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발라드> 참가자 이지훈의 마지막 소감을 듣고
“<우리들의 발라드>가 참가자들의 끝이 아니고 목차였으면 좋겠습니다. 저희의 마지막장이 아니고 처음 펼쳤을 때 있는 목차니까... 앞으로 더 많은 이야기들이 많이 많이 펼쳐져 있을 겁니다. 기대해주십시오.”
<우리들의 발라드> 파이널 생방송은 지난 2일이었다. 그리고 지난 9일 에필로그가 방송 되었다. 예선부터 시작해 파이널에 오른 참가자 6명의 시작과 끝을 편집해 보여줬다. 나는 이 방송을 틈이 날 때마다 계속 돌려봤는데 마지막 무대를 마친 이지훈 참가자의 소감을 듣고 뭔가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요동쳤다. 그리고 딸이 생각났다.
지난 12일은 딸의 고등학교 졸업식이자(학교 공사 문제로 방학을 일찍 하게 되었다), 2026년 대학 입시 수시 결과 발표일이었다. 수시 결과 발표가 예정보다 조금 일찍 나기도 한다던데 이번에도 그랬다. 졸업식 전날 밤인 11일 오후 10시 반인가... 아이 반 단톡이 울렸다. ‘수시 조기 발표 남, 확인해 보길’ 담임 선생님이었다. 제 방에 있던 아이는 조용히 수험번호를 입력했다.
그때 난 내 방에 있었다. 남편은 설거지 중이었고. 아이는 아빠에게 가서 말했단다. “아빠, 나 붙었대.” 그러더니 방에 들어와서 나를 보더니 말했다. “엄마, 나 붙었어.” “엄마, 나 붙었대.” “엄마, 나 붙었나 봐.” 아니, 사실 너무 놀라고 당황해서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뱃속 장기들도 심하게 놀랐는지 새벽 내내 복통이 와서 힘들었다).
수시 발표... 어떻게 이런 일이
지난 5일, 수능 성적표가 나오고 예상은 했지만 현실은 더 막막했다. 이 점수로 어느 대학에 갈 수 있을까. 부산? 대구? 강릉? 경주? 가능성은 전국 어디든 있었다. 아이는 이미 마음 속으로는 강릉 쪽에 있는 학교로 마음이 기운 상태였다. 사춘기 시절 강릉 바다를 그렇게 보러 가자고 하더니 이럴 운명이었나. 나도 이미 원영적사고(초긍정마인드)를 탑재한 상태였다. 아는 이 아무도 없는 부산보다는 외삼촌과 사촌 동생이라도 있는 강릉이 차라리 낫지 뭐, 그러면서.
수시로 붙을 수 있다는 희망 회로를 돌리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아이는 수리논술로 3곳을 지원했지만 시험을 마친 어느 곳에서도 만족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나는 당연히 '수시는 물 건너 갔다'고 여겼다. 그런데 그중 한 곳에서 합격이라니. 오랫동안 원했던 학과에 가게 된 것만으로도 아이는 좋아라했고 나도 그거면 충분하다 생각했다.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묘한 기분도 들었다. 내 고3 시절이 떠올라서다. 사는 건 어쩌면 나와의 적당한 타협일지도 모르겠다고, ‘차선의 삶’에 최선을 다하며 살았던 나는 종종 생각했다. 고등학교 내내 오로지 관심은 신문방송학과에 있었지만 성적표가 가리키는 곳은 달랐다. 재수를 선택할 자신도, 재수를 할 돈도 집에 없었다.
'없는' 것 투성이의 현실속에서 일단은 대학이란 울타리에 '있고' 싶었다. 어디든 일단 들어가고 보자는 내 솔직한 마음과 안정 지원으로 한 명이라도 더 대학에 보내 진학률을 높이고 싶었던 담임의 의지가 맞아 떨어져 특차(온리 수능 점수만 보는 전형)로 가게 된 대학이 바로, 이번에 딸이 합격한 곳이었다. 그러니까 딸과 나는 동문(이렇게 되길 바란 적은 없지만... 설마 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기지? 사연 없는 대학 진학은 없다, 증말).
생각해보면 고3 시절의 나는 대단히 순진했다(아니면 바보였거나). 내가 원서를 넣은 학과에서 뭘 공부하는지도 몰랐다(그에 비하면 전공 커리큘럼까지 확인하고 원서를 넣은 딸은 얼마나 기특한가, 너는 이미 엄마보다 낫구나). 대학 가면 수학 공부 안 해서 좋겠다는 생각에 그저 신이 나 있었던 철부지가 바로 나였다(나는 문과였다).
그런데 뭐 인생이 생각한 대로 되던가. 기대는 완전히 어긋났다. 전공 과목 시간표에는 '경영경제수학', '회계원리' 같은 무시무시한 과목들이 적혀 있었다. 대학까지 와서 나한테 왜 이래요, 수학이 왜 거기서 나와... 적잖이 당황했다. 학교 생활에 잘 적응했을 리가 없다. '프레시맨'이니 프레시 해야 할 3월의 캠퍼스는 온통 언프레시였다. 흙빛이었다. 땅만 보고 다녔으니까.
그래서 낙오자가 되었냐 하면 또 그건 아니다. 하고 싶었던 게 있어서일까. 4월이 되기 전 나는 운명의 포스터 한 장을 마주하게 된다. '대학신문사 수습기자 모집'. 수습기자라니, 기자라니, 대학에 이런 게 있었다니.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제야 고개를 들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대학신문사'는 나에게 신문방송학과의 차선책이었다. 그 차선이 꽤 재밌었다. 안 했으면 어쩔 뻔 했을까 싶을 만큼. 원래 정해진 임기는 5학기였지만 나는 3년, 6학기를 하고 퇴임했다. 임기가 끝나고 4학년이 되니 막막했다. 전공 공부와는 이미 멀어진 지 오래였고 취재하고 글 쓰는 일을 계속 하고 싶은 마음은 더 커졌다. 전공 공부에 의미를 두지 않으니 빨리 사회로 나가고 싶었다.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취업을 했다.
딸에게 덧붙이고 싶은 이야기
졸업하기도 전에 취직한 후 2년간 이런 저런 일을 하다 지금의 회사에 입사하게 된 이야기는 앞의 글 '나의 꿈은 위안이었을까 굴레였을까https://brunch.co.kr/@dadane/652'에서 이미 적었다. 별로 궁금하지도 않을 법한 이야기를 이렇게 구구절절 하는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다. 그러니까 지난 11월 수리논술 시험 날이었다. 시험은 오후 2시. 일찌감치 도착해서 학교 근처에서 점심을 먹을 때였다. 내가 입을 뗐다.
“생각할수록 이상해. 내 딸이 내가 다닌 학교 시험을 보다니. 너랑 여기 오게 될 줄 몰랐어.”
“(아이는 웃으며) 왜 엄마... 이 학교가 창피해?”
“(무슨 말을 해야 하나, 마땅히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다가)...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렇다고 막 자랑스럽진 않아.”
이날의 내 말을 아이가 기억하고 있을지, 마음에 담고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역류성 식도염이 낫지 않은 것마냥 목구멍 언저리에 불편한 이물감이 계속 남아 있는 듯했다. 그렇다고 '엄마가 했던 말 취소, 다시 생각해보니 이 학교에 다닌 게 자랑스러웠어' 같은 말을 하려는 건 아니다(그러면 정말 웃길 것 같다).
다만 덧붙이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막 자랑스럽진 않아'는 말로 내 대학 생활을 전부 설명하긴 어렵다는 것. 3년이란 시간 동안 대학 신문을 만들면서 해볼 수 있는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다. 한 마디로 그곳에서 기자라는 꿈을 키울 수 있었고, 평생 함께 해도 좋을 사람들을 얻었으니 그것만으로 꽤 성공적인 대학 생활을 보낸 것만은 틀림 없다. 사실 이 이야기는 정말 나중으로 미뤄두고 싶은 이야기였다. 원하는 전공도 아니고 원하는 대학도 아닌, 어쩔 수 없이 점수에 맞춰(마치 그 시절의 나처럼) 어떤 대학에 진학했을 때, 좌절하고 있을 딸에게 해주고 싶은.
엄마의 20대 시절을 들려주며 '길은 하나가 아니'라고, 그러니 너도 꿈을 포기하지 않고 뭔가를 하다보면 또 다른 길이, 기회가 생길 거라는 말을 준비해 놓고 있었는데... 아이는 다행히 바라던, 원하던 전공을 하게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나와는 좀 다른 대학 생활을 보내게 될 듯하다. 같은 꿈을 키우는 선후배들과 더 많은 걸 경험하고 실패하면서 배울 수 있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기쁘다. 나는 대학에서 누리지 못한 배움이기도 하니까(지금도 대학 친구가 '수업 좀 들어오라'고 잔소리 하는 꿈을 꾼다).
<우리들의 발라드> 마지막 무대를 끝낸 이지훈 말대로 대학이라는 첫 목차를 쓴 아이가 써나갈 내일이, 그리고 그후에 벌어질 많고 많은 목차들이 기대된다. 산다는 것은 모두 저마다의 목차를 써가는 일임을, 오디션에서 마지막 무대를 마친 이지훈의 소감을 듣고 나서야 새삼스럽게 깨달았다는 이야기를 참으로 길게도 풀었다.
길게도 썼는데 고치는 데만 2주 넘게 걸렸다. 생각이 많았다. 아이와 나의 이야기를 정리하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는 뜻이다.
정리되지 않은 이야기들은 차차 풀어낼 기회가 또 있겠지요. 이렇게 2025년 마지막 글을 발행하게 되었습니다. 저를 알고 지내시는 모든 이들이여, 해피뉴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