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해외취업뒤에 숨은 쓴 맛
필리핀에서 일을 하게 된 지도 벌써 5개월이 되었다.
이 곳은 일년내내 여름인지라 시간이 정말 빠르게 흘러가는 것을 느낀다.
사실 해외취업을 하기 전, 나는 한국에서 꽤나 괜찮은 회사에 근무하고 있었다. (지극히 내 기준에서)
연봉도 동일직군, 경력에 비하면 평균적인 수준이였고 디자이너인데 야근이나 주말근무 또한 거의 없었으며 상사 눈치없이 무조건 칼퇴근하는 분위기, 공휴일이나 근로자의날에도 꼬박꼬박 쉴 수 있었다. 월급 밀리는 날 도 전혀 없었고 회식도 잦지않았으며 술을 강제적으로 먹인다던지 신입사원이 상사 비위를 맞춰줘야 한다던지 그런 일 또한 없었다. (당연한 것들이지만 지키지 않는 회사를 주변에서 너무나 많이 봐왔다.)
나름 좋은 직장이라고 생각했지만 일한지 2년째 되는 해, 과감하게 그만두고 이직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해외취업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해외관광지로 유명한 필리핀 세부의 규모있는 한인업체에서 디자이너를 모집한다는 구인광고글을 발견한 것이다. 이력서를 당장 넣었다. 서울까지 올라가 면접을 보고 합격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평소에 인터넷에 떠도는 해외취업관련 글이라면 안읽어본 글이 없을 정도로 해외취업을 동경해왔었기 때문에 이번 합격소식은 너무나도 기쁘게 다가왔다. 사실 남자친구가 있었기에 오래 해외에 머물 생각은 없었고 딱 1년만 일해보자는 심정으로 해외취업 결심을 내렸다.
그리하여 나는 세부로 오게되었고 이번 9월은 내가 이곳에 머문지 6개월째가 되는 달이다. 그리고 9월달이 되기 이틀 전인 엊그제, 나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회사에서는 더이상 재계약을 원치 않으니 15일뒤에 일을 그만두라는 것이었다.
한국도 아닌 타국에서 내가 해고를 당하다니...!
해고사유는 내가 어떠한 잘못을 해서가 아닌, '시킬 일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 였다.
회사 창립 후, 사업이 점점 커지자 디자인일이 많아짐에 따라 이 직무를 전담할 사람을 뽑자! 라고 결정을 내려 사람을 뽑아 왔는데, 생각했던 것 보다 일이 많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나는 해고소식을 듣기 두 달 전, 10월쯤에 일을 그만두기로 마음 속으로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회사에서 일어나는 말도안되는 직원에 대한 부당한 대우들을 보면서 더 이상 이 회사와 함께 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10월에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티켓까지 미리 끊어두었으니 말 다했다.)
내가 이 회사에 오면서 작성했던 고용계약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월급 : 1~3개월차 5만페소, 3~6개월차 6만페소, 6개월이상 7만페소
계약기간 : 6개월
휴무 : 주1회 휴무, 6개월 이상 근무 시 월1회 월차
여권연장비용과 주거 3개월 지급
그리고 내가 입사 전 질문하였던 내용은 다음과 같다.
Q : 숙식지원에 관해서 궁금합니다.
A : 주거는 3개월만 지원가능하며, 식사는 레스토랑운영하는 회사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Q : 워킹비자가 나오나요?
A : 네, 신청가능합니다. 다만, 3개월 후 가능하다.
Q : 왜 3개월 후인가요?
A : ...(답장 없음)
분명 계약은 6개월이였지만, 고용계약서에 6개월 이상 일을 할 시 연봉이 인상된다거나 월차를 사용할 수 있다는 내용을 보아서 내가 회사에 피해가 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계속 재계약을 통해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1년간 일하며 거주할 계획을 세우고 온 것이었다.
하지만 이 회사에서 겪은 충격적인 일들이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 라는 마음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 충격적인 일들을 하나씩 나열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1. 워킹비자비용을 어떠한 직원에게도 지원해주지 않았으며, 원하는 직원이 신청을 하면 신청만 도와주었다.
워킹비자신청비용은 1년에 150만원이었다. 필리핀을 오기 전, 나는 이 사실에 대하여 어떠한 것도 들은적이 없었다. 통상적으로 해외취업이라고 하면 워킹비자는 회사측에서 지원을 해준다. 왜? 자신의 회사에 일을 하기위해 먼 타국까지 오는 직원에게 일하는 비자를 내주는 것은 당연히 회사책임이다. 워킹비자를 신청하면 나오냐는 질문에 3개월뒤에 신청가능하다는 답변을 얻었기에 당연히 비자지원을 해주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계약서에 적힌 여권연장비용 3개월 지원은 워킹비자를 신청하기 전인 3개월동안의 관광비자연장비용을 지원해준다는 의미로 이해를 했었는데 그게 아니라, 정말 3개월만 지원을 해준다는 의미였던것이었다.
그렇다면 워킹비자를 신청하지 않는 직원은 무슨비자로 일하냐고? 관광비자로 일을 하였다. 돈이 없으면 워킹비자를 신청도 못하고 불법적인 노동을 해야했다.
2. 계약서에 기록된 여권연장 비용 3개월을 제대로 지원해주지 않았다.
나는 비자에 관해 이해가 부족한 상태로 해외로 나왔다. 비자가 있어야 해외에 머물 수 있다는 사실과 비자연장을 하려면 비용이 든다는 사실은 알고있었으나, 비자연장을 하려면 이민국을 방문하여 여권에 어떠한 표시를 해야한다는 사실은 몰랐다. 필리핀에 와서 비자에 관한 설명은 단 한번도 듣지 못했다. 계약서에 3개월간 비자연장을 지원한다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3개월동안 내 비자가 잘 연장이 되고 있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다 사건이 터졌다. 한국방문을 위해 입국심사를 거치던 나는 심사관으로 부터 황당한 말을 들었다. '비자연장을 하지않았으니 벌금 4천페소(10만원)를 내라' 급한대로 ATM기에서 돈을 뽑아서 납부하고 한국을 다녀올 수 있었다. 필리핀에 다시 와서 회사에 물어보았다. "제 비자가 연장이 안되고 있었나요?" 돌아온 답변은 황당했다. "아, 그거 여권을 회사에 내야지 연장이 되는데? 벌금으로 낸 4천페소 돌려줄게. 이게 3개월치 연장 비용인 셈이야" 내가 회사에서 정이 떨어지기 시작한건 이 시점 부터였다. 회사에서 3개월간 비자연장비용을 지불한다고 해놓고서 비자연장에 관한 설명도 해주지 않고 모른 척 가만히 있다가 벌금폭탄을 맞으니 그제서야 지원해준 것도 웃기지만, 이곳에서 비자연장 3개월을 하려면 30만원이 넘는 돈이 드는데, 회사에선 달랑 내가낸 벌금 10만원만 돌려주었다.
3. 식비조차 지원해주지 않으려 했다. (결국 받아냈지만...)
어느날 상사에게서 메신저로 메세지 하나가 왔다.
"다다야, 너 계약할때 식사비에 관해서 어떻게 하기로 했어? 내가 알기론 월급 5만페소일때만 식사비 지원으로 알고있는데~" (회사에서는 매일 식사비를 250페소씩 현금으로 지원해준다.)
헉.. 이게 무슨소리인가.. 분명히 대표님과 면접 때 "우린 레스토랑 하는 회사니까 밥먹는건 걱정하지마" 라고 했는데...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내용을 말씀드리니 알겠다며 대표님과 이야기해보겠단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친한 직장동료와 밥을 먹다가 듣게 된 소식
"언니, 저 이번달부터 식사비 지원안된대요.."
알고보니 주거지원이나 식사비를 지원을 받지 못하는 직원들도 많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그것도 면접당시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일하고 2~3개월뒤에 통보식으로 이뤄지는 경우도 많았다. 3개월 뒤 월급을 올려준다 해놓고 월급이 오르면 식비를 지원해 주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아니... 그럼 월급은 왜 올려주지?)
이 주변은 한국인이 많이 찾는 관광단지라 음식값이 만만치 않다. 최소 250~ 300페소(6~7천원)정도는 있어야 밥한끼를 해결 할 수 있다. 6천원 X 25일 = 15만원. 한달월급에서 15만원이 깎이는 것이다. 이 회사는 그냥 작은 식당하나 운영하는 영세한 한인업체가 아니다. 이 지역의 한인업체 중 가장 규모있는, 이 곳을 여행하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만한 유명한 맛집을 운영하고 있으며 그 외 마사지샵과 호핑샵, 커피숍까지 운영하고 있는 큰 기업이다. 이런회사에서 직원들이 일하며 먹는 밥값조차 지원해주지 않는다니... 기가차다.
4. 우리는 너의 직무가 계속 필요할 지 모르겠다.
상사가 나를 사무실로 부른다. 우리는 그 때, 워킹비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내가 필리핀에 온지 3개월이 지났을 때였다. 워킹비자 신청이 가능한지를 물어보는데, 상사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신청은 가능하지만, 일단 몇달 더 일해보고 다음 재계약이 되면 워킹비자를 신청하는게 좋지않을까? 워킹비자를 신청하려면 150만원이 드는데 만약 너가 재계약을 하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가게되면 큰 돈을 날리는거니까..."
이 말인 즉슨, 본인들이 나의 포지션이 계속 필요하게 될지 아닐지 확신할 수 없어서 재계약이 성사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었다. 회사측은 나의 잘못이 아닌, 회사사정으로 인해 재계약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다분히 있다는 것을 면접당시 미리 알려줄 의무가 있다. 한낱 알바일도 아닌 해외에서 전문직을 뽑으면서, 6개월만 일하고 돌아갈 줄 알았으면 그 누가 이곳에 오려고 하겠는가.
5. 해고통보를 15일전에 하는 회사
한국에서는 갑자기 백수가 되어도 당장 어떻게 되지 않지만 해외에서 갑자기 백수가 되면 해야할 일이 많아진다. 일단 불법체류자가 되지 않기위해 비자문제를 처리해야하며, 한국으로 언제 돌아가야할지 날짜 선정과 비행기를 끊기, 살던 집을 처분하기, 한국으로 돌아갔을 때 무엇을 해야할 지 모든 고민들이 순식간에 찾아온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있음에도 불구하고 회사는 나에게 계약기간 만료일인 15일 후에 일을 그만두라고 통보하였다. 내가 사정하여 한달정도 기간을 남겨두고 일할 수 있게 되었긴 하지만 이는 분명히 잘못된 행동이다.
6. 몇 달 일하고 짤리거나 스스로 그만두거나 하는 동료들
(1) 짤리는경우
두 달 전인가, 한국의 여름시즌! 성수기 시즌이 돌아와서 회사는 손님맞이로 무척이나 바빴다.
그로 인하여 직원 몇명을 고용하였나보다. 같이 밥을 즐겨먹던 직장동료가 이번에 새로 들어온 친구라고 저녁 식사 자리에 데려와 소개해주었다. 23살인 그녀는 대학을 휴학하고 한국에서 면접을 보고 이곳으로 날아왔다고 했다. 그 후, 그 친구와 몇 번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보름전인가, 회사 단톡방에서 그 친구가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라는 내용을 남기고 나가버렸다. 내가 이곳에 오기 전에도 타국생활이 안맞아서 한 달만에 그만두고 나간 친구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이 친구도 그런 경우일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왠걸, 나중에 알고보니 그 친구는 한달만에 회사에서 짤린 것이었다. 그 친구를 해고한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으나, 직장동료 이야기로는 평소에 손님을 대하는 표정이 밝지가 않아 대표님이 그 점을 눈여겨 보고 있었다고 했다. 23살, 사회생활이라곤 아르바이트밖에 해본적이 없었을 아이일텐데, 복잡한 회사시스템 (회사시스템이 정말 엉망으로 복잡하다. 개선할 필요가 느껴진다.)을 외워 성수기시즌에 하루 100명이 넘게 밀려드는 손님들을 응대하는것이 쉽지않은 것은 당연하다. 그러한 점을 회사가 전혀 봐주지않고 해외까지 불러 일시키던 사람을 한달만에 해고한다는 것은 부당해고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2) 스스로 나가는 경우
짤리지 않으면 스스로 나간다. 나도 멋있게 사표던지고 나가려고 했는데 그전에 회사가 먼저 선수쳐 짤랐다.
내가 이곳에서 일한지 두 달쯤에 일어난 일이었다. 호핑파트에서 일하던 여직원이 곧 그만두고 나간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는 사무실에서 일을 하다가 우연히 대표님과 한 상사가 그에 관한 대화를 하는것을 듣게되었다. "애들이 다이빙자격증만 따면 쏙 나가버리네요... 이젠 자격증을 못따도록 해야겠어요" 호핑파트 여직원과 개인적인 술자리를 가지면서 그 친구가 회사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알고있었던 난 마음속으로는 이렇게 외치고 싶었다. "다이빙자격증을 따고 이득만 챙기고 나가는게 아니라 이렇게 이상한 회사에 다니고 싶지 않아서 나가는 것이다! "
짤리든 스스로 그만두든 내가 6개월동안 일하면서 본 회사를 나간 직원의 수는 4~5명이나 된다.(한국인직원이 20명 이내인 것을 생각하면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나간 것이다)
채용과 해고를 생각없이 막하는 회사. 한국에 있던 사람을 필리핀까지 들여왔으면 그만큼의 책임을 져야 마땅하나 이 회사는 도무지 그럴 생각이 전혀없다. 해외취업이라는 달콤한 말을 이용하여 필요하면 쉽게 고용하고 필요 없으면 쉽게버리는 그저 직원을 소모품으로 여기는 회사란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을 눈으로 직접본 직장동료도 언젠가 자신이 짤릴지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한 마음을 가지며 일하고 있다.
처음에 이 회사를 들어올 당시, 아무래도 해외에 있는 회사다 보니 취업사기라던지 불량한 회사는 아닐까 걱정이 많이 되었었다. 그래도 내가 입사할만한 괜찮은 회사라 믿었던 이유는 이 회사가 참 좋은 철학을 가지고 운영한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면접 때 치안이 나쁜 필리핀이기에 직원들이 출퇴근 하면서 불안감에 떨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출퇴근 차량을 제공한다는 대표님의 말씀, 네이버 공식카페에 올려져 있었던. 방문한 고객들에게 서비스로 주는 사탕조차도 성분을 알 수 없는 싸구려 사탕보다 화학색소를 사용하지 않는 브랜드의 사탕을 준다는 카페 글. 정기적으로 현지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부를 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정말 올곧은 회사라 생각했다. 고객들의 좋은 이용후기 또한 회사를 믿었던 하나의 이유였다. 하지만, 회사의 직원으로 일하면서 느낀 것은 정 반대였다. 회사는 너무 과도하다 싶을정도로 겉으로 보이는 것에 큰 신경을 썼다. 손님에겐 어떻게든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려 노력하지만 직원에겐 거지같은 대우를 제공하는 이 회사에게 짤렸다는 것을 나는 큰 행운으로 받아들이겠다.
처음 대표님과 면접을 볼 때, 그리고 회사에서 한 달 정도 일했을 때 까지는 회사의 모든 것들이 너무 좋아보였다. 대표님은 직원들을 참 신경쓰는 듯 보였고, 나에게도 늘 먼저 안부를 묻고 대화도 많이 나누려 애쓰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한 가지 깨달았다. 해외취업이든 국내취업이든 초면인 사람의 겉의 번지르르한 말들과 눈에 보이는 것들만을 너무 믿지는 말자. 그리고 해외취업을 도전하려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 당부하고 싶은 말은 달콤한 말에 속아 쓴맛을 볼 마음가짐또한 되어있어야 한다는 점. 나는 달콤한 말도, 쓴맛도 모두 나의 인생에 큰 도움이 되리라는 믿음으로, 감사한 경험으로 생각하고 돌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