓴 기사를 보면서 이번주에 할 이야기가 '팔딱' 하고 떠올랐다. 임현철 시민기자는 경비 일을 하며 보고 느낀 바를 '경비일기'라는 타이틀로 쓴다. 그런데 주변에 그가 경비 노동자임을 당당히 밝히면서 글 쓰는 걸 신기하게 여긴 사람이 있었나보다. 그에게 묻더란다. 경비 일 하는 게 자랑도 아닌데, 뭔 글까지 쓰냐고. 경비 일 하는 걸, 아내나 아이들이 창피해 하지 않냐고. '정말 그런가?' 싶어 임현철 시민기자는 아내의 말도 들어본다.
- 내가 경비라는 거 부끄러워?
"내가 부끄러울 건 없지. 그건 당신 몫이잖아."
- 내가 앞으로도 경비일 계속 할 것 같아?
"아니. 당신이 평생 해야 할 일들 중 하나겠지."
임현철 시민기자는 '인간은 누구나 정당한 방법으로 일해, 올바른 대가를 받으면서, 떳떳하게 살아가야 한다'라고 썼다. 그러면서 그가 쓰는 '경비일지'는 가장 낮은 자리에서 본 세상을 솔직하게 전달하려는 방편이라고 밝힌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지인의 말(넓게는 편견에 찬 세상을 향해)에 반론을 제기한다. '낮은 자리가 특권이요, 행복인 이유 세 가지'를 언급하면서. 그가 낮은 자리에서 묵묵히 일하면서 '세상 편견과 굴레로부터 벗어난 자유'를 느끼지 않았다면 쓰지 못했을 문장들이다.
[관련기사]"글까지 쓰고... 경비 일하는 게 무슨 자랑인가?"
이 글을 보면서 생각했다. 임현철 시민기자가 지인의 말을 그저 불쾌하게만 받아들이고 말았다면 어땠을까. 그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편견어린 시선을 수용하지 않고 세상을 향해 반론을 제기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것이 '섬세한 알아차림'이라고 생각한다. 글쓰는 데 꼭 필요한 한 가지, 특히 시민기자들에게 자주 발견되는 특질 가운데 하나.
작가(라고 쓰지만 나는 시민기자라고 말한다)는 '머리 한쪽에 센서가 있는 사람'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센서에 불빛이 '반짝' 하고 들어올 때는 '아, 이건 써야 해' 하고 글감이 수신되는 순간이다. 그래서 작가는 고단한 직업이라는 말이었다. 늘 센서를 켜둬야 하니까. 글감이 찾아오는 순간은 예고가 없으니까.
'글로 써야 하는 이야기'라는 센서등이 켜질 때, 그 알아차림은 결국 '섬세함'에서 오는 게 아닐까. 똑같이 경험하지만, 다른 사람은 느끼지 못하는 나만의 '섬세한 알아차림'. 이렇게 잡아낸 글감으로 쓴 글이야말로 고유한 내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임현철 시민기자나 '사람들과 하룻밤, 나를 괴롭힌 건 코골이가 아니었다'를 쓴 전희식 시민기자처럼.
그는 역사 유적지를 답사하러 간 날 밤의 상황을 눈에 보이는 듯 썼다. 그리고 그 어두운 공간에서 '네모난 액정에서 나오는 불빛'을 섬세하게 글감으로 잡아냈다. 작은 방 안에서 느낀 불빛 하나로 세계의 빛공해를 이야기하는가 싶더니 지금의 세상을 '과핍시대'라 말한다. 넘쳐서 결국 모자라는 시대.
'소비와 물질적 풍요와 생산이 넘쳐서 쓰레기가 넘치고 그래서 지구의 안위가 위험한 시대. 먹는 음식이 넘치다보니 비만과 성인병과 병원비가 과도해지고 그래서 건강이 위태로운 시대. 택배시스템이 과도하게 발달되고 너무 신속하게 배달되고 개인주의가 넘치다보니 개별포장도 넘치고 쓰레기도 넘치고 환경은 파괴되는 시대'라고.
나는 '과핍시대'라는 말을 이 글에서 처음 알았다. 그렇지만 그의 글을 읽으면서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나는 이럴 때 발견의 기쁨, 일의 기쁨을 느낀다. 시민기자들이 '섬세한 알아차림'으로 쓰는 기사들은 기성 기사와 확실히 차별된다.
이것이 많은 독자들이 사는이야기를 쓰기 위해, 읽기 위해 포털 대신 굳이 <오마이뉴스>를 찾아오는 이유겠지. 나 역시 많은 시민기자의 글에서 감동과 재미와 뉴스, 효능감과 정보를 찾아내는 '섬세한' 편집기자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