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크업 서바이벌 <저스트메이크업> 파리금손 수상 소감을 듣고
지난해 <우리들의 발라드> 말고도 메이크업계의 서바이벌 <저스트메이크업>도 챙겨 봤다. 최종 우승자는 매회 새로운 메이크업을 보여주었던 파리 금손에게 돌아갔다. 마지막 파이널 무대 주제는 꿈. 원로 여자 배우들의 꿈을 메이크업으로 표현하는 미션이었다. 파리 금손은 반효정 배우의 역할 '저승사자'를 ‘영혼의 안내자’라는 콘셉트로 멋지게 보여줬다. 그는 우승 소감에서 이렇게 말했다.
"제가 파리에 산 지 19년 정도 됐거든요. 20년 거의 다 되어 가는데... 나름 열심히 한다고 하거든요. 그런데 어떤 한계에 부딪힐 때가 되게 많아요. 내가 잘하고 있는 게 맞나. 아니면 있다가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나. 이런 생각을 되게 많이 해요. 이거 준비하면서 내가 스무 살 때 메이크업 할 때 그만큼의 열정을 가지고 할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하다 보니까 너무 재밌는 거예요. 뭔가를 좀 뚫은 것 같아요. 스스로한테."
이 말을 듣는데 반가웠다. 파리금손도 나와 같은 병을 앓았구나 싶어 이상한 동질감이 들었다. 그건 바로 ‘내가 잘하고 있는 게 맞나’ 병이다. 20년 가까이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살아온, 남들이 보기에는 꿈을 이룬 것 같아 보이는 파리 금손 같은 사람도 피해 갈 수 없는 병, 20년 넘게 한 회사에서 편집기자 일을 하고 나도 수시로 맞닥뜨리는 병. 살면서 나를 돌아보게 되는 순간이 한 번은 온다. 여러 번 오기도 한다. 나 지금 잘 가고 있나. 잘하고 있나. 이 길이 맞나.
인간은 왜 돌아보지 않고는 못 배기는 걸까. <그리스 신화>에서 그런 장면이 있다. 아내 에우뤼디케를 저승에서 구한 오르페우스에게 한 가지 금기가 주어지는데 바로 저승을 다 빠져나갈 때까지 절대 뒤를 봐서는 안 된다는 것. 결론은 짐작하는 대로다. 오르페우스 금기를 어기고 아내를 데려갈 수 없게 된다. 오르페우스에게 어리석다고 함부로 말할 자신이 없다. 인간은 그런 존재니까. 나 역시 그렇고.
우리나라에도 뒤돌아보면 돌이 된다는 금기를 어긴 전설이 있지 않나. 한번 의심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가 없다. 그냥 가던 길 계속 가면 되는데 못 간다. 가다가 돌부리에 넘어져도 보고, 탄탄대로도 가보고 하면 되는데, 그게 인생인데 뒤돌아보고야 만다. 물론 돌아본다고 돌이 되는 일은 현실에서 벌어지진 않지만 돌아버릴 것 같은 고민은 시작된다.
그럴 때 파리 금손은 안주하지 않고 도전을 택했다. 그것도 서바이벌이라는 만만치 않은 가시밭길을. 업계에서 내로라하는 사람들과 실력을 겨뤄야 하는. 그것도 이겨야 앞으로 나갈 수 있는. 계속 갈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패하게 되면 상처는 피할 수 없는. 이 선택이 자신에게 이익이 될지 그렇지 않을지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도전을 선택한 파리금손이었다.
하지만 도전해 본 사람은 알지. 그것도 이 정도 연륜이 있는 사람이라면 크게 잃을 게 없다는 것도. 그 과정에서 반드시 얻는 게 있을 거라는 것을 아니까.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건 사람이 아니라 견뎌온 시간에 대한 믿음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20년이란 시간은 그런 시간들의 합이었을 테니까. 내추럴한 피부를 표현하기 위해 한 겹 한 겹 붓으로 제품을 정성껏 펴 바르는 것처럼 일하면서 받은 상처 역시 낫고 덧나고를 반복하면서 자신을 지켜왔을 테니까.
내가 앞으로 정말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사는이야기 연구소’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 꿈을 내가 품어도 되는 것인지 의심하면서도 생각할수록 하고 싶은 마음도 커졌다. 마치 여행 갈 준비를 할 때 가장 신나는 것처럼. 물론 하고 싶다고 다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특히 조직에 속한 사람은 그렇다. ‘나름 열심히 한다고 생각했지만 어떤 한계에 부딪힐 때가 되게 많아요’는, 파리 금손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나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머릿속으로는 완벽하게 안다. 여기서 버티기로 결정했다면 조직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찾아서 하면 된다는 것을. 지금은 어떤가. 하고 싶은 일이 있나. 그게 뭔가. 때마침 <경향신문> 기자로 ‘인스피아’라는 이름의 1인 뉴스레터를 기획해서 4년 동안 홀로 써온 김지원씨가 쓴 책 <일에 마음 없는 일>을 읽게 되었는데, 거기 이런 대목이 있다.
“아무리 내가 현재 기묘한 형태로 자율성을 확보하고 있다고 해도 언제 어느 순간 다시 취재 중심의 현업 부서로 가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적어도 월급 받는 직장인으로서의 자각과 양심은 있기 때문에 그런 때가 온다면 미련 없이 현 상황을 버려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고백하건대 사는이야기를 맡아서 일하는 동안 나는 늘 불안했다. “너 이제 그거 그만해”라는 소리를 듣게 될까 봐. 나에게 사는이야기는 ‘헤어질 일은 절대 없다’라고 말할 수 있는 상대라기보다 ‘언제든 헤어질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연인 관계에 가까웠던 것 같다. 그래야 덜 상처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뭐 9년을 사귀었든 9개월을 사귀었든 헤어지면 다 슬픈 거 아닌가 싶고.
'언제 어느 순간 다시 취재 중심의 현업 부서로 가게 될지 모를' 김지원씨는 갑작스러운 사내 채널 개편으로 지난해 7월 30일 자로 '인스피아'를 마치게 되었고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났다. 그리고 내가 일하는 팀에도 변화가 생겼다. 이제 라이프플러스 팀은 없다. 팀이 없어졌다고 하던 일까지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변화는 생길 거다. 당장 인사 발령이 나고 1시간도 되지 않아 법카를 반납하라는 연락이 왔다(빠르다). 위로는 선배가, 아래로는 후배가 늘었다. 더 큰 팀의 선임에디터가 되었다.
5일 월요일 아침 인사가 나고, 주말 동안 밀린 기사를 하나씩 하나씩 검토하기 시작해서 절반 넘게 봤을 때쯤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팀이 없어졌는데 내가 이렇게 아무 일 없다는 듯 일할 수 있다는 데 놀랐다. 습관이 이렇게나 무섭다. A파트 볼트로 8년을 쓰다가 하루 만에 B파트 볼트가 되는 것과 뭐가 다른가.
김지원씨처럼 나도 '월급 받는 직장인으로서의 자각과 양심'이 있는 사람이니 미련 없이 그냥 하던 일 하면 되지만 나는 부품이 아니고 인간이니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갑자기 <골때리는그녀들>에서 팀을 지키지 못한 감독의 심정을 알 것 같았다.
지난 연말, 사주를 보았는데 나에게 이동수가 있다고 했다. 피할 수 없냐고 물었더니 오히려 그게 피할 수 있는 거냐고 반문했다. 인사는 그런 거다. 결정나면 따르는 것. 따르기 싫으면 나가면 된다. 그래서 짧게 나갔다. ㅎㅎ 휴가를 내고 며칠을 쉬었다(올해 첫 휴가를 이런 기분으로 쓰게 될 줄 어제의 나는 몰랐지). 쉬는 동안 극장에 가서 매일 영화를 봤고 책을 많이 읽었다. 그리고 많이 걸었다.
휴가 동안 내 안에서 일어난 감정을 오롯이 받아냈다. 마치 실연당한 사람처럼. 예상은 했지만 막상 닥치니까 뭘 해야 좋을지 모르겠는. 뭔가 손에 일이 잘 잡히지 않는. 할 수 있지만 하기 싫은. 일어나기 싫고, 먹기 싫고, 만나기 싫고. 내가 이 일을 진짜 많이 사랑했나 보다. 실연은 '사랑하는 상대에 대한 마음에 대해 성취하지 못한 상태'란다. 내가 겪은 일과 뭐가 다른가. 연애의 주체가 사람이 아닌 일이라는 것 밖에는.
복귀를 하며 새삼 '도전'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공간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새로 함께 일 하는 사람들, 처음 해보는 일도 생길 테니 도전이 틀린 말은 아니다. 나도 파리 금손처럼 ‘하다 보니까 너무 재밌고, 스스로 뭔가를 좀 뚫은 것 같은’ 그런 순간을 맞이하게 되려나.
다 모르겠고 머리가 복잡할 때마다 정혜윤 작가의 <책을 덮고 삶을 열다>가 많은 도움이 되었다. '뭔가 하려는 사람 치고 등허리에 바위를 짊어지지 않은 사람은 없다'라는 문장에 계속 시선이 머물렀다. 어디에 있든 나는 계속 '뭔가 하려는 사람'이고 싶다.
100번째 듣고 있는,
나를 떠나가는 것들.
- <우리들의 발라드> 이지훈 버전.
잘 가라 나를 떠나가는 것들
그것은 젊음 자유 사랑 같은 것들
잘 가라 나를 지켜주던 것들
그것은 열정 방황 순수 같은 것들
그렇게 믿고 다치더라도
나는 또 누굴 믿게 되겠지
그렇게 아픈 사랑이 끝나도
나는 또 누굴 사랑하겠지
그러니 잘 가라 인사 같은 건
해야겠지 무섭고 또 아파도
매일이 이별의 연습이지만
여전히 난 익숙해지지 않아
그러니 잘 가라 인사 같은 건
해줘야지 너에게 또 나에게
배웅은 또 다른 마중일 테니
해야겠지 너에게 또 나에게
난 아파하겠지 그래야
보낼 수 있을 테니 모든 걸
난 나아지겠지 모든 건
다 지나갈 테니
보내야 오겠지
내일이 그렇듯
또 흐려지겠지
지나간 것들
몇 번을 들어도 '내일'이란 가사가 왜 자꾸 '내 일'로 들리는 건지, 참 이상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