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꿈은 위안이었을까 굴레였을까

<우리들의 발라드> 참가자 이서영씨가 부른 곡 '꿈'을 듣고

by 은경

꿈을 일찍 찾으면 좋은 건 줄 알았다. 미리 준비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그건 꿈을 이룬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말이라는 걸 <우리들의 발라드> 참가자 이서영씨 이야기를 듣고 알았다. 이서영씨는 김윤아 노래 ‘꿈’을 준비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 곡의 가사가 너무 공감이 되어서 많이 들었던 곡인데요. (원곡자는) 꿈이 삶을 살아가는 버팀목이기도 하지만 나를 무너지게도 하는 존재라고 표현을 하셨는데 그 꿈이 저에게는 음악을 하는 거더라고요.”

이어 방송 화면으로 ‘간절히 원하면 꿈은 이뤄진다는 성공에 대한 관점에 의문을 제기한 곡, 간절하기에 원동력도 고통도 되는 꿈의 역설을 노래‘라는 설명이 자막으로 등장했다. 노래가 흐르고 가사가 들리기 시작하자 나의 20대가 생각났다.


너의 꿈은
때로 비길 데 없는 위안
외로워도 다시 걷게 해 주는


가사처럼 나의 꿈은 위안이었다. 이룰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이 나를 움직이게 했다. 최고가 되길 바라진 않았다. 그저 꿈에 근접하기만을 바랐다. 그 꿈은 이룰 수 있는 것, 노력하면 가능한 무엇이겠거니 생각했다.


때로 너의 꿈은
가장 무거운 짐이 되지
괴로워도 벗어 둘 수 없는 굴레


가사를 곱씹으며 나의 꿈은 위안이기만 했을까, 굴레인 적은 없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그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일하다가 알게 된 그에게 돌고 돌아 글을 쓰며 책 내는 삶을 살게 된 이야기를 나눈 적 있다.


졸업만 하면 거의 갈 길이 정해져 있는 학과를 전공했는데 일을 시작한 지 2주 만에 그만뒀다고. 공부는 어떻게든 할 수 있었지만 일을 하는 것은 달랐단다. 결국 그는 일반 회사에서 다른 일을 하다가 결혼 후 다시 배운 게 베이킹. 디저트 가게를 1년여 정도 열었다가 닫았다.


경기도 소도시에서 나고 자라 지금껏 40년 넘게 살고 있는 나로서는, 스무살 이후 지금까지 비슷한 직종에만 있었던 나로서는, 널을 뛰는 듯한 그의 직종 변경이 마냥 신기하고 대단해 보였다. 그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나는 그의 행동이 용기 없이 되는 일이 아니라는 걸 안다. 한 회사에서 부서 이동을 하는 것도 쉽지 않으니까. 나는 물었다. 그래서 글은 언제, 어떻게 쓰게 된 것이냐고.


“생각해보니 글을 계속 썼더라고요. 빈 시간에 무얼 했나 생각해보니 어렸을 때부터 글을 계속 썼어요. 메모하고 생각을 정리하고. 글 쓰는 시간을 좋아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걸 계속 해보자고 생각했죠.”


그의 꿈이 작가였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쓰는 것이 좋았다는 말을 듣고 나는 조용히 웃었다. 멀리서 다른 사례를 찾을 필요 없이 나도 그랬으니까.


꿈이 뭐 였나는 질문을 받으면 늘 “기자였다”라고 답했다. 시작은 그랬다. 걸프전 한복판에서 리포트 하는 방송 기자를 보며 기자를 꿈꿨다(지금의 그는 너무도 망가졌지만). 기자를 하고 싶은 마음에는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정의로운 마음'은 크지 않았다. 그보다는 글쓰기를 하며 돈을 벌 수 있는 직업 중에 하나가 기자였을 뿐.


그래서 취재기자가 아닌 지금의 일에 만족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의 글을 보기도 하고 내 글도 쓰면서 돈을 버니까. 만약 글쓰는 일과 먼 직종의 일을 하고 있었더라면 심적으로 꽤나 괴로웠을 거다. 실제 그 괴로움을 질퍽하게 겪은 시절도 있었고.


전공에 별 뜻이 없던 나는 4학년 1학기를 마친 여름방학에 지금 다니는 회사 편집기자의 추천으로 일자리를 구했다. 입사 전 예상은 했지만 매일 취재하고 글을 쓰는 일은 하지 않았다. 취재와 글은 가끔씩 이벤트처럼 주어졌을 뿐 그보다는 회사의 영수증 관리부터 강의 교안을 만드는 일까지 다양한 업무를 해야 했다(인문학강의 사이트 창립 멤버였다). 강의실이나 대학으로 가서 강의를 비디오 카메라에 촬영하는 일도 했다. 녹음을 하거나.


사장님은 동영상 편집 일도 해보라며 나에게 “너는 리베로가 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지금은 그런 인력을 필요로 하는 시대라면서. 나는 그때 '리베로'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멋지게 들렸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사장님 저는 이곳에서 리베로가 되고 싶지 않아요, 취재하고 기사 쓰고 싶어요.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며 하루 9시간을 견디는 것은 꽤 잔인한 일이었다. '내가 여기서 일할 사람이 아닌데... 기사 써야 하는데' 하는 마음이 커졌다. 점점 회사에 있는 시간이 아까웠다. 이러다가 기자를 못 하게 될까 봐 불안했다. 그때의 내 꿈은 벗어둘 수 없는 굴레였다. 학자금 융자를 3년이나 받아서 내 앞으로 된 빚은 많았지만 결국 나는 용기 내어 말했다. 사장님 더 기다릴 수 없어요, 회사를 그만 둘래요.


그렇게 졸업 전부터 지금의 회사에서 일하기까지 2년 남짓 여러 회사를 전전했다(이 과정에서 부모의 개입은 전혀 없었다). 첫 회사를 빼고는 다 취재하고 글 쓰는 일이었다. 그 시간 동안 꿈은 외로워도 다시 걷게 하는 위안이었다.


돌아보면 20대 이후의 나는 차선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았던 것 같다. 차선을 선택할 때마다 이 문장을 주문처럼 외웠다. “길은 하나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차선의 삶이 비참하지 않았다. 오히려 좋을 때도 많았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아이들에게는 그게 잘 적용이 안 되었다. 나는 그럭저럭 괜찮다고 생각한 차선의 삶이었는데 내 아이는 차선보다 최선이 되길, 목표를 잡고 이뤄내길 바랐다. 나처럼 살아도 괜찮지 않나 싶은데 실상은 나보다 나은 삶을 바랐던 걸까.


중학교 자퇴하고 검정고시 봐서 대학 갈 수 있지, 특성화고 갈 수 있지, 인서울 아니라도 괜찮지, 전문대 가서 편입하거나 대학원 갈 수 있지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그게 현실이 될까 봐 두렵고 불안했다. 걱정되고 자신 없는 건 아이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래서 강하게 요구한 것도 아니었지만 나는 내심 아이의 흔들림이 태풍이 아니라 미풍이길, 그냥 지나가는 바람이었으면 했다. 나는 차선의 삶도 충분히 괜찮다고 생각하며 살았으면서 왜 아이는 안 된다고,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걸까.


입시를 앞두고 부모로서 벗어낼 수 없는 나의 굴레는 바로 이 모순이었다. 앞으로도 이 모순과 나는 계속 충돌하겠지. 독립적으로 키우고 싶으면서도 품에 놓고 싶은. 모성의 이중성에 계속 부딪히겠지. 이런 모순된 생각으로 아이를 힘들게 한 순간도 있었으리라. 헷갈렸을 수도.


수능 시험 전까지 고등학교 3년 내내 썩은 동태 눈알 같았던(딸아 미안해) 아이의 눈빛이 시험 후에 반짝반짝 빛났다. 수능 끝난 직후 일요일 식사 시간에 알바를 해도 되냐고 묻더니, 월요일에 면접 보고 수요일부터 집 근처 식당에서 3시간씩 알바를 한다. 집에서는 한 마디도 잘 안 하는 아이가 알바 끝나고 와서는 "오늘은 손님이...", "오늘은 사장님이..." 하고 재잘재잘 말문이 터진다. 이런 아이를 3년간 학교에, 교실에, 독서실에 가둬두었다고 생각하니 마음 한 켠이 쓰리다.


둘째는 중2. 나는 과연 지금 깨달은 바 대로 둘째를 키울 수 있을까. 나는 내 모순을, 이 굴레를 벗어둘 수 있을까. 애 키우는 게 참 어렵다는 걸 다시 실감하는 중이다. 나는 알아서 큰 것 같은데(엄마 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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