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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빠투툼 appatutum Dec 02. 2015

생산 라인의 꽃, '수리 기사'가 되었다

[나는 고졸사원이다 30] 수리 기사로의 직무전환

"나이 서른넷 어느덧 벌써 30대 중반 나에겐 절대로 오지 않을 것 같았던 30대 중반 미친 듯이 일만 하며 살아온 10년이 넘는 시간 남은 것 고작 500만 원 가치의 중고차 한 대 사자마자 폭락 중인 주식계좌에 500 아니 휴짓조각 될지도 모르지 대박 or 쪽박 


2년 전 남들 따라 가입한 비과세 통장 하나 넘쳐나서 별 의미도 없다는 1순위 청약통장 복리 좋대서 주워듣고 복리적금통장 몇% 더 벌려고 다 넣어둬 CMA통장 손가락 빨고 한 달 냅둬도 고작 담배 한 갑 살까 말까 한 CMA통장 이자 외국에 이민 가서 살고 있는 고등학교 동창 친구 놈 가끔 연락이 와 자기는 노가다 한대 노가다해도 한국 대기업 댕기는 나보다 낫대 이런 우라질 레이션 평생 일해도 못 사 내 집 한 채" - 자작곡 <응답하라! 30대여~> 노랫말 중에서

                                                                                  

▲ 직무수당 납품 사원일 때 10만 원씩 받던 직무수당이 수리기사가 된 뒤 5만 원으로 50%  삭감되었다. 


1톤 트럭과 함께 하루를 보내며 지낸 지가 3개월이 지났다. 나는 우리 회사 생산 라인이 멈추지 않고 계속 돌아갈 수 있도록 대기업에서 자재를 제때 가져다가 투입을 해주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가끔 일정이 꼬이면 하루에 4회 이상을 왔다 갔다 해야 할 때도 있었고 가끔은 다른 사람들보다 1시간 이상 일찍 출근해서 자재를 배달해야 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간헐적으로  발생되었기 때문에 퇴근 시간이 지나 업무가 끝나면  은근슬쩍 퇴근해서 집으로 와 버렸다.


당당하게 퇴근한다고 말하고 나올 수 없었던 이유는 '눈치'가 보였기 때문이다. 당시 프린트 생산 라인에서 근무하고 있는 친구들은 하루에 매일 3~4시간씩 연장 근무를 했다. 생산 물량을 맞추기 위해 생산 라인은  밤늦게까지 돌아갔고 생산 라인 스케줄에 맞춰서 간접부서 사원들도 그 시간까지 퇴근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저녁에 대기업에 들어갈 일도 없는데 회사에서 눈치 보며 버티기 싫어 시간이 되면  몰래몰래 퇴근을 했다.


산업기능요원들은 '시급제'로 급여를 받았기 때문에 연장 근무를 하면 시급의 1.5배로 '잔업 수당'을 받는다. 하지만 나는 그 수당 보다 일 없이 빈둥거리며 눈치 보는 시간이 싫었기 때문에 수당도 포기한 채 도망치듯 퇴근을 했다. 그렇게 눈치 보며 3개월을 보냈다.


그러다 낮에는 차에서 낮잠 자며 농땡이를 피우고 저녁엔 눈치 보며 도망치듯 퇴근을 하고 있는 내 생활이 한심해졌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상황을 바로 잡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길로 나는 내가 입사할 때 면접을 봤던 관리과 부장님께 찾아가 직무를 바꿔 달라고 요청했다. 


이전 직장에서 나는 TV 품질관리 업무를  담당했었다. 지금의 우리 회사에도 자체 브랜드는 아니지만 대기업의 외주를 받아 TV를 생산하고 있었다. 당연히 나는 우리 회사에  입사하면 TV 쪽에 배치가 될 줄 알았는데 프린트 사업부에 배치가 됐다. 그것도 자재과에서 납품 사원으로. 그 부분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내 역량을 좀 더 키울 수 있게 해 달라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약 2주 후 나는 TV 사업부로 자리를 옮길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자재과 수장이었던 과장님께서 내 진심을 알아주셨고 당장 내가 빠지면 자재과 업무가 늘어나는데도 나를 TV 사업부로 보내주셨다. 여기까지는 내가 생각한 시나리오였는데 마지막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전 직장에서부터 노하우를 기록하던 다이어리를 다시 꺼냈다


▲ 불량품 쉬운 불량이 아닌 '꼴통' 불량이 발생될 때면 나 혼자 해결할 수가 없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도움을 청해야만 했다. 


품질관리 부서로 가서 TV 품질관리 업무를 다시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일이 틀어져 생산팀에 배치가 되었다. 생산 라인의 작업자가 되는 것은 아니었고 CCTV 라인에서 '수리기사'가 되었다. 수리기사는 생산 라인의 꽃이라고 불리는 직무였는데 제품 생산 중에 발생되는 불량품을 수리하여  재투입하는 업무를 담당하며 자주 발생되는 불량의 원인을 파악하고 생산 환경을 개선하는 일을 한다.


당시 우리 회사 TV 생산팀에는 변변한 수리기사가 없었다. TV 라인과 CCTV 라인 2개가 운영되고 있었는데 TV 라인에는 갓 스무 살짜리 초보 수리기사가 있었다. CCTV 라인에는 수리기사가 없었고 생산팀 주임이 간단한 불량품 수리를 하며 겸직을 하고 있었다.


CCTV는 당시 회사에서 '돈 되는' 품목이었다. 내수용 소형 TV만 생산하던 TV 라인과 달리 CCTV는 해외로 수출하는 모델들도 많이 생산을 하고 있었고  그중에는 대당 수백 만 원을 호가하는 다채널 CCTV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앞으로 도맡아서 해야 하는 CCTV 라인의 수리기사는 우리 회사에서 특히 중요한 직무 중 하나였다.


납품 사원을 할 때는 한 달에 10만 원의 직무 수당이 기본급 외에 별도로 나왔다. 하지만 수리기사로 직무가 변경되고 나니 직무수당이 5만 원으로 삭감되었다. 아무래도 매일 운전을 하고 다니는 일에 비해 내근업무를 하는 직무라 수당이 적은 듯했다. 하지만 하루 종일 화장실도 가고 싶을 때 못 가고 서서 일하는 생산 라인 작업자들과 같은 공간에서 일하면서 받는 이 5만 원은 나 혼자 바깥에 나가면서 받던 10만 원보다 그 의미가 더 남달랐다.


처음 수리기사가 되고 생산 라인에서 빠지는 불량품들을 맞닥뜨렸을 때 도통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전 직장에서 부품 신뢰성 시험과 더불어 외주업체에서 생산해 입고되는 TV용 보드에 대한 품질관리를  담당했었기 때문에 금방 배울 거라며 잠시 자만했던 내가 너무 어리석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상적으로 만들어진 제품인지 확인하는 것과 잘못 만들어진 제품을 고치는 것은 엄연히 다른 영역이었다.


처음엔 기존에 수리기사 역할을 겸직해오던 주임님에게 물어보면서 쉬운 불량품 수리하는 것부터 배워 나갔다. 하지만 제품 생산을 하다 보면 소위 말해 '꼴통' 불량품도 나오게 마련인데 그런 불량품이 나오면 여기저기 내가 물어볼 만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부탁을 해야 했다. 


이전 직장을 나오면서 내가 가지고 나온 게 하나 있다. 그건 바로 다이어리다. 그 다이어리에는 내가 신뢰성 시험을 하면서 배운 것들과 TV 부품 검사에 관련된 노하우가 기록되어 있었다. 1년이 가까운 시간 동안 쓴 내 역량 개발의 흔적들을 수리기사가 되면서 다시 기록해 나갈 수 있었다. 


불량품 수리를 하게 되면 '수리 일보'를 작성해서 기록을 남기게 되어 있었지만 그와 별개로 나만의 노하우를 다이어리에 기록해 나갔다. 그렇게 점점 시간이 흘러가고 나는 '회로 해석'에 눈을 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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