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어떤 모임에서, 한 어르신이 했던 말이 정말 인상 깊었어요. 아가씨는 나이 든 여자가 혼자 살려면 꼭 필요한 것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글쎄요… 돈?”
“돈도 중요한데…(웃음) 차래요. 운전만큼 절실한 게 없다고. 저는 어머님이 꼭 운전을 하시면 좋겠어요.”
몇 년 전 올케와 나눈 대화다. 그맘때 초보운전자였던 엄마는 둘째를 어린이집에서 데리고 오다 접촉사고가 났다. 아이를 태우고 사고를 냈다는 데 엄마는 더 놀란 듯했다. 또 이런 일이 생기면 어쩌나, 싶은 마음에 당연한 수순으로 엄마는 운전을 못하겠다고 했다. 그런 엄마에게 운전하다 사고는 있을 수 있는 일이라며 계속 운전을 하도록 설득한 게 바로 올케였다.
그 후 6년이 지났다. 엄마는 올케 말대로 계속 운전을 했다. 차를 끌고 나가 농장에 가서 농사를 지었다. 엄마의 기쁨이었다. 가끔씩 주말 아침이면 엄마는 오이와 상추, 대파, 쪽파, 부추, 방울토마토, 호박, 고구마를 잔뜩 싣고 와 우리 집에 던지듯 두고 사라졌다. 엄마의 보람이었다.
엄마는 일터에도 매일 차를 끌고 다녔다. 엄마의 밥벌이였다. 아파서 병원에 가는 일도 걱정 없었다. 운전을 할 수 있으니 떨어져 사는 자식들에게 기대지 않을 수 있었다.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가고 싶은 데를 엄마 의지 대로 갈 수 있었다. 그렇게 차는 엄마의 일상에서 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나는 그때 엄마가 운전을 계속 할 수 있도록 한 올케가 백 번 천 번 잘했다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운전을 하는 엄마가 신경이 쓰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직접 키운 농작물을 가져다준다고 할 때마다 괜찮다고 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엄마가 30~40분을 운전해서 왔다가 풀떼기들만 놓고 가버리는 일이 하나도 반갑지 않았다.
엄마가 키우는 텃밭 작물둘. 사먹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맛이다.
그런데 얼마 전 사고가 났다. 엄마는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앞 범퍼가 많이 상했고 에어백도 터졌다. 엄마는 입원했고 차는 폐차를 결정했다. 하지만 퇴원 후 엄마가 일상을 계속 유지하려면 차가 필요했다. 차를 사야 했다. 문제는 엄마가 가진 돈이 많지 않다는 거다.
엄마는 병원에 누워 이리저리 궁리를 해본 것 같았다. 운전하면서 눈여겨봐 둔 차는 예산을 크게 웃돌았다. 엄마는 어찌어찌 돈을 끌어모아 일단 차를 차고, 나머지는 천천히 할부로 갚으면 되겠다고 생각한 듯했다. “올해까지만 일하려고 했는데, 1년 더 일해야겠다”라고 농담을 했다던가.
원래의 나라면 안 그랬을 텐데 이번에는 엄마에게 차값을 조금 보태드리고 싶었다. “이번에 사는 차가 내 인생의 마지막 차”라는 엄마 말이 그날따라 크게 들려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내 통장에 돈이 있으니까, 빚을 내야 하는 게 아니니까 어느 정도는 해드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 돈은 내 작가통장에 있는 돈이다. 지난 2017년 첫 책을 낸 후로 작가통장을 만들었다. 계약금을 받거나, 추가로 받은 인세, 강의나 원고를 써서 발생한 수익은 다 이곳에 모아뒀다. 남편도 아는 공식적인 작가통장. 4년 동안 계획했던 일(인세의 몇 % 기부 같은)을 제외하고 사용한 적이 없다. 아니다, 엄마 임플란트 했을 때도 백만원 드렸구나. 여튼, 오랜만에 부어놓은 적금을 깨는 기분으로 기쁘게 엄마에게 송금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
“엄마가 놀라서 전화했다. 이 돈이 다 뭐니?”
“아, 그거 엄마 빠방이 값이지.”
“아니 이거 너… 이거 남편도 아니?”
“알지, 그럼. 근데 그거 내가 원고료 모은 걸로 보낸 거야. 우리 생활비랑은 상관도 없어.”
“그래도… 그래서 더 마음이 좀 그렇다. 몸도 안 좋은 네가 힘들게 번 돈인데… 자식 돈 받는 부모 마음이 좋을 것 같지만 안 그래. 자식들이 피땀으로 번 돈인데 그 돈을 내가…(울먹거림)”
“아, 뭘 그래. 그리고 나 피땀 흘려서 번 돈 아니야.(웃음) 그리고 많지도 않은데 뭘…. 아무튼 보태서 빠방이 잘 사.”
더 통화하다가는 엄마가 정말 울어버릴 것 같아서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여기까지 읽으면 내가 뭐 대단히 착한 딸 같지만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나는 뭐든 내 마음이 내켜야 하는 사람, 엄마와의 관계에서도 그랬다. 그래서 엄마도 말한다. “쌀쌀맞은 딸”이라고. 가정사 일일이 말하긴 어렵지만, 나는 엄마에게 착한 딸이고 싶은 마음이 없다. 엄마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나는 일정 정도의 거리를 두고 지낸다.
엄마에게 야박한 딸 소리를 듣더라도 내가 더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거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엄마가 “엄마 인생에 마지막으로 차 사는데 딸이 좀 보태줘야지”라고 했으면, 그랬으면 딱 거절했을지도 모른다. 정 모른 척하기 힘들었으면 싫은 마음을 가득 담아 보냈겠지. 생색 팍팍 내면서.
자주는 아니지만 엄마의 부탁을 거절하는 일들이 생길 때마다 퍽 유쾌하지는 않았다. 불편했다. 그래서 내 마음이 편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고 찾았다. 엄마가 무슨 부탁을 하든 하지 않든 내가 알고, 내 마음이 내키는 일이면 ‘먼저’ 돕기로 했다.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니, 뭔가 억지로 하는 일이 되지 않아서 좋았다. 하고 나면 마음이 편했다.
엄마가 임플란트를 한다고 했을 때, 먼저 보태라고 용돈을 보냈다. 엄마가 일주일간 여름휴가를 얻었을 때, 친구들과 맛있는 거 사 먹으라고 돈을 보냈다. 나는 엄마의 아쉬운 소리를 듣지 않아 좋았고, 엄마는 딸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아 좋았을 거다. 엄마에게 돈의 액수가 중요한 것 같진 않았다. 그러니 나도 부담스럽지 않았다. 그보다 엄마는 내가 엄마에게 그렇게라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그 사실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가족의 일이든, 회사 동료의 일이든 내 마음이 하라고 하는 일에는 솔직할 생각이다. 후회 없도록. 게다가 작가통장의 돈은 엄마 말대로 피 땀 흘려 번 돈은 아니다. 더운 날 원고를 썼다면 땀은 좀 흘렸을지 모르겠지만 즐겁고 기쁘게 번 돈이었다. 청탁받은 원고를 쓸 때마다, 맡은 칼럼을 쓸 때마다, 강의를 할 때마다, 책을 낼 때마다 고통스럽진 않았다. 감사했다. 내가 이런 글을 쓸 수 있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실망하는 일이 없도록 더 공들여 쓰려고 노력했다.
기쁜 마음으로 번 돈이었기에 소중했고, 소중한 만큼 기쁘게 쓰려고 모아둔 돈이었다. 엄마의 차는 나에게도 여러 가지로 기쁨이었다. 엄마의 차를 사는데 드는 돈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그랬는데 옆에 있던 중학생 딸이 내게 한 마디를 던진다.
“엄마가 너무 뜸하게 용돈을 드려서 할머니가 감동해서 우시는 거 아냐?”
딸아, 그거 아니거든. 뭔가 아주 억울한 기분이 든다. 엄마는 올해 완전히 일을 그만 두셨다. 운전은 계속 하신다. 매일 텃밭에 가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