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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ntaetae Jun 23. 2023

1타 강사 vs 교사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교육'에 대해

수업이 바뀌면 학교가 바뀐다, 사토 마나부, 손우정 옮김, 에듀니티.

  

  대학교 2학년 때 이야기다. 여느 대학이 그렇듯, 대학교 1학년 때는 교양수업을 주로 듣게 된다. 그 후 한창 전공수업을 듣고 있었다. 전공수업은 교육에 대해 더욱 직접적으로 다룬다. 그쯤 되면 ‘진짜 내가 교사양성기관에 들어와 있구나’, ‘아무것도 모르는데 내가 진짜 교사가 되는 건가?’, ‘될 수 있다고 하면 어떤 교사가 되어야 할까?’ 등의 생각이 교차하기 마련이다. 나도 그런 생각을 하며 하루하루 살았던 기억이 난다. 

  아마 사회과교육론 시간이었을 것이다. 교수님은 우리가 대강 다 온 것을 곁눈질로 확인하시고는, 아주 간단하지만 아주 묵직한 질문을 던졌다. 


  “‘학교’와 ‘학원’은 무엇이 다를까요?”


  당연히 다른 것이 아닌가! 우리는 조금 웅성대다 자유롭게 발언했다. “학원에서 가르치는 사람은 강사라고 하고, 학교에서 가르치는 사람은 교사입니다. 그게 제일 큰 것 같아요.”, “공간의 차이가 무엇보다 큰 것 같습니다”, “돈을 내고 안내고의 차이입니다” 등등. 모든 발언이 그럴듯했다. 하지만 교수님은 “그렇다고 하다면 등록금과 4년의 시간을 투자하며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지 않느냐. 여러분이 학원 강사 알바를 하듯 지금 바로 교사해도 괜찮은 것 아니냐.” 등과 같은 답변으로 우리를 다시금 생각에 잠기게 만들었다. 

  서울특별시는 2021년부터 ‘서울런’이라는 인터넷 강의 교육지원 플랫폼을 운영 중이다. 이 플랫폼에서는 사설 인강업체와 계약해 무려 ‘1타 강사’의 강의를 무료로 수강할 수 있도록 한다. 저소득층 및 학교 밖 청소년이 대상이다. 이 복지정책에 대해 서울시는 ‘교육’ 불평등 완화를 목표로 내건다.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이 여러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 준다는 것이다. 자세한 걸 따지면 이야기가 길어진다. 어쨌든 취지 자체’만’을 보았을 때는 좋다고 생각한다. 

  군대에서 ‘교육’이라는 단어는 자주 등장한다. 이름부터 ‘신병교육대’이다. 5주 정도의 시간 동안 그곳에서 훈련병들은 수많은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수료와 동시에 정식으로 계급을 부여받고 진짜 시작을 하게 된다. 나도 그 과정을 당연히 거쳤다. 우리 소대장이었던 어느 교관이 생각난다. 교육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상담을 하면서 내가 교육학을 전공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곤 내게 대뜸 물었다. “내가 교육하는 방식이 상당히 교육적이지 않냐”고 “너는 뭔가 알지 않냐”고.

  이렇듯 세상에는 수많은 ‘교육’이 존재한다. 당연히도 그것은 수많은 면면을 가지고 있다. 생각하는 것만큼 단순하지 않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설령 당신과 다르더라도. 


  사토 마나부는 우리에게 일본의 교육학자이자 도쿄대 교수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러한 형식적 수식어만으론 그를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30여 년. 그가 수업을 관찰해 온 시간이다. 그 시간 동안 사토 마나부는 수업을 관찰하고 교사들과 소통하며 학교를 변화시켜 왔다. ‘살아 있는 전설’의 교육 이야기가 궁금하다. 

  

    주체성에 대한 재고  


  사토 마나부의 책은 산뜻한 그 표지와는 다르게 과격하게 시작된다. 


“수업은 아이, 교사, 교재, 학습 환경의 4가지로 구성된다. 이 4가지 구성요소 가운데 최근의 경향은 오직 아이들에게만 관심이 향해 있다는 것이다. (...) 수업을 관찰할 때마다 곰곰이 생각하게 되는 것이 일본의 교사들을 지배하고 있는 ‘주체성’이라는 신화이다. 이것은 대단히 골치 아픈 문제이다.(p.34)”


  ‘주체성’. 자주 들었을 것이다. 혹은 ‘자기주도학습’. 이건 정말 많이 들었을 것이다. 물론 긍정적으로. ‘학원에 다니지 않고 교과서 위주로 홀로 공부한’ 사람은 모두의 존경을 받는다. 특히 교사와 학부모는 그들을 좋아한다. 밝고 명랑하다. 모든 과제에 관심을 보이며 두각을 나타낸다. 교사의 질문에 항상 깔끔한 정답을 내놓는다. 교사에 입장에서 그 학생은 한줄기 빛이다. 교사들끼리 모였을 때 장난스럽게 ‘다른 학생이 다 그 학생 같았으면 좋겠어’라는 말이 저마다 튀어나온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세상은 다양하기에. 수업시간에 딴짓은 기본이고, 수업 분위기를 아예 헤치는 몇 명 때문에 수업 진행이 어려울 때가 있다. 참다 참다  교사는 결심한다. “이제 일어난 사람만 입을 열고 말할 수 있고… 손신호(찬성, 반대, 질문)를 사용할 것이며… 수업을 시작할 때는 차렷, 경례를… 발표가 끝나면 지명하는…” 그 후, 놀랍게 변화한다. 규칙에 따라 물 흐르듯 수업이 진행된다. 우연히 반을 지나가던 교장선생님은 “이 반은 질서가 있네요.”하며 칭찬한다. 한편, 질서를 얻게 된 교사는 자신의 교육관에 따라 학생들에게 ‘스스로, 자기 주도적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해 보자’라고 말한다. 


  그럴듯한 이야기이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범생과 아래 교사의 결심과 방향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할 것이다. 하지만 사토 마나부는 이 모든 것들을 ‘거짓 주체성’을 말하며 비튼다. 


“주체성 신화는 수업에서 ‘자학자습’을 이상화하고 ‘자기표현’이나 ‘자기결정’을 이상화하는 경향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나 자학자습이나 자기표현이나 자기결정은 독학의 이상은 될지라도 교재나 동료나 교사가 개입하는 수업 장면에서는 이상화되어서 안 될 것이다. 아이들의 자립적이고 자율적인 배움은 수업의 중요한 요소의 하나이지만, 그 자립적이고 자율적인 배움도 교사의 활동과 교재와 교실의 동료와의 관계나 학습환경과의 관계에서 인식할 필요가 있다.(p.37)”

“[대표적으로] 손신호를 사용하도록 강요당하는 아이들은 사고와 감정의 다양성과 복합성을 무시당하고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사고나 감정을 끊임없이 ‘찬성’, ‘반대’, ‘질문’의 3가지로 분류하여 발언하도록 강제당하고 있다. (...) 밝고 활발한 활동이 계속되는 수업이 좋은 수업이라는 주체성 신화가 그만큼 완고하게 교사의 머리와 신체를 속박하고 있다. 손신호는 그 특징적인 현상의 하나인 것이다.(p.41,43)”


  사토 마나부의 말은 우리의 완고한 생각에 균열을 일으킨다. 그에게 있어 학교교육에서 주체성과 자기주도학습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주체적이고 질서 있게 보이는 손신호 등의 형식은 학생들의 사고와 감정을 제한할 뿐이다. 심지어 밝고 활발한 활동만이 계속되는 것 또한 옳지 못하다. 즉, 거짓 주체성을 빨리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사토 마나부는 ‘수동적 능동성’으로의 주체성을 말한다. 주체성에 대해 그리 비판해놓곤 다시 주체성이라니. 그러나 수동적 능동성으로의 주체성은 단순한 주체성과는 큰 차이가 있다. ‘수동적 능동성=대응’을 중심으로 하기 때문이다. 

  단순한 주체성의 경우, 상대방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혼자이다. 혼자여도 충분하다. 하지만 대응의 주체성은 다르다. 대응 자체가 상대방이 있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누구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교재, 교사, 동료, 심지어는 나 자신이어도 괜찮다. 그것으로부터 관계를 형성하고 나아갈 수 있으면 그만이다. 관계 형성과 그로부터의 나아감의 과정이 바로 사토 마나부가 말하는 배움이고, 수업이다. 

  그는 발언을 잘하는 교실보다 서로 잘 듣는 교실이 좋은 교실이라 말한다. 즉, 활발한 교실보다 차분한 교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교사가 미리 계획한 대로 딱딱 맞추어 진행되는 수업보다, 의견에 대한 단순한 호응을 넘어 학생과 공진하며 정성을 쏟는 수업이 좋은 수업이라 말한다. 수업이 완벽히 계획한 대로 끝나는 것 이상의 가치를 추구하자는 이야기이다. 이들은 대응 속에서 가능하다. 

  ‘수동적 능동성=대응’으로서의 주체성을 염두하고 수업과 배움을 조직할 때, 교사의 역할은 두 가지로 정리된다. 테일러링tailoring 과 오케스트레이팅orchestrating. 테일러링은 재단하는 것, 즉, 학생 개개인에 대응하는 것과 비유할 수 있다. 마치 체격에 맞게 옷을 재단하듯이, 한 명 한 명의 개성에 대응하여 수업을 창조하는 것이다. 오케스트레이팅은 다양한 악기의 조화를 고려하여 심포니를 만들어내듯, 다양한 의견이나 이미지를 교류시켜 수업을 전개하는 것이다. 사토 마나부는 이 두 가지 활동을 통해서만이 ‘배움’을 실현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이상의 흐름을 따라가 보면, 사토 마나부는 강력한 혁신을 주문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사토 마나부가 말하는 ‘주체성 신화’는 우리 교육을 지배하고 있다. 주체성은 무적이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긍정된다. 내면의 관심과 흥미로부터 출발하는 자기주도학습, 안다는 자신감으로 비롯된 똘망한 눈빛 그리고 명랑하고 정확한 목소리. 아, 모범생. 한편, 이로부터 비롯된 모든 학생을 모범생으로 보이게 만들어주는 마법의 형식들. 혹자는 물을지 모른다. 주체적인 게 잘못된 것이냐고, 꼭 그렇게 부정적으로 바라봐야 하냐고. 이에 대해 사토 마나부는 아마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나는 주체성 자체를 비판한 것이 아닙니다. 주체성 ‘신화’를 비판한 것이지요.”  문제는 신화이다. 그리고 그 신화가 ‘학교 교육’에 적용된다는 것이다.

    주체성 신화는 학교 교육을 정형화시킨다. 교사의 가르침을 획일화하며 학생의 개성, 행위를 제한한다. 완벽한 자기주도학습 속 교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무책임한 교사만이 존재한다. 교사는 결국 평가 기계로 전락한다. 학생들은 다른 동료와 관계 맺을 기회를 박탈당한다. 공부는 혼자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학생 한 명 한 명이 가지는 색깔은 존중받지 못한다. 관심과 흥미에 따라 주체적으로 학습하는 것이 이상적인 것이기에 아이러니하게도 관심과 흥미가 없더라도 일단 해야 한다. 그것도 밝고 명랑하게, 원래 관심과 흥미가 있는 것처럼. 깊은 고민 끝에 나온 짤막한 더듬거림은 허용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생각보다 뿌리 깊다. 

  변화해야 한다. 근본적 변화가 필요하다. 모두와 모든 것을 위해서. 사토 마나부는 변화를 위해 수업에 주목한다.   


    수업이 바뀌어야 한다  


  아마 수업이 바뀌어야 한다는 말은 인류가 수업을 시작한 이래 계속 존재했을 것이다. 특히 학교 교육에서는. 지금까지 수많은 방법들이 시도되고, 성공하기도 실패하기도 했을 것이다. 반복되는 경향이 있다. 사토 마나부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한다.


“교실을 닫고 있는 교사는 공교육의 교사라 부를 수 없다.(p.94)”


  명료하고 강력하다. 나를 포함해 많은 분들이 뜨끔 하셨을 것 같다. 실습 때가 떠오른다. 수업을 감명 깊게 참관하곤 선생님께 가서 감사를 표현한 적이 있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수업이었습니다.” 대답은 뜻밖이었다. “지금 많이 배워두도록 해요. 현직 나가면 별로 기회 없을 거예요.” 그 당시 나는 그 말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전, ‘대학 때 배운 것들은 다 소용없다. 어차피 현직 나가면 다시 배우게 된다’라는 말을 익히 들었기 때문이다. 

  사토 마나부는 학교를 지배하고 있는 ‘벽’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존중’이라는 탈을 쓴 채 교사 간 소통이 이루어지지 못하게 막고 있다고. 벽을 허물지 않으면 변화하지 못한다. 교실 문을 열어야 한다는 것이다. 더욱 구체적으로 3년의 변화를 제시한다.   


    1년: 모든 교사가 수업공개를 하고, 수업사례연구 교내연수체제를 구축하기  


  사실 수업공개는 지금 한국 학교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 학부모 참관 또는 장학사, 교감, 교장의 장학 등. 하지만 그러한 수업 공개가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은 대부분이 동의할 것이다. 다시 말해, 수업 공개는 진정 수업 혁신 및 발전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해야 되니깐 하는, 일종의 ‘과제’로 인식된다. 피곤하고 귀찮은. 사토 마나부는 이를 지적하며, 일상 수업에 대한 수업공개-당연히 모든 일상 수업이 아니다-, 그리고 해당 수업에 대한 수업사례연구 교내연수를 제안한다. 

  현재의 수업참관은 대부분 교실 뒷자리에 앉아, 자리에 놓인 수업 과정안을 보며 교사의 가르침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혹여라도 해당 수업에 대한 수업 후 연구(피드백)를 한다고 했을 때, 참여자들은 당연히 수업의 잘된 부분이나 서투른 부분에 대해 평가하기 마련이다. 

  사토 마나부의 수업공개와 수업연구는 아예 다르다. 먼저 교실 앞 혹은 옆 자리에서 참관(촬영)하는 것을 제안한다. 수업자의 가르치는 방식보다 ‘교사의 대응’과 ‘아이들의 배움’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이를 잘 관찰할 수 있는 것은 매우 많은 노력이 투자된, 일 년에 한두 번 준비하는 그런 특별한 수업이 아닌 일상적 수업이다. 또한 동료 교사와 함께하는 수업사례연구의 목적은 동료성collegiality 구축, 상호불간섭 타파, 그리고 수업의 발전이기에, 주된 내용은 수업에서의 어려웠던 점과 재미있었던 일을 함께 공유하고, 아이들의 배움에 대해 소통하는 것이라 말한다. 즉, 사토 마나부식 수업비평은 ‘평가’가 아닌 ‘협력’이다.   


    2년: 연수회 내용 높이기, 학교 조직-기구를 수업 만들기와 연수를 중심으로 재조직하기  


  사토 마나부는 학교가 변화하려면 최소 연간 100회 이상의 수업사례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교사가 20명 있는 학교라면 인당 5회 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쉽지 않을 것이다. 여러 현실 문제들이 존재한다. 사토 마나부는 그중 먼저 꼬일 대로 꼬이고 너무 비대한 학교 조직-기구를 개편해야 한다고 말한다. 회의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한 업무를 온전히 홀로 담당하기 등 여러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시간을 확보할 수 있으면 된다. 요컨대, 2년 차는 수업 만들기와 연수에 집중할 수 있도록 제반 환경을 다듬는 시기이다.    


    3년: 변화의 시기-수업 만들기와 교육과정 만들기 본격화  


  1년 차와 2년 차가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시기라면, 3년 차는 구체적으로 변화가 일어나는 시기이다. 물론 더 빨리 변화가 나타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한다. 이 시기가 되면 어색했던 수업 공개와 수업비평 연수는 이제 당연한 것으로, 학교를 구성하는 가장 핵심적인 시스템이 된다고. 한편, 이외에 사토 마나부는 한 가지 과제를 더 내민다. 


“교사가 학부모를 신뢰할 수 없고 학부모가 교사를 신뢰할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되는 한 아이들이 완전한 배움을 추진하는 일은 어려우며 학교개혁을 추진하는 일도 불가능하다.(p.131)”


  하지만 학부모와의 신뢰를 구축하는 것은 정말 어렵다. 몇 번 있는 상담주간에 이루어지는 상담 혹은 학부모 수업 참관을 통해 신뢰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사토 마나부는 ‘학습참가’를 제시한다. 수업참관을 학부모의 학습참가로 전환하기. 학습참가는 말 그대로 학부모를 아이들의 학습에 참가시키는 것이다. 즉, 학부모의 위치를 수업의 외부에서 수업의 내부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이때 교사에겐 느긋함이 요청된다. 계속 학부모가 바로 아이들에게 가르치려고 해도 이를 기다리며 결국 학부모가 수업에 스며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사토 마나부는 자신이 경험한 많은 사례를 제시한다. 학부모의 학습 참가가 교사와 학부모의 신뢰 관계를 형성하고, 연대하게 하며, 궁극적으로 배움의 공동체로 나아가게 해 주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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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는 언제나 끝의 스탬프로 단락을 짓지만 ‘배움’은 언제나 시작을 준비하는 것이며 ‘네버 엔딩 스토리’의 성격을 지닌다.(p.219)”


  대학에 다닐 때 종종 접했던 사토 마나부였다. 계속 읽어야지 하다가 지금에야 읽었다. 몇 달 동안 자격증과 컴퓨터 공학 공부를 계속했었다. 이 책을 읽고 사색하고 글 쓰는 과정은 나로 하여금 잠재돼 있던 교육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그날은 정해져 있지만, 어서 전역하고 싶다. 한편, 책을 읽다 나는 자주 멈췄다. 전체적인 난이도 자체는 높지 않은 책이다. 추상적이지 않다. 구체적이다. 문체도 깔끔하다. 읽는 도중 계속 감탄했다. 하지만 나는 자주 멈췄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핵심은 아마도 ‘본질’에 대해 다루어서가 아닐까. 

  사토 마나부의 교육이론은 익숙한 개념들에 대해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한다. ‘학교’라는 공간은 공부하는 공간이다. 수업은 공부하는 시간이다. 교사는 가르치는 사람이며 학생은 학습(공부)하는 사람이다. 지식은 중심에 놓인다. 즉, 교사는 지식을 알고 있는 사람이며 학생은 그것을 알아야 하는 사람인 것이다. 이 외에도 주체적 학습, 교사 간 상호불간섭 등. 이 모든 것들은 ‘배움’ 아래 재정의되어야 한다. 


  나 또한 1타 강사의 수업을 들었다. 그들의 능력은 정말 대단하다.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지식을 습득하고 문제를 풀 수 있도록 만든다. 하지만 교육은 단지 지식 학습(공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일부일 뿐이다. 학교는 배움의 공간이다. 배움으로 가득 찬 공간이다. 가장 잘 배울 수 있는 공간이다. 교사는 아이들이 배울 수 있도록 가장 잘하는 사람이다. 화면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세계에서 한 명 한 명 아이들과 호흡하는, 일 년에 한 명뿐인 사람이다. 



사토 마나부,  https://img.hani.co.kr/imgdb/resize/2015/0814/00537739801_20150814.JPG


수업이 바뀌면 학교가 바뀐다,         https://contents.kyobobook.co.kr/sih/fit-in/458x0/pdt/9788956089515.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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