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발견한 클래식] 박소현씨가 낸 앨범 <올 어바웃 로망스>
퇴근 후 저녁을 먹으며 비올리스트이며 바이올리니스트 박소현씨가 연주한 세상의 모든 로망스 모음 시디 <올 어바웃 로망스(All about romance)>를 들었다. '분명히 로망스 곡이라고 했는데(그래서 나는 그저 맑고 투명한 OO피아노 광고에 나오는 그런 곡이겠거니 생각했는데), 이건 왜 이렇게 슬프지?' 시디는 어느새 9번 트랙을 연주하고 있었다. 혼자 밥을 먹다 말고 왈칵 눈물을 쏟을 뻔했다.
앨범 재킷을 보며 곡 정보를 확인했다. '아, 이 곡 타이틀이 '잊혀진 로망스'구나. 그래서 슬펐나. 누구 곡이지, 리스트? 이 분이 작곡가였군!' 내가 아는 리스트라곤 백화점 의류 코너에서 본 매장 이름이 전부인데... 새삼 나의 클래식 무지에 놀라면서 나오려던 눈물이 쏙 들어갔다. 그래도 굳이 위안을 삼는다면 리스트라는 작곡가의 이름 석 자는 마음 깊이 새기게 되었다는 거. 밥 먹는 사람 울리기, 이게 어디 쉬운 일인가.
그런데 나는 작곡가 리스트만 몰랐던 게 아니고 이 곡을 연주한 연주가 박소현씨도 잘 몰랐다. 메일함에 있던 보도자료를 보다가 박소현이라는 이름에 눈길이 갔던 건, 솔직히 이 앨범 때문만은 아니었다. 보도자료 말미에 써 있던, 그가 음악에 관한 글쓰기도 열심히 하고 있다는 문장 때문이었다. 글쓰는 음악가라... 호기심이 동했다. 이 앨범을 듣게 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더 잘 알고 싶은 마음에서였달까.
나를 울릴 뻔한 곡은, '매우 격정적'이라는 표현이 전혀 무색하지 않았던 리스트의 '잊혀진 로망스'(Romance Oubliée for Violin & Piano in e minor, S. 527). 이 곡을 포함해 총 10곡이 수록된 연주 앨범 <올 어바웃 로망스>는 박씨가 5년 전부터 벼른 첫 앨범 작업이었다고.
시대를 대표하는 로망스 작곡가 캄파뇰리, 베토벤, 리스트, 요아힘, 비에냐프스키, 부루흐, 스벤슨, 시벨리우스, 쇼스타코비치 등등 가운데 박씨가 찾아낸 로망스만 50여 곡, 그 중에 고르고 골라 딱 9개만 녹음했다(보너스 트랙이 1곡 포함되어 총 10트랙이다).
특이하게도 박씨는 비올라와 바이올린 두 개를 다 연주할 줄 아는 연주자. 이번 앨범도 곡에 어울리는 악기를 선택해서 다채로움을 주고 있었다. 물론 나는 '막귀'라 그 두 악기의 차이를 정확히 구별하기는 힘들었지만. 그런데 그런 '막귀'인 나도 베토벤이나 쇼스타코비치 등은 알겠는데, 비올라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로망스를 작곡한 막스 브루흐, 노르웨이 바이올리니스트이며 작곡가인 스벤슨은 이름조차 낯설었다.
자고로 궁금한 건 물어봐야지. 지난해 연말 박씨를 만나 앨범에 관한 몇 가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우선 어떤 기준으로 많은 로망스 곡 중에 딱 9곡만 추렸는지부터 물었다.
"이 앨범에 수록한 9곡은 제가 좋아하는 취향의 작곡가 위주로 골랐어요. 사실 클라라 슈만, 로베르트 슈만, 브람스 이렇게 세 작곡가의 곡으로만 할까도 생각했지만, 그러기에는 다른 작곡가들이 눈에 밟혀서요. 스벤슨은 제가 굉장히 좋아하지만 거의 연주되지 않고 국내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북유럽 작곡가예요. 이렇게 좋은 작곡가의 좋은 음악도 있다고 소개하고 싶어서 앨범에 넣었어요. 또 막스 브루흐는 그가 유일하게 남긴 비올라 곡이 로망스라 넣었어요. 제가 느낀 두 악기(바이올린과 비올라)의 매력을 다 알려주고 싶은 곡들로 이번 앨범을 구성했어요."
이 가운데 제일 좋아하는 곡을 하나 추천해 달라니 의외의 대답이다. 보너스 트랙으로 넣은, 모차르트(W. A. Mozart, 1756-1791)가 1787년 작곡한 밤의 세레나데 4악장 중 2악장(Romance from Eine kleine Nachtmusik) 로망스라고. 원래 편곡된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악보가 있는데, 그걸 박씨가 거의 재창조한 거라 애착이 간다는 설명이다.
고백하자면, 클래식에 대해 잘 모르면서 클래식 앨범 리뷰를 쓰고 있는 나 자신이 지금 상당히 어색하다. 그렇지만 클래식에 대해 모르는 걸 전혀 부끄러워 하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모른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글까지 쓰는 건 믿는 구석이 있어서다. 나같은 '클알못(클래식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도 박씨라면 두 손 들고 환대해 줄 것 같아서다. 그가 관심을 두는 청중이 바로 나같은 사람들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지난해 서울 세종문회회관 체임버홀에서 '해설이 있는 연주회-알고나면 쓸데많은 신나는 클래식'을 선보일 만큼 '클래식이 지겹고 재미없다는 편견을 깨기 위해' 많은 노력 중이다. 월간리뷰, 롯데콘서트홀 공식블로그에서 클래식 전문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거나, 각종 기업이나 도서관, 학교 등에서 클래식 특강 강사로 활동하는 것도 그때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클래식을 편하게 생각할 수 있는 실질적인 방법을 좀 찾고 싶어요. 그게 제가 음악하는 사람으로서 갖는 사명이라고 생각해요. 많은 사람들이 쉬운 음악, 듣기 편한 게 좋다고 하는데, 저는 어느 누군가에게는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도 어려웠을 거라고 생각해요. 다만 수없이 많이 듣고, 보여져서 이제는 쉽게 여겨진 게 아닐까 싶어요.
저는 아카데믹한 곡들도 편히 다가가갈 수 있게 하는 것이 클래식을 대중화 하는 데 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공연을 할 때 잘 알려진 곡과 덜 알려진 곡(남들이 안 하는 곡)을 섞어서 하는 것도 그런 이유예요. 독주에서도 굳이 해설이 있는 음악회를 하는 것도 프로그램 노트를 보고도 잘 이해하기 어려운 곡을 연주 전에 설명을 좀 해주면 훨씬 더 이해가 쉽다고 하시거든요."
이날 박씨의 앨범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들었다. 그도 모자라 다음날 출근길 잠을 포기하고 또 들었다. 전부 박씨가 연주한 곡은 아니었다. 유튜브에서 클래식콘서트 영상을 찾아 내내 보게 된 것. 조성진의 드뷔시 달빛, 피아졸라의 '망각(Oblivion)' 바이올린 연주(이거 듣다가도 울 뻔) 등등. 음악 하나로 출근길이 그렇게 황홀해질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어느 네티즌 말마따나 손가락 하나 눌러서 이런 연주를 공짜로 들을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음에 감사했다. 작곡가 리스트에 이어 연주자 박소현 그리고 피아니스트 조성진, 이름 모를 외국의 클래식 연주자들까지. 꼬리에 꼬리는 무는 클래식 덕질의 시작이었다.
아, 그런데 걱정은 이제부터다. 핸드폰을 교체하면서 의무적으로 써야했던 요금제도 끝나가는데, 이말인즉슨 데이터무제한이 끝난다는 말, 클래식 덕질을 계속 하려면 올해 데이터 호구로 살아야 하는 건가. 심각하게 고민되는 밤이다.
한편 박소현은 오는 2월 25일 예술의 전당에서 앨범 발매 기념 독주회를 연다. 이번 연주회에서는 베버, 로베르트 슈만, 클라라 슈만, 라흐마니노프 로망스가 더해져 연주될 예정이다. 특히 이 곡들은 두 번째 로망스 음반에 실릴 예정이라니 더욱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